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장부 한 줄에 담긴 밭 162,618㎡, 버들 나루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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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장부 한 줄에 담긴 밭 162,618㎡, 버들 나루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필지총 162,618㎡밭 100%시리즈 신기록 3관왕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에는 국유지 1필지, 총 162,618㎡가 있었습니다. 이 중 밭이 1필지 162,618㎡로, 양화동 국유지 전체가 단 하나의 필지, 단 하나의 지목인 밭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필지 수는 시리즈 전체 최소이지만 한 필지의 면적은 축구장 약 22.8개에 달해, 단일 필지 규모로는 시리즈 역대 최대급 기록입니다.
이 동네의 국유지 장부는, 단 한 줄이면 끝납니다.
보통 한 동네의 국유지 기록을 열면 여러 필지가 줄줄이 이어집니다.논 몇 필지, 밭 몇 필지, 대지 몇 필지.
그런데 1912년 양화동의 장부는 다릅니다.딱 한 줄.밭, 1필지, 162,618㎡.
이것이 전부입니다.
서울의 동네들을 기록해 온 이 시리즈에서 국유지가 단 1필지뿐인 동네는 양화동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그 한 줄을 얕보면 안 됩니다.162,618㎡.약 49,192평.축구장 22.8개를 이어 붙인 크기의 밭이 단 하나의 필지 번호 아래 묶여 있었으니까요.
서울에서 가장 짧은 장부에, 가장 거대한 밭 하나.
버드나무 꽃이 피던 나루, 양화도 곁의 이 벌판에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한 줄짜리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목차
1. 1912년 양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얼마나 있었나요?
2. 국유지가 단 1필지뿐이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3. 1912년 양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4. 양화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5. 버들 나루 양화도와 이 벌판의 역사는 어땠나요?
6. 1912년의 양화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행정구역의 반전
7. 지목별 현황표와 데이터로 보는 양화동
8.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9. 실제 조사 성공 사례: 강변 모래땅이 품고 있던 시간
10. 시리즈 기록 비교: 양화동이 세운 세 개의 신기록
11.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 1912년 양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명확하게 정리하겠습니다.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의 국유지는 총 1필지, 162,618㎡였습니다.
162,618㎡를 평으로 환산하면 약 49,192평입니다.축구장으로 치면 22.8개, 여의도공원 전체 면적의 70%를 넘는 크기입니다.
필지 수와 면적의 대비가 이렇게 극단적인 동네는 흔치 않습니다.
비교해 보면 감이 옵니다.앞서 다룬 송파구 삼전동은 4필지에 63,160㎡였습니다.양화동은 필지 수가 삼전동의 4분의 1인데, 면적은 2.5배가 넘습니다.
한 필지의 크기로 따지면 삼전동 평균 필지의 10배가 넘는 땅 덩어리입니다.
땅이 쪼개지지 않았다는 것.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의 성격으로 통일된 벌판이었다는 것.이 한 줄짜리 기록은 그 자체로 양화동의 지형과 살림살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2. 국유지가 단 1필지뿐이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필지는 토지의 소유와 이용을 구분하는 최소 단위입니다.주인이 다르거나, 쓰임이 다르거나, 지목이 다르면 필지는 나뉩니다.
거꾸로 말하면, 필지가 나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넓은 땅 전체가 하나의 소유, 하나의 쓰임, 하나의 지목으로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축구장 22.8개 규모의 땅에 경계선이 단 하나도 필요 없었다는 사실.이것은 이 벌판이 개별 농가의 자잘한 경작지가 아니라, 국가가 한 덩어리로 관리하던 광활한 개간지 혹은 강변 부지였음을 시사합니다.
양화동은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자리의 저지대입니다.물길이 자주 바뀌고 홍수가 들락거리던 습지형 벌판이었습니다.
이런 땅은 개인이 나눠 갖고 정착하기보다, 물이 물러난 자리를 넓게 갈아 쓰는 방식이 자연스럽습니다.거대한 단일 필지는 그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장부의 간결함이 오히려 땅의 성격을 가장 웅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3. 1912년 양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이 글의 핵심 질문에 답하겠습니다.1912년 양화동 국유지 중 밭은 1필지, 162,618㎡였습니다.
즉 국유지 전체가 밭이었고, 밭의 비율은 정확히 100%입니다.
논이 아니라 밭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강변 저지대라면 물을 대기 쉬운 논이 먼저 떠오르는데, 양화동의 국유지는 밭으로 기록됐습니다.
여기에는 지형의 사정이 숨어 있습니다.한강 하류 쪽 강변에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사질토 벌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물은 가깝지만 모래땅이라 물을 가두기 어렵고, 대신 물이 빠지면 금세 갈 수 있는 땅.
이런 곳에서는 벼보다 채소와 잡곡이 잘 자랍니다.실제로 한강변 모래벌은 근대까지도 서울에 채소를 대던 밭농사 지대로 이름났습니다.
버드나무가 늘어선 나루 곁, 강바람을 맞으며 펼쳐진 드넓은 채소밭.1912년의 장부 한 줄은 그런 풍경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4. 양화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양화(楊花)는 버들 양, 꽃 화.글자 그대로 '버드나무 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대에는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유난히 많았습니다.선유도와 마주한 강변에 버들가지가 휘늘어지고, 봄이면 버들개지가 눈처럼 날리던 곳.그 곁에서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이 강을 건너던 나루가 양화도, 곧 버들꽃 나루였습니다.
양화동이라는 동명은 바로 이 양화도 나루터 주변 마을이라는 데서 왔습니다.
토박이들이 부르던 옛 지명도 정겹습니다.선유도 동쪽, 톱날처럼 생긴 모래밭은 '나루께모래톱'.나루터에 잇닿아 형성된 마을은 '벌판동네'.
모래톱과 벌판.이 두 단어만으로도 1912년 장부의 밭 162,618㎡가 어떤 땅 위에 있었는지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름은 꽃을 말하고, 장부는 밭을 말하지만, 둘은 같은 풍경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5. 버들 나루 양화도와 이 벌판의 역사는 어땠나요?
양화 나루는 조선 시대 한강에서 손꼽히는 요충이었습니다.
강 건너 북쪽 기슭의 양화진은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한강의 3대 나루로 불렸고, 진영을 두어 군사를 주둔시킬 만큼 서울 서쪽 방어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나루 일대는 경치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했습니다.겸재 정선이 화폭에 담았을 만큼, 버들 늘어진 강가와 선유봉의 절경은 한양 사람들의 뱃놀이 명소였습니다.
동시에 이곳은 근대사의 격랑이 지나간 자리이기도 합니다.강 건너편에서는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새겨졌고, 개화파 김옥균의 비극도 그 언저리에서 매듭지어졌습니다.지금 합정동 쪽에 남은 절두산 성지와 외국인선교사묘원이 그 기억을 지키고 있습니다.
강 남쪽의 양화동 벌판은 그 모든 역사를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지켜본 땅입니다.
나루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대고, 홍수가 지나가면 다시 흙을 갈아엎으며 살아온 벌판.화려한 사건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 곁을 지킨 무대였습니다.
1912년의 한 줄 기록은 이 조용한 무대의 초상화인 셈입니다.

6. 1912년의 양화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행정구역의 반전
여기서 이 시리즈다운 반전 하나를 짚고 가겠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 당시, 이 땅의 주소는 서울도 영등포도 아니었습니다.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그것이 당시의 공식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양화동의 소속 변천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합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가 되고, 1936년에야 경성부에 편입되어 양화정이 되었으며, 1946년 일제식 이름을 고쳐 지금의 양화동이 되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도 있습니다.원래 안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은 지금과 달랐고, 1935년 제방 축조로 물길이 바뀌면서 양화동이 비로소 영등포 생활권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강물이 길을 바꾸자 행정구역도 따라 움직인 셈입니다.
본 시리즈는 독자의 검색 편의를 위해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을 기준으로 제목을 붙이되, 1912년 당시 소속이 경기도 양천군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본문에 투명하게 밝혀둡니다.
기록을 다루는 글은 이런 어긋남까지 정직하게 적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7. 지목별 현황표와 데이터로 보는 양화동
숫자를 표로 정리하겠습니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율 |
밭 | 1필지 | 162,618㎡ | 100.0% |
전체 국유지 합계 | 1필지 | 162,618㎡ | 100.0% |
표 각주: 지목별 합계(1필지 162,618㎡)와 전체 국유지 총계(1필지 162,618㎡)는 필지 수와 면적 모두 완전히 일치하며, 포스트 작성 전 산술 검증을 완료했습니다. 면적은 1912년 조사 당시 평 단위 기록을 ㎡로 환산한 값 기준입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였으며, 본 글은 현재 행정구역(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을 기준으로 표기했습니다.
지목별 면적 비중
밭 162,618㎡ · 100%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양화동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것으로, 밭 1필지 162,618㎡가 국유지 전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8.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이제 이 한 줄짜리 기록이 오늘날 어떤 힘을 갖는지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은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에 대해 착공 전 매장유산 존재 여부를 확인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확인 절차는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첫째, 지표조사.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지형을 검토해 유적 존재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둘째, 표본조사.대상지 일부 지점을 골라 시험적으로 확인합니다.
셋째, 시굴조사.가능성이 확인된 구역을 넓혀 파며 유구의 범위와 성격을 가늠합니다.
넷째, 발굴조사.유적의 전모를 학술적으로 기록하고 보존 방안을 세우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 모든 절차의 첫 단추인 지표조사에서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개발 이전 땅의 원형을 알려주는 기준선 역할을 합니다.
양화동의 경우 시사점이 뚜렷합니다.
첫째, 이 땅은 1912년까지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순수 경작지였습니다.깊은 기초공사로 교란된 적이 없다는 뜻이므로, 경작토 아래 옛 층위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둘째,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나루 생활권입니다.나루터 주변에는 주막, 창고, 선착 시설 같은 생활 유구가 형성되기 마련이고, 강변 퇴적층은 그런 흔적을 덮어 보존하는 천연 타임캡슐이 되곤 합니다.
셋째, 한강과 안양천 합류부는 물길이 여러 번 바뀐 지역입니다.옛 물길의 위치를 복원하는 데에도 1912년의 필지 경계와 지목은 귀중한 단서가 됩니다.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조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옛 토지 기록부터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9. 실제 조사 성공 사례: 강변 모래땅이 품고 있던 시간
강변 저지대의 밭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암사동 유적이 대표적입니다.한강변 모래땅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집터가 무더기로 확인되며, 서울이 6천 년 전부터 사람의 터전이었음을 증명해낸 현장입니다.홍수가 나르던 모래가 오히려 유적을 겹겹이 덮어 지켜준 덕분이었습니다.
양화동과 같은 영등포 권역에서도 유사한 발견의 역사가 있습니다.한강변 개발 과정에서 이루어진 각종 입회조사와 시굴조사들은, 겉보기에 평범한 강변 부지 아래에서 근대 나루 관련 시설의 흔적과 옛 경작층을 확인해 왔습니다.
공통점은 하나입니다.파기 전에 먼저 종이 위의 기록을 읽었다는 것.
옛 지도에서 나루의 위치를 확인하고, 토지 장부에서 지목의 변천을 추적한 뒤에야 삽이 들어갔고, 그 순서 덕분에 유적은 파괴 대신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1912년 양화동의 밭 1필지 162,618㎡라는 기록도 언젠가 이 벌판 어딘가에서 삽을 든 조사원에게 첫 번째 나침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10. 시리즈 기록 비교: 양화동이 세운 세 개의 신기록
시리즈 신기록 3관왕 달성
양화동은 이번 시리즈에서 세 가지 기록을 새로 세웠습니다. 첫째, 국유지 총 필지 수 1필지로 역대 최소 필지 수 신기록. 둘째, 밭 평균 필지 면적 162,618㎡로 밭 부문 압도적 역대 1위. 셋째, 밭 비율 100%로 밭 비율 부문 공동 불가능 최고치 달성입니다. 아울러 삼전동에 이어 시리즈 두 번째 단일 지목 100% 동네가 되었습니다.
흐름이 재미있습니다.바로 앞 삼전동 편에서 시리즈 최초의 단일 지목 100%가 나왔는데, 연이어 양화동이 두 번째 사례로 등장했습니다.
둘 다 한강변 동네라는 점이 우연이 아닙니다.강변의 땅은 물이라는 단일한 조건이 지배하기에, 지목도 하나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결은 정반대입니다.삼전동은 나루의 광장이었던 잡종지 100%.양화동은 나루 곁의 경작지였던 밭 100%.
같은 강, 같은 시대, 같은 단일 지목이지만 땅의 팔자는 이렇게 갈렸습니다.이 대비를 나란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시리즈를 쌓아가는 즐거움입니다.

11.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Q1. 1912년 양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필지였습니다.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적은 필지 수입니다.
Q2. 1912년 양화동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A. 총 162,618㎡로, 약 49,192평에 해당합니다.
Q3. 1912년 양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필지 162,618㎡로, 국유지 전체가 밭이었습니다.
Q4. 1912년 당시 양화동은 서울에 속해 있었나요?
A. 아닙니다. 당시에는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였으며, 1936년 경성부 편입을 거쳐 1946년 지금의 양화동이 되었습니다. 본 글의 지역 표기는 현재 행정구역 기준입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
A.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문헌 검토 단계에서 개발 이전 토지 이용 양상과 옛 물길, 나루터 입지를 확인하는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국유지는 단 1필지 162,618㎡의 밭으로, 시리즈 최소 필지 수와 밭 평균 필지 면적 최대 기록을 동시에 세운 버들 나루 곁의 거대한 벌판이었습니다.

자료 기준 및 출처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1912년 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화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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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여러 장의 기록을 남기고,어떤 삶은 단 한 줄로 남습니다.그러나 한 줄이라고 해서가벼운 생이었던 것은 아닙니다.버들꽃 날리는 봄마다 씨를 뿌리고,강물이 넘칠 때마다 다시 일어나사만 구천 평의 흙을 갈던 손들이그 한 줄 안에 모두 들어 있으니까요.당신의 오늘도 어쩌면 한 줄로 기록될 것입니다.그 한 줄이 얼마나 넓고 깊을 수 있는지,백 년 전 양화동의 밭이 조용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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