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등포구 당산동 국유지의 비밀 — 밭 29필지, 잡종지, 대지가 품은 110년의 역사
- 5월 30일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데이터
"36필지, 155,703㎡.
이 광활한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지금 우리가 걷는 영등포구 당산동 그 발밑에
110년 전 역사의 층위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기록이 증명하는 땅의 비밀을 지금 공개합니다.
1912년 영등포구 당산동 국유지의 비밀 — 밭 29필지, 잡종지, 대지가 품은 110년의 역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36필지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당산동, 지금과 전혀 달랐던 110년 전 풍경
021912년 당산동 국유지 통계 — 36필지 155,703㎡의 전모
03밭 29필지 96,400㎡ — 광활한 농경지가 말해주는 것
04잡종지 3필지 54,476㎡ —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땅
05대지 4필지 4,826㎡ — 사람이 살았던 자리의 흔적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란 무엇인가
07당산동 발굴이 가져올 수 있는 성공 사례와 가능성
08우리가 이 땅의 이야기를 계속 기억해야 하는 이유
01
당산동, 지금과 전혀 달랐던 110년 전 풍경
당산역 2호선 개찰구를 빠져나와 거리를 걷다 보면, 대형 마트와 오피스 빌딩,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이 자리가 110년 전에는 드넓은 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지금 발 밑에 깔린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기초 아래, 그 깊은 곳에 1912년 사람들의 삶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농사를 짓던 손의 흔적, 씨앗을 뿌리던 계절의 기억, 그리고 국유지라는 이름 아래 관리되던 땅의 역사가 아직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위를 매일 걸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1912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모든 땅을 측량하고, 소유자를 확인하고, 지목을 정해 등록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유지로 분류된 토지들은 이후 식민지 행정과 군사, 경제 침탈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영등포구 당산동의 국유지 기록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산동은 한강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예부터 농경과 수운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1912년 당시에도 그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고, 그 흔적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36필지 155,703㎡의 국유지 기록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02
1912년 당산동 국유지 통계 — 36필지 155,703㎡의 전모
숫자부터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겠습니다. 1912년 영등포구 당산동의 국유지는 총 36필지, 면적은 155,703㎡였습니다. 155,703㎡. 감이 오시나요? 축구장(약 7,140㎡) 기준으로 무려 21.8개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서울 도심의 한 동네 안에 이렇게 광활한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습니다.
이 36필지는 크게 세 가지 지목으로 나뉩니다. 밭, 잡종지, 그리고 대지입니다. 각 지목이 가진 비율과 규모를 보면 1912년 당산동이 어떤 성격의 공간이었는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잡종지가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며, 대지는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이 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파헤쳐 보겠습니다.
국유지 총 필지
36필지
당산동 전체 국유지
국유지 총 면적
155,703㎡
축구장 약 21.8배
최대 지목
밭
29필지 / 61.9%
밭
96,400㎡ (61.9%)
잡종지
54,476㎡ (35.0%)
대지
4,826㎡ (3.1%)
지목 | 필지 수 | 면적 (㎡) | 비율 |
밭 | 29필지 | 96,400㎡ | 61.9% |
잡종지 | 3필지 | 54,476㎡ | 35.0% |
대지 | 4필지 | 4,826㎡ | 3.1% |
합계 | 36필지 | 155,703㎡ | 100% |
03
밭 29필지 96,400㎡ — 광활한 농경지가 말해주는 것
전체 국유지 면적의 61.9%를 차지하는 밭. 29필지에 96,400㎡. 이것이 1912년 당산동 국유지의 진짜 얼굴입니다. 지금의 당산동 풍경과는 완전히 딴판이지 않나요? 대형 마트가 들어선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솟아있는 그 땅에, 불과 110년 전에는 작물이 자라고 농부의 손길이 닿던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국유지로 등록된 밭이라는 것은 단순한 농경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조선 왕실이나 국가기관이 관리하던 농지였거나,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연고자 없이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 땅 위에서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밭은 굉장히 흥미로운 조사 대상입니다. 농경지 아래에는 경작과 관련된 유구, 즉 수로 흔적, 밭두렁 구조물, 농기구 파편 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밭으로 사용된 땅 아래에 그 이전 시대의 주거지나 건물지 유구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입니다. 농경지는 깊이 파지 않기 때문에, 더 아래층의 유구가 교란 없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밭 구역을 꼼꼼히 살피면 예상치 못한 역사의 층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29필지라는 필지 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용도나 역사가 다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밭이라도 어느 필지는 수십 년 된 경작지일 수 있고, 어느 필지는 원래 다른 지목이었다가 밭으로 바뀐 것일 수도 있습니다. 1912년 기록과 그 이전의 고지도, 문서 기록을 교차 분석한다면 훨씬 정밀한 역사적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농경지 아래에는 교란되지 않은 더 깊은 문화층이 온전히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9필지 96,400㎡의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당산동 역사의 가장 두꺼운 층위를 품은 보물창고일 수 있습니다.
04
잡종지 3필지 54,476㎡ —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땅
잡종지 3필지 54,476㎡. 필지 수는 적지만 면적은 전체 국유지의 35%에 달합니다. 1필지당 평균 18,158㎡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건 굉장히 큰 단일 필지입니다. 축구장 2.5개 크기의 땅이 '잡종지'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잡종지라는 지목은 지금은 사라진 용어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논·밭·대지·임야 등 기존 지목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땅을 잡종지로 구분했습니다. 실제로는 창고 부지, 군사시설 부속지, 집산장터, 폐기물 처리 공간, 또는 미개발 공지 등 다양한 용도의 땅이 이 지목으로 묶였습니다.
당산동의 잡종지 54,476㎡는 영등포 일대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단서입니다. 영등포는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도 개통을 기점으로 급격히 공업화된 지역입니다. 이 시기 잡종지는 공장 부지나 창고 부지로 전용되거나, 철도 관련 시설의 부속 공간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54,476㎡의 잡종지 아래에는 근대 산업화 초기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측면에서 잡종지는 가장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가장 흥미로운 조사 대상입니다. 시굴조사를 통해 먼저 지하 층위를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표본조사와 발굴조사로 단계를 높여가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05
대지 4필지 4,826㎡ — 사람이 살았던 자리의 흔적
전체 면적의 3.1%에 불과하지만, 대지 4필지 4,826㎡는 당산동 국유지 중 가장 직접적으로 사람의 생활 흔적을 담고 있는 땅입니다. 대지는 건물이 서 있었거나 세울 수 있는 땅입니다. 1912년 기준 이 4필지에는 국가 소유의 건물이 있었거나,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등포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보면 이 대지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912년은 경부선 개통(1905년) 이후 영등포역이 교통 요충지로 부상하던 시기입니다. 역 주변의 국유 대지는 관사, 역무 관련 시설, 또는 일본군 관련 시설 부지로 활용된 사례가 서울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당산동의 대지 4필지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관점에서 대지는 건물 기초석, 온돌 유구, 우물 흔적, 생활 도기, 기와 파편 등 다양한 유물이 나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조사 대상입니다. 4필지 4,826㎡라는 규모는 시굴조사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면적이고, 지표조사에서 기와편이나 건축 관련 유물이 확인된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근거가 됩니다.

06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란 무엇인가
이쯤에서 잠깐 개념 정리를 해볼게요.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뉴스에서 가끔 들어본 단어들인데, 막상 각각이 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고 나면 당산동 국유지 기록이 왜 중요한지 훨씬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가장 첫 번째 단계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눈으로 하는 발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표면 위에 드러난 기와 파편, 토기 조각, 돌담 흔적, 지형의 굴곡 같은 단서들을 꼼꼼히 수집합니다. 이 단계에서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역사 기록이 강력한 보조 자료로 쓰입니다. 기와편이 발견된 위치가 토지대장의 대지 구역과 겹친다면,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는 방식입니다.
시굴조사는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로 좁은 구역을 파보는 단계입니다. 전체를 다 파지 않고 대표적인 구역만 선택해 지하 유구의 존재 여부와 성격을 먼저 파악합니다. 표본조사는 시굴조사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방법이고, 발굴조사는 유구가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발굴하는 최종 단계입니다.
이 네 단계 중 어느 것 하나 생략하면 안 됩니다. 성급하게 발굴부터 시작하면 귀중한 유구를 파괴할 수 있고, 반대로 지표조사에서 멈추면 땅 속의 진짜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산동 국유지 36필지는 이 네 단계의 조사가 모두 필요한, 그리고 그 결과가 기대되는 충분한 역사적 근거를 갖추고 있습니다.
발굴은 무조건 파는 게 아닙니다. 기록 검토 →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잃지 않고 역사를 꺼낼 수 있습니다. 1912년 당산동 국유지 기록이 바로 그 첫 번째 단추입니다.

07
당산동 발굴이 가져올 수 있는 성공 사례와 가능성
실제로 이런 기초 기록을 바탕으로 한 조사가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으신가요? 서울 인근 지역의 발굴 사례들이 그 답을 줍니다.
서울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 1912년 지목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지표조사를 진행한 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공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와편 몇 점이 나왔고, 그 위치가 토지대장의 대지 구역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이 단서 하나로 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조선 후기 가옥의 온돌 유구와 생활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땅 속 역사가 되살아난 순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례는 밭으로 기록된 국유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밭 아래에 더 오래된 문화층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표본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중기 이전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과 우물 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농경지가 오히려 오래된 유구를 교란 없이 보존하는 뚜껑 역할을 한 셈입니다. 당산동의 29필지 밭도 바로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잡종지에서의 성과 사례도 있습니다. 서울의 한 구역에서 1912년 잡종지로 기록된 넓은 국유지를 조사한 결과, 근대 초기 산업 시설의 기초 구조물과 함께 그 이전 시대의 주거 유구가 겹쳐 발견되었습니다. 한 땅 안에 시대가 다른 두 개의 역사층이 공존한 것입니다. 당산동 잡종지 3필지 54,476㎡는 그보다 훨씬 넓은 면적입니다.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성공 사례의 공통점 — 역사 기록 먼저, 발굴은 나중에
성공적인 발굴 사례들의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역사 기록을 먼저 충분히 검토하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근거를 쌓은 뒤 발굴에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당산동 36필지 155,703㎡는 바로 그 첫 번째 단계인 역사 기록 검토의 핵심 자료가 됩니다.

08
우리가 이 땅의 이야기를 계속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12년 당산동 국유지 36필지 155,703㎡. 이 기록을 처음 봤을 때 단순한 숫자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밭을 일구던 농부의 손, 잡종지 위에 세워졌을 어떤 시설, 대지 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이 조금은 눈에 그려지지 않나요?
역사는 박물관 유리 케이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 타는 지하철역, 장을 보는 마트 그 아래 땅속에 살아있습니다. 그것을 꺼내는 작업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이고, 그 조사를 올바르게 시작하게 해주는 것이 1912년 토지대장 같은 기초 역사 기록입니다.
당산동의 국유지 기록이 언젠가 시굴조사와 지표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진다면, 그 결과물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됩니다. 교과서에 실리고, 박물관에 전시되고, 아이들이 그 앞에 서서 110년 전 당산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시작은 숫자 하나, 기록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행동으로 이어갈 때 역사는 비로소 미래가 됩니다.
"36필지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10년의 침묵을 깨울 누군가를."
당산동의 밭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땅속에 남아 있습니다.
잡종지의 역할은 잊혔지만, 그 흔적은 층위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대지 위의 집은 무너졌지만, 기초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록하고 조사하는 한, 과거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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