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 1912년 토지조사 · 문화재 기초조사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 1912년 토지조사 · 문화재 기초조사
楊坪洞 — 양화진 나루 건너편의 땅
국유지 74필지,374,213㎡의 비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으로 읽는 양평동.밭 52필지, 잡종지 6필지, 대지 16필지.한강이 기른 이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요.
버드나무 꽃 피던 양화진 나루 바로 건너편.조선 시대부터 한강 물이 키운 그 밭이,1912년에 국유지로 기록되었습니다.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은 공장과 아파트가 빼곡한 도심입니다. 하지만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전체 국유지 74필지 가운데 무려 52필지, 면적으로는 204,602㎡가 밭이었습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 공장 부지가 100년 전에는 광활한 국유 농경지였다는 뜻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잡종지입니다. 겨우 6필지인데 면적이 144,370㎡에 달합니다. 전체 국유지의 38.6%를 단 6필지가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복합 토지인 만큼, 이 6필지 안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가 이번 기초조사의 핵심 질문입니다.
양평동은 조선시대 내내 경기도 시흥현 상북면에 속했던 땅이었습니다. 양화진 나루와 한강을 바라보는 저지대 평야였고, 고려 시대부터 한강 수운의 중심지 양화진을 배후에서 지탱하던 농경 지대였습니다. 이 땅의 국유지 74필지가 매장문화재 관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부터 데이터와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74
국유지총 필지 수
374,213
국유지총 면적 (㎡)
52
밭 필지 수(전체의 70.3%)
144,370
잡종지 면적 (㎡)6필지에 38.6%
지목별 면적 구성 (국유지 374,213㎡ 기준)
밭 (52필지)54.7% · 204,602㎡
잡종지 (6필지)38.6% · 144,370㎡
대지 (16필지)6.7% · 25,239㎡
지목 | 필지 수 | 면적 (㎡)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주요 성격 |
밭 (田) | 52 | 204,602 | 70.3% | 54.7% | 한강 저지대 국유 농경지. 역둔토 계열 추정. |
잡종지 (雜種地) | 6 | 144,370 | 8.1% | 38.6% | 필지당 평균 24,062㎡. 대형 국유 복합 부지. 시설 유구 가능성 높음. |
대지 (垈地) | 16 | 25,239 | 21.6% | 6.7% | 관아·창고·역원 시설 관련 가능성. 건물 기초 유구 주목. |
합계 | 74 | 374,213 | 100% | 100% | 전체 국유지 |
목 차 · TABLE OF CONTENTS
01양평동(楊坪洞)의 뿌리 — 양화진 나루와 한강 저지대의 역사
021912년 토지조사부로 읽는 양평동 국유지 구조
03밭 52필지의 의미 — 조선 역둔토와 농경 유구의 가능성
04잡종지 6필지, 면적 38.6%의 수수께끼 — 무엇이 있었을까
05대지 16필지 — 관아·창고·역원 건물 기초 유구 분석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연계 방안
07유사 지역 발굴 성공 사례 — 한강 저지대 국유지의 증언
08양평동의 땅이 우리에게 묻는 것 — 기억과 발굴의 의무
01
양평동(楊坪洞)의 뿌리 — 양화진 나루와 한강 저지대의 역사
양평동이라는 이름은 양화진(楊花津)에서 왔습니다. '버드나무 꽃 피는 나루'라는 뜻의 양화진에서 '양(楊)' 자를,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에서 '평(坪)' 자를 따온 것입니다. 지금의 양평대교 일대,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양화진은 조선시대 한강의 5대 나루 중 하나였습니다. 광나루, 삼밭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서울 도성과 외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진대(鎭臺)가 설치되어 어영청 관할의 별장이 주둔했고, 경제적으로는 삼남 지방에서 한강 수운을 통해 올라오는 곡식을 분배하는 오강주의 하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가 이 양화진을 거슬러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양평동은 바로 이 양화진 나루 맞은편, 한강 남쪽 강변에 펼쳐진 저지대 평야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현 상북면에 속했고, 지형적으로 한강 범람원이자 농경지대였습니다. 한강의 자연 제방을 따라 버드나무가 늘어선 이 땅은 수백 년 동안 한강 수운을 지탱하는 배후지로서 기능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이 1912년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전체 국유지 74필지 중 70%가 넘는 52필지가 밭이라는 사실은, 이 땅이 조선 시대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농경 지역이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밭의 지하에는 수백 년 농경 문화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려시대
양화진, 한강 3대 나루 중 하나로 이미 중요한 교통·경제 거점으로 기능. 양평동 일대는 나루를 지탱하는 배후 농경지.
조선 초기
양화진에 군사 진대 설치, 어영청 관할. 경기도 시흥현 상북면으로 편제된 양평동 일대는 국유 전답 관리.
1866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 3척이 양화진을 거슬러 서강까지 진입. 군사 요충지로서의 양화진 역할 재확인.
1908
역둔토관리규정 반포. 양평동 일대 국유 전답이 조선총독부 재무국 관할 역둔토로 편입 시작.
1912
토지조사사업.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374,213㎡ 공식 등록. 밭 52필지·잡종지 6필지·대지 16필지로 분류.
1936
영등포읍 전역 경성부 편입. 양평동 일대 공업지대 형성 가속. 당산동·문래동과 함께 경인공업지대 핵심 지역화.

02
1912년 토지조사부로 읽는 양평동 국유지 구조
1912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은 단순한 세금 부과용 측량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 전체의 토지 소유권을 새롭게 편제하는 식민지 통치의 핵심 작업이었고, 동시에 지금 우리가 문화재 발굴 기초조사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한 1차 사료이기도 합니다.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374,213㎡의 구성을 보면, 이 지역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필지 수로는 밭이 52필지로 압도적인 70.3%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면적으로는 잡종지 6필지가 144,370㎡로 38.6%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잡종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24,062㎡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미개발지나 방치된 땅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 시설이나 대형 부지로 활용되었던 토지였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역사적 맥락과 결합하면 이 구조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1908년 역둔토관리규정 공포 이후, 한반도의 국유 전답은 역토(역원 소속 토지)와 둔토(군사·관아 소속 토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양평동의 밭 52필지는 역토 계열의 국유 농경지일 가능성이 높고, 잡종지 6필지는 과거 군사 시설이나 창고, 혹은 나루터 관련 복합 시설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둔토(驛屯土)는 1908년부터 역토·둔토와 함께 궁내부 소속 부동산 및 국유전답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1912년 3월 이후부터는 조선총독부 재무국 세무과가 관장하게 되어 해방 때까지 세무과의 고유업무로 자리잡았다.—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기록물 해제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역시 이 역둔토 체계 아래 관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재 기초조사의 관점에서 이 토지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역둔토로 분류된 국유지는 조선 시대부터 특정 국가 기능이 부여된 땅이었고, 그 기능을 수행하던 건물·시설·생활 공간의 유구가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일반 민간 토지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74필지 374,213㎡ 전체가 매장문화재 관점에서 1차 주목 지역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03
밭 52필지의 의미 — 조선 역둔토와 농경 유구의 가능성
52필지, 204,602㎡. 양평동 국유지에서 밭이 차지하는 규모입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3,935㎡, 약 1,190평에 해당합니다. 조선시대 역둔토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안정적인 규모의 경작지들입니다.
이 밭들이 왜 국유지였을까요. 조선시대 역둔토 가운데 밭은 주로 두 가지 경로로 형성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역토(驛土), 즉 역원(驛院) 운영 재원으로 배정된 토지입니다. 조선시대 역원은 관리들이 여행 중 숙박하고 말을 교환하던 시설로, 그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주변 토지를 역원에 귀속시켰습니다. 두 번째는 둔토(屯土), 즉 군영 또는 지방 관아의 운영 재원을 위한 국유 농경지입니다.
양화진 일대는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이 52필지의 밭 중 상당 부분은 어영청 관할 군사 시설의 배후 둔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강 저지대의 밭은 홍수 때마다 토사가 퇴적되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여러 시대의 생활면이 층위별로 형성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의 한강 문화층이 이 밭의 지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강 저지대의 충적층 지역에서는 지표조사만으로는 매장 유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시굴조사를 통해 토층을 확인한 후 문화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평동 밭 52필지의 경우, 한강 범람원 특성상 복수의 문화층이 수직으로 퇴적된 구조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표본조사 단계에서의 정밀 토층 분석이 권고됩니다.

04
잡종지 6필지, 면적 38.6%의 수수께끼 — 무엇이 있었을까
이번 기초조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데이터는 잡종지입니다. 단 6필지인데 144,370㎡. 전체 국유지 면적의 38.6%를 차지합니다. 한 필지당 평균 면적이 24,062㎡, 약 7,279평에 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방치된 땅이 아닙니다.
1912년 토지조사에서 잡종지(雜種地)는 특정한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토지를 통칭했습니다. 그 범주에는 나루터 부지, 창고 부지, 군사 훈련장, 공동 작업장, 수로 관련 시설지 등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양평동의 경우, 양화진 나루와 인접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이 6필지의 잡종지는 다음 세 가지 가능성을 중심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첫째, 나루터 관련 복합 부지입니다. 조선시대 양화진은 나루터뿐 아니라 선박 정박지, 창고, 관리 시설, 군사 진대가 복합적으로 배치된 공간이었습니다. 양화진 건너편 양평동 쪽에도 이를 지원하는 시설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군사 시설 관련 부지입니다. 병인양요(1866년) 이전까지 양화진 일대는 지속적으로 군사 시설이 정비된 지역입니다. 훈련장이나 무기 창고, 군마 방목지 등의 흔적이 잡종지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셋째, 근대 초기 산업·공공 시설 부지입니다. 1900년대 초 영등포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대형 공장 부지나 수리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조선 후기의 유구들이 부분적으로 교란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잡종지 6필지(144,370㎡)의 경우, 대규모 시설 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높으므로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고문헌·고지도 분석을 병행한 정밀 사전 조사가 권고됩니다. 특히 조선후기 양화진 관련 군사 시설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 원본의 교차 검토가 필요합니다.

05
대지 16필지 — 관아·창고·역원 건물 기초 유구 분석
대지 16필지, 25,239㎡. 필지 수로는 전체의 21.6%이지만 면적으로는 6.7%에 불과합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1,577㎡, 약 477평입니다. 이 규모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나 역원 시설의 부지와 비교적 잘 맞아떨어집니다.
대지(垈地)는 실제 건물이 건립된 토지입니다. 1912년 당시 이 16필지 위에 무언가 건물이 서 있었거나, 최근까지 건물이 있다가 철거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국유 대지라는 점에서 사설 건물이 아닌 공적 시설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 역원, 관아, 창고, 군사 시설, 또는 개항 이후 근대 공공 건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대지는 특히 주목해야 할 지목입니다. 건물 기초부(基礎部)의 유구, 즉 초석(礎石), 적심(積心), 기단(基壇) 등의 건축 유구가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다른 지목에 비해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건물 내부와 주변의 생활 유구, 즉 우물, 배수로, 저장 구덩이, 소각재층 등도 함께 발견될 수 있습니다. 16필지의 위치 분포에 따라 단일 시설 군집인지, 분산된 개별 시설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입니다.
06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연계 방안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374,213㎡에 대한 체계적인 문화재 조사는 4단계 순차 접근이 필요합니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결과를 기반으로 조사 범위와 방법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1단계 지표조사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지표면의 유물 분포와 지형을 파악하는 기초 단계입니다. 양평동의 경우, 현재 도심 개발로 인해 지표면이 크게 교란된 상태이므로 고문헌·고지도 분석과 항공 사진 분석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특히 1912년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의 중첩 분석을 통해 74필지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2단계 시굴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유물 가능성이 확인된 구역에 트렌치(Trench)를 설치하여 지하 토층을 직접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한강 저지대라는 지형 특성상 복수의 문화층이 수직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시굴 트렌치의 깊이 설정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잡종지 6필지는 면적이 크므로, 각 필지 내에 적어도 2개 이상의 트렌치를 배치하는 것이 권고됩니다.
3단계 표본조사는 시굴 결과 문화층이 확인된 구역에서 면적 조사를 실시하는 단계입니다. 건물 유구, 생활면, 폐기층 등의 성격과 범위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본발굴조사의 범위를 결정합니다. 4단계 본발굴조사에서는 표본조사로 확인된 유구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합니다.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본발굴조사의 단계별 절차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체계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각 단계에서 국가유산청의 허가 및 검토를 받아 진행합니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위 법령에 따른 전문 발굴 조사 기관으로서 각 단계 조사를 수행합니다.

07
유사 지역 발굴 성공 사례 — 한강 저지대 국유지의 증언
성공 사례 01 · 서울 동작구 동작나루 일대
한강 저지대 국유지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나루터 유구
동작구 동작나루 인접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나루터 관련 석축 유구와 생활 도기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 역시 1912년 토지조사부에서 국유 잡종지와 밭으로 기록된 곳이었습니다. 지적원도와 고지도 분석을 통해 나루터 시설의 위치를 사전에 예측한 덕분에 조사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양평동 잡종지 6필지 역시 양화진 나루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유사한 접근이 가능합니다.
성공 사례 02 ·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
공업화 이전 층위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농경 유구
영등포구 문래동의 재개발 사업 구역 문화재 조사에서, 20세기 공장 기초층 아래에 조선시대 경작층과 생활 유구가 온전히 보존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공업화가 역설적으로 그 아래의 역사 층위를 교란 없이 봉인한 경우입니다. 양평동 역시 1930~40년대 이후 급격한 공업화가 진행된 지역이라는 점에서, 공장 기초층 아래에 조선시대 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성공 사례 03 ·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일대
국유 대지에서 발굴된 근대 순교 관련 유구와 조선 군사 시설 흔적
양화진 성지가 위치한 합정동 일대에서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는 19세기 병인박해 관련 유구와 함께 조선 초기 군사 진대 관련 석축 유구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양화진 나루 건너편인 양평동 역시 같은 역사적 맥락 위에 있습니다. 특히 양평동 대지 16필지는 과거 나루 관련 시설 또는 군사 시설의 부지였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세 사례 모두 공통적으로 1912년 토지조사부의 지목 분류가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단서로 활용되었습니다. 잡종지와 국유 대지가 표시된 필지에서 주요 유구가 발견된 비율이 현저히 높았습니다.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역시 이 원칙 위에서 우선 조사 구역을 선정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08
양평동의 땅이 우리에게 묻는 것 — 기억과 발굴의 의무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양평동 국유지 74필지는 단순한 행정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이 수백 년 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관리해 온 땅의 목록입니다. 밭 52필지는 관군을 먹이고 역원을 유지하던 농경의 흔적이고, 잡종지 6필지는 나루와 군사 시설이 숨 쉬던 복합 공간의 기억이며, 대지 16필지는 어떤 건물이 서 있었는지를 아직 말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터입니다.
지금의 양평동은 아파트와 공장과 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양화진 나루가 있던 자리에는 양화대교가 놓였고, 버드나무가 늘어섰던 강변은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 도로 아래에, 그 공장 기초 아래에, 그 아파트 주차장 아래에 역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흙은 기억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깨우는 첫 번째 노크입니다. 시굴조사는 문을 두드려보는 것이고, 표본조사는 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이며, 본발굴조사는 그 방 전체에 불을 켜는 것입니다.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374,213㎡가 그 노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을 핵심 데이터로 활용하여, 서울 각 지역의 국유지·역둔토·궁방전 필지를 대상으로 매장문화재 기초조사를 수행합니다. 양평동 국유지 74필지 374,213㎡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본발굴조사 의뢰는 seoulheritage.org를 통해 접수하실 수 있습니다.
양화진의 버드나무는 사라졌지만, 그 나루를 건너던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 흔적을 찾기 위해 땅에 붓을 대는 순간,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양평동의 밭 52필지에는 씨앗이 뿌려졌던 기억이 있고, 잡종지 6필지에는 배가 묶였던 기억이 있으며, 대지 16필지에는 문이 달린 건물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을 꺼내는 일, 그것이 문화재 발굴이고, 그것이 역사를 살아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양평동 국유지 74필지,문화재 발굴 조사를 시작하세요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본발굴조사.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912년 토지조사 데이터를 기반으로매장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합니다.
버드나무 꽃 피던 양화진 나루가 사라진 자리에이제는 다리가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루를 건너던 사람들이 살던 땅은아직 그 자리에 있습니다.
74필지의 흙이 기다립니다.누군가 조심스럽게 붓을 대어 줄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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