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등포구 3,671필지 17,374,891㎡한강이 키운 농경지, 그리고 철도가 바꾼 운명
- 6월 1일
- 7분 분량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전역 ·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
1912년 영등포구 3,671필지 17,374,891㎡한강이 키운 농경지, 그리고 철도가 바꾼 운명
7천 년 전 신석기인이 살았고, 조선시대엔 한강변 나루터였으며, 1912년엔 서울 면적 최상위의 거대 농경 지대였다. 그 땅 아래에 아직 꺼내지 못한 역사가 있다.
3,671총 필지
17.4M총 면적(㎡)
10지목 유형
298일본인 소유 필지
7,000+년 전 첫 거주
지금 영등포역 앞 그 땅, 112년 전엔 이씨 집안의 논이었다.
1912년, 한반도 전역의 땅이 일제의 측량 기계 앞에 놓였다. 영등포는 그 조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서울 지역 중 하나로 기록됐다. 총 3,671필지에 걸쳐 17,374,891㎡. 지금의 여의도 면적 기준으로 환산하면 여의도 57개를 합친 크기다.
그런데 이 방대한 땅의 88%가 논과 밭이었다. 지금 타임스퀘어 쇼핑몰이 들어선 곳도, 영등포역 광장도, 당산동 고층 아파트 단지도 112년 전엔 조선 농민들이 허리 굽혀 일하던 밭이었다. 그리고 그 농민들의 성씨가 토지조사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씨 704필지, 김씨 537필지.
그 이름들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그 땅 아래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 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목차
11912년 영등포구 토지 통계 총괄
2지목별 상세 분석 — 10가지 땅의 얼굴
3성씨 분포로 읽는 1912년 영등포 사회
4소유자 구조 — 조선인·일본인·국유지
5영등포의 7,000년 역사 — 왜 이 땅이 특별한가
6철도용지 222,473㎡ — 근대화의 충격
7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필요성
8한강변 발굴 성공 사례
9기억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1
1912년 영등포구 토지 통계 총괄 — 숫자가 보여주는 풍경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기록한 영등포구의 전체 현황을 먼저 숫자로 정리한다. 이 숫자들을 들여다보면 당시 영등포가 어떤 성격의 땅이었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3,671필지총 필지 수
17.4M㎡총 면적
2,135필지밭(최다)
617필지논
443필지대지
370필지국유지
305필지잡종지
298필지일본인 소유
지목 | 필지 | 면적(㎡) | 면적 비율 | 비율 시각화 |
밭(田) | 2,135 | 8,996,966 | 51.8% | |
잡종지 | 305 | 4,300,839 | 24.7% | |
논(畓) | 617 | 2,617,294 | 15.1% | |
임야(林野) | 145 | 696,796 | 4.0% | |
대지(垈) | 443 | 483,218 | 2.8% | |
철도용지 | 2 | 222,473 | 1.3% | |
분묘지 | 13 | 46,899 | 0.27% | |
지소(池沼/연못) | 3 | 6,700 | 0.039% | |
사사지(寺社地) | 6 | 2,790 | 0.016% | |
도로 | 2 | 912 | 0.005% | |
합계 | 3,671 | 17,374,891 | 100%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압도적인 농경지 비율이다. 밭 2,135필지와 논 617필지를 합치면 2,752필지로 전체의 75%가 농경지다. 지금의 영등포를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수치다. 하지만 1912년 당시 영등포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충적평야 위에 펼쳐진 농촌 지대였다. 한강이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비옥한 충적토가 이 농경지의 토대였다.
또 하나 주목할 수치는 잡종지 305필지 4,300,839㎡다. 전체 면적의 24.7%에 달하는 이 광대한 잡종지는 당시 영등포에서 일어나고 있던 급격한 변화의 징후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1912년 한강 제2철교가 놓이면서 영등포 일대는 이미 산업화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잡종지는 그 과도기적 토지 이용 상황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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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목별 심층 분석 — 분묘지·사사지·연못이 품은 의미
영등포구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수치는 작지만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목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분묘지 13필지 46,899㎡. 평균 한 필지당 3,607㎡의 묘역이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 무덤이 아니라 가문 전체의 묘역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영등포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씨, 김씨, 정씨 가문의 종산(宗山)이 이 분묘지 안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묘역에는 회곽묘, 목관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가 공존하며,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부장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사사지(寺社地) 6필지 2,790㎡의 숨겨진 역사
사사지는 사찰이나 신사의 부지다. 1912년 영등포에 6필지 2,790㎡의 사사지가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사찰이나 민간 신앙 공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영등포구는 한강변 특성상 부군당(部君堂) 문화가 발달했다. 영등포동 7가 상산전, 당산동 6가 부군당, 신길동 방학고지부군당이 그것이다. 사사지 6필지 중 일부가 이 부군당 관련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민간 신앙 관련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지소(池沼) 3필지 6,700㎡는 연못 또는 습지다. 이 규모의 연못이 1912년에 기록됐다는 것은 이 습지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성됐거나 오랜 농업용 수리시설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 연못 주변은 혐기성 환경이 형성되어 유기물 보존 가능성이 특히 높다. 발굴 시 목제 유물, 씨앗, 꽃가루 화분(花粉) 분석을 통해 당시 식생과 기후를 복원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될 수 있다.

3
성씨 분포로 읽는 1912년 영등포 사회
토지조사사업 기록에서 가장 생생한 부분은 성씨 분포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1912년 영등포 땅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다.
이씨704필지최다 소유
김씨537필지2위
정씨226필지3위
한씨155필지4위
박씨116필지5위
조씨115필지6위
최씨113필지7위
이씨 704필지, 김씨 537필지. 이 두 성씨만으로도 1위와 2위를 차지하며 영등포 토지의 큰 부분을 점유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영등포 일대에 이씨와 김씨 씨족 마을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집성촌은 같은 성씨끼리 수백 년에 걸쳐 같은 지역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마을의 흔적은 반드시 고고학적 유적으로 남는다.
둘째, 이 성씨들이 소유한 분묘지와 사사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가 된다. 이씨 집안의 704필지 가운데 분묘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집안의 묘역이 곧 조사 대상이다. 그 묘역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부장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한씨 155필지가 4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영등포 일대에 한씨 집성촌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집성촌이 확인되면 그 주거지 일대의 지표조사에서 수백 년에 걸친 생활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 씨족 마을의 고고학적 잠재력은 단독 주거지보다 훨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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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유자 구조 — 조선인·일본인·국유지의 역학
1912년 영등포의 토지 소유 구조를 소유자별로 분류하면 당시 식민지 경제 구조의 단면이 드러난다.
조선인(성씨)
약 2,986필지 (81.3%)
81.3%
국유지
370필지 (10.1%)
10.1%
일본인
298필지 (8.1%)
8.1%
마을 공유
10필지
법인
8필지
공유지
1필지
미국인
1필지
1912년 당시 일본인 소유 필지는 298필지로 전체의 8.1%다. 아직 조선인 소유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이 수치는 이후 급격히 변해간다. 철도 부설과 공업화 과정에서 일본 자본이 영등포의 토지를 빠르게 잠식했고, 1930년대에는 방직, 제분, 맥주 공장들이 조선인들의 밭을 집어삼켰다. 1912년의 298필지는 그 폭풍이 시작되기 직전의 고요한 풍경이다.
미국인 소유 1필지라는 수치도 흥미롭다. 1912년 영등포에 미국인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나 상인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이 단 1필지가 영등포의 근대 역사와 국제적 연결망을 추적하는 실마리가 된다.
마을 공유지 10필지의 고고학적 의미
마을 소유 토지 10필지는 공동 우물, 마을 제당, 씨족 회의 공간 등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등포구의 부군당 문화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으며, 민간 신앙 관련 유구가 발굴될 수 있는 대상지다.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 문화의 실물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5
영등포의 7,000년 역사 — 왜 이 땅이 특별한가
영등포구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약 7,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한강과 안양천, 도림천, 대방천이 합류하는 이 지점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생존 환경이었다. 풍부한 어자원, 비옥한 충적토, 수운을 이용한 교역 가능성. 이 모든 조건이 이곳에 집결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50여 소국 중 하나의 영역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땅을 차지했다. 한강 유역의 패권이 바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결정됐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시대에는 한강 나루터 마을로 성장했다. 영등포라는 지명 자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정조 13년(1789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한강변의 중요한 취락이었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지역의 땅 아래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한강변 충적지라는 지형적 특성은 혐기성 환경을 만들어 유기물을 장기 보존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1912년 기록의 논 617필지 구역은 오래전부터 물이 고이던 저습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지점에서는 목기, 씨앗, 직물 등 일반 발굴에서 보기 드문 유기물 유물이 출토되는 사례가 있다.
6
철도용지 222,473㎡ — 근대화가 영등포를 삼킨 방식
1912년 토지조사부에서 가장 강렬한 역사적 충격을 주는 데이터는 철도용지다. 고작 2필지인데 면적이 222,473㎡다. 대지 443필지(483,218㎡)와 맞먹는 면적이 단 2필지의 철도 부지에 집중되어 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1900년 한강 철교가 완공됐다. 영등포역이 생기면서 이 조용한 농촌 마을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차가 지나가는 길은 수천 년간 사람들이 밭으로 일구던 땅을 가로질렀다. 그 흔적이 바로 2필지 222,473㎡라는 숫자 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철도가 지나가면서 기존의 마을 구조, 경작지 패턴, 분묘 배치가 파괴됐을 가능성이 크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이전된 분묘가 있었을 것이고, 끊겨버린 농로와 수리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이 파괴의 흔적 역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확인해야 할 중요한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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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가 영등포에 필요한 이유
7,000년의 역사, 3,671필지의 토지, 13필지의 분묘지, 6필지의 사사지, 3필지의 연못. 이 숫자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영등포구는 서울에서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 중 하나다.
특히 세 가지 지역이 집중 조사 대상이 된다. 첫째, 논 617필지 분포 지역. 한강변 충적 저지대의 논은 수천 년간 물이 고이던 환경이어서 유기물 보존 가능성이 높다. 둘째, 분묘지 13필지 인근. 분묘지 주변에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묘제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셋째, 사사지 6필지 위치. 사찰 부지는 폐사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불교 유물 출토 가능성이 있다.
조사 단계 | 영등포 주요 적용 지점 | 기대 성과 |
문화재 지표조사 | 분묘지·사사지 현장 위치 확인, 한강변 저습지 분포 파악, 씨족 집성촌 추정 구역 답사 | 조사 우선 구역 선정 |
시굴조사 | 논 지역 트렌치로 문화층 깊이 확인, 대지 건물지 유무 확인, 분묘지 경계 트렌치 | 유구 분포 확인 |
표본조사 | 철도 부설 이전 마을 구조 복원, 부군당·사사지 유구 선택 발굴 | 유적 성격 파악 |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기록·보고서·국가유산청 보고·보존 결정 | 역사 복원 완성 |
8
한강변 발굴 성공 사례 — 이미 역사는 증명됐다
영등포와 인접한 한강변 지역의 발굴 사례들은 이 일대의 고고학적 잠재력을 입증하고 있다.
성공 사례 01
풍납토성 발굴 — 한강 충적지에서 드러난 백제 왕성
영등포 맞은편 한강 이북 풍납동 재건축 부지에서 백제 왕성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유적이 발굴됐다. 한강변 충적지가 얼마나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영등포 역시 같은 한강 충적지 위에 있으며, 동일 시기의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을 이 발굴이 시사한다.
성공 사례 02
구로동 발굴 사례 — 도심 재개발과 조선 생활 유구의 공존
영등포 인접 구로구 구로동의 재개발 현장에서 조선 시대 생활 유구와 분묘가 확인됐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과 현장 답사를 결합해 조사 우선 구역을 선정했고,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확인된 후 표본조사를 통해 유적 범위가 파악됐다. 발굴된 유물은 지역 문화유산 전시에 활용되고 있다.
성공 사례 03
한강 수변 저습지 조사 — 7,000년의 시간이 쏟아지다
한강 유역 수변 저습지 조사에서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동물뼈, 식물 씨앗이 함께 출토된 사례들이 보고됐다. 혐기성 환경이 수천 년간 유기물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영등포의 논 617필지 구역 중 한강 인접 저습지 지역에서 동일한 조건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신석기 유적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영등포 17,374,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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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 분석부터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까지. 서울 25개 구 매장문화재 조사 전문 기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9
기억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 마지막 이야기
1912년 토지조사부는 영등포의 이씨, 김씨, 정씨, 한씨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이씨 704필지, 김씨 537필지, 정씨 226필지, 한씨 155필지. 그 숫자들 뒤에는 새벽에 일어나 논에 물을 대고, 가을에 벼를 베고,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절을 올리던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다.
그 일상은 기차가 왔을 때, 공장이 들어섰을 때, 아파트가 세워졌을 때 하나씩 지워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분묘지 13필지의 흙 속에, 사사지 6필지의 돌 아래에, 논 617필지의 젖은 토층 안에, 지소 3필지의 부드러운 진흙 속에 여전히 있다.
이씨 704필지, 김씨 537필지.
그 이름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한강이 쌓아올린 땅 위에서
수백 년을 살고 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땅 속에 있다.
삽 하나가 그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 영등포 3,671필지의 기억을 위해
7,000년의 시간이 쌓인 땅. 지금도 영등포 어딘가에서는 굴착기가 흙을 파고, 그 아래에서 누군가의 조상이 남긴 흔적이 햇빛을 처음으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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