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왕실 누에방 동잠실, 집터 70곳과 뽕밭 같은 밭 30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송파구 편
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왕실 누에방 동잠실, 집터 70곳과 뽕밭 같은 밭 30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0필지잠실동 국유지 전체
51,623㎡국유지 총면적 (약 1만 5,616평)
73.7%면적 중 대지 비율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는 국유지 100필지, 총 51,623㎡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지는 70필지 38,036㎡, 밭은 30필지 13,586㎡였습니다.
잠실동 국유지는 면적의 약 74%가 집터인 대지, 약 26%가 밭으로, 논과 임야 없이 두 가지 지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롯데월드에서 줄 서던 그 자리.600년 전엔 궁궐 여인들이 누에를 치던 곳이었습니다.
농담 같죠.
야구장 함성이 울리고, 아파트 불빛이 밤새 꺼지지 않는 그 잠실이요.
그런데 이름부터가 증거입니다.
잠실(蠶室), 말 그대로 '누에 방'이거든요.
그리고 1912년 토지 장부를 펼치면, 더 묘한 숫자가 나옵니다.
나라 땅이 정확히 100필지.
그중 70필지는 집터, 30필지는 밭이었습니다.
딱 떨어지는 숫자라서 오히려 더 궁금해집니다.
강 한가운데 섬마을에 왜 이렇게 많은 나라 땅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지금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끝까지 읽고 나면, 잠실역 출구를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 달라지실 겁니다.
목차
1912년 잠실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잠실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잠실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숫자로 보는 잠실동 국유지 통계표
잠실동 역사, 세종이 세운 누에방 동잠실
섬이 된 마을, 잠실도와 송파강 이야기
집터 7, 밭 3의 비율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송파구의 성공 사례, 땅을 먼저 읽었더니 백제가 나왔다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매장유산 조사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요?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자주 묻는 질문

011912년 잠실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바로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는 국유지가 100필지, 면적으로는 51,623㎡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만 5,616평이에요.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를 약 7,140㎡로 잡으면, 대략 일곱 개 정도가 들어가는 넓이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516㎡, 156평 남짓이에요.
이 숫자, 생각보다 의미가 큽니다.
바로 옆 동네 신천동 국유지는 한 필지 평균이 약 355㎡였거든요.
같은 섬, 같은 강물 위에 있던 마을인데 잠실 쪽 땅 조각이 한결 넉넉했던 겁니다.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땅이 아니라, 마당과 텃밭, 나무 몇 그루까지 품을 수 있는 크기였다는 이야기죠.
이 넉넉함이 잠실동 기록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02잠실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잠실동 국유지 중 대지는 70필지, 38,036㎡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70.0%, 전체 면적의 73.7%가 대지예요.
평으로는 약 1만 1,506평입니다.
대지는 쉽게 말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 곧 집터를 말합니다.
나라 땅 열 필지 중 일곱 필지 위에 사람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대지 한 필지 평균은 약 543㎡, 164평 정도입니다.
요즘 아파트 한 동이 앉는 땅보다는 작지만, 초가 한 채가 쓰기에는 꽤 여유로운 크기죠.
안채와 헛간, 장독대, 그리고 어쩌면 누에를 치던 작은 방 하나까지.
그런 집 70채가 강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을 풍경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장부 속 숫자 70은 결국 일흔 가족의 아침과 저녁이었던 셈입니다.

03잠실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잠실동 국유지 중 밭은 30필지, 13,586㎡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30.0%, 면적으로는 26.3%를 차지해요.
평으로 하면 약 4,110평입니다.
밭 한 필지 평균은 약 453㎡, 137평 정도예요.
대지 면적이 밭의 약 2.8배이니, 집터가 중심이고 밭이 그 곁을 감싸는 구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비교가 하나 있어요.
신천동 국유지에서는 밭이 고작 7필지, 면적의 4.7%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실동은 밭 비율이 다섯 배 넘게 높습니다.
같은 섬 안에서도 잠실 쪽은 경작이 훨씬 활발했다는 신호죠.
이 밭에서 무엇을 길렀는지는 장부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이 조선 시대 뽕나무를 심던 동잠실 자리였다는 기록을 떠올리면, 상상은 자연스럽게 뽕밭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역사적 맥락에서 그려보는 가능성이라는 점, 꼭 기억해 주세요.
04숫자로 보는 잠실동 국유지 통계표
이제 한눈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래 표는 입력 자료를 바탕으로 비율과 평균 면적, 평수를 계산해 만든 잠실동 국유지 통계입니다.
구분 (지목) | 필지 수 | 면적(㎡) | 약 평수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필지당 평균 |
국유지 전체 | 100 | 51,623 | 15,616 | 100% | 100% | 516.2㎡ |
대지 | 70 | 38,036 | 11,506 | 70.0% | 73.7% | 543.4㎡ |
밭 | 30 | 13,586 | 4,110 | 30.0% | 26.3% | 452.9㎡ |
표 설명: 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 100필지 51,623㎡이며, 대지 70필지 38,036㎡, 밭 30필지 13,586㎡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12년 당시 잠실은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마을로,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대지 38,036㎡ · 70필지73.7%
밭 13,586㎡ · 30필지26.3%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 100필지 51,623㎡였고, 그중 대지가 70필지 38,036㎡, 밭이 30필지 13,586㎡로 면적의 약 4분의 3이 집터였습니다.
05잠실동 역사, 세종이 세운 누에방 동잠실
잠실이라는 이름의 진짜 뜻
잠실은 누에를 기르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송파구청의 동명 유래에 따르면, 조선 세종 때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려고 도성 서쪽 연희동 일대의 서잠실과 함께 동쪽에 세운 곳이 바로 이 동잠실이에요.
서울 한강 남쪽에는 원래 잠실리가 두 군데 있었다고 해요.
반포 옆의 잠실리는 훗날 잠원동이 되었고, 석촌호수 부근의 잠실리가 지금의 잠실동으로 이름을 지켰습니다.
궁궐 내시가 실적을 점검하던 곳
이곳에서는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주변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고 전합니다.
누에를 돌보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었어요.
그래서 감독은 궁궐의 내시가 맡아, 누에고치 생산 실적을 꼼꼼히 확인했다고 합니다.
뽑아낸 실은 승정원에 바쳤고, 솜씨와 양에 따라 상을 받기도, 벌을 받기도 했다고 하니 꽤 치열한 일터였던 셈이죠.
상상해 보세요.
한강 물안개 사이로 뽕잎 향이 번지고, 누에가 잎을 갉는 사각사각 소리가 방 안을 채우던 풍경을요.
지금 잠실이 '상전벽해'라는 말의 대명사가 된 것도, 사실 뽕밭(桑田)에서 시작된 이름이기에 더 절묘합니다.

06섬이 된 마을, 잠실도와 송파강 이야기
원래는 강북 땅이었다
조금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의 잠실은 조선 초기만 해도 오늘날 광진구 자양동 쪽과 붙어 있던 땅이었다고 전해요.
그런데 큰 홍수가 나면서 북쪽으로 새 물길이 뚫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새내, 한자로 신천(新川)이라 불렀어요.
그 순간부터 잠실은 강물 사이에 떠 있는 섬, 잠실도가 되었습니다.
섬 안의 세 마을
개발 이전의 잠실도에는 새내, 잠실, 부렴(부리도) 세 마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섬 남쪽으로 흐르던 원래 본류는 송파강이라 불렸고, 지금 석촌호수가 바로 그 흔적이에요.
부리도는 홍수 때 다른 곳이 물에 잠겨도 그쪽만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죠.
옛 부리도 사람들은 지금도 아시아공원 자리의 기념비 앞에서 뽕나무 신께 올리는 상신제를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뽕나무와 누에의 기억이 아파트 숲 한가운데에서 아직 숨 쉬고 있는 거예요.
행정구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한 섬마을 (구청 자료는 양주면으로 표기)
1912토지조사사업으로 필지와 지목이 근대 장부에 기록됨
1914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
1949서울특별시 확장으로 성동구 잠실동
1971한강개발사업으로 신천동과 함께 한강 남쪽에 연육
1975강남구 신설로 강남구 소속
1979강동구 신설로 강동구 소속
1988송파구 분리 신설로 송파구 잠실동
즉, 1912년 기록 속 잠실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주 땅이었습니다.
또 현재 잠실동의 일부, 특히 잠실3동 일대는 1963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서 편입된 지역이라는 점도 함께 알아두시면 좋아요.
이 글은 찾기 쉽도록 현재 행정구역 이름인 송파구 잠실동으로 정리했습니다.

07집터 7, 밭 3의 비율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보통 국유지라고 하면 산이나 하천, 길을 먼저 떠올리시잖아요.
그런데 잠실동 국유지에는 임야도, 논도 한 필지 없습니다.
오직 집터와 밭뿐이에요.
이 기록만으로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짚어볼 수는 있습니다.
첫째, 국가 양잠 시설의 기억입니다.
동잠실처럼 국가가 직접 운영하던 시설과 그 주변 땅은 오랫동안 관(官)과 인연이 깊었을 거예요.
그런 땅의 집터와 밭이 근대 장부에서 국유지로 정리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강이 만든 땅이라는 점입니다.
홍수 때마다 모래가 쌓이고 깎이던 하중도는 소유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이런 땅은 조사 과정에서 국유로 편입되기 쉬웠을 겁니다.
셋째, 신고 절차의 벽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정해진 기간에 신고해야 소유를 인정받는 구조였어요.
섬마을 주민들이 그 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대대로 살던 터가 서류상 나라 땅으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신천동이 거의 집터만 남긴 '주거형' 국유지였다면, 잠실동은 집터와 밭이 7대 3으로 어우러진 '생활·경작형' 국유지였다고 말할 수 있겠죠.
08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1912년 토지 기록은 조선총독부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벌인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물입니다.
전국의 땅을 한 필지씩 측량해서 지목과 면적, 소유자를 장부에 적었어요.
지목은 땅의 쓰임새를 말합니다.
대지, 밭, 논, 임야, 분묘지, 잡종지 같은 구분이 이때 체계적으로 정리됐죠.
이 사업은 식민지 수탈의 기반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동시에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지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지금은 사라진 옛 땅의 모습을 되살리는 귀한 자료가 되었어요.
아픈 시대가 남긴 장부가, 오늘은 땅속 문화유산을 지키는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09송파구의 성공 사례, 땅을 먼저 읽었더니 백제가 나왔다
송파구는 서울에서 땅 밑 시간이 가장 두꺼운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몽촌토성, 올림픽공원 아래의 백제
1980년대 올림픽공원 조성을 앞두고 몽촌토성 일대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백제 한성기의 성벽과 집자리, 저장 구덩이 같은 생활 흔적이 확인됐어요.
덕분에 지금 우리는 잠실 바로 곁 올림픽공원에서 백제의 성벽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죠.
석촌동 고분군, 석촌호수 남쪽의 왕릉 지대
잠실동과 맞닿은 석촌동에는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이 모인 석촌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이어진 재발굴 조사에서는 여러 무덤이 서로 이어 붙은 대형 연접식 돌무지무덤 구조가 드러나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어요.
도심 한복판 공원 아래에서 백제 왕실의 묘역이 새롭게 읽힌 겁니다.
두 사례가 주는 교훈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과거를 충분히 읽었기 때문에, 유적을 지키면서 조사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잠실동은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한강 생활권 안에 있습니다.
누에방 마을의 집터 70곳 기록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0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집터는 유적 가능성이 높은 자리입니다
매장유산 조사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이 땅에 예전부터 사람이 살았는가.
잠실동 국유지 기록은 이 질문에 숫자로 답해요.
100필지 중 70필지가 대지였다는 건, 이 일대에 오래된 생활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집터 아래에는 구들, 아궁이, 우물, 생활 토기 같은 흔적이 남기 쉽고, 그 아래로 더 오래된 시대의 층이 겹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밭은 또 다른 단서를 줍니다
밭 30필지도 놓치면 안 되는 정보예요.
오래 경작된 땅에는 경작층과 함께 유물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표조사 때 유물 산포 여부를 살피는 중요한 구역이 되죠.
매립 이전 원지형을 되살리는 기준점
잠실은 1970년대 매립과 대규모 개발로 지형이 완전히 달라진 곳입니다.
지금 땅 위만 봐서는 옛 섬의 경계도, 마을의 위치도 알기 어려워요.
이럴 때 1912년 필지 기록과 지적 원도는 원래 땅을 복원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어디가 집터였고, 어디가 밭이었고, 어디가 물가였는지 알아야 조사 범위를 제대로 그릴 수 있거든요.
이런 기초조사가 탄탄할수록 시굴조사와 발굴조사의 시간과 비용은 줄고, 유산이 훼손될 위험도 함께 줄어듭니다.
11매장유산 조사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요?
개발과 문화유산 보호가 만나는 자리에는 정해진 절차가 있습니다.
근거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입니다.
1단계, 지표조사
사업 예정지 땅 위를 직접 걸으며 유물이 흩어져 있는지 살피고, 문헌과 옛 지도를 검토해 매장유산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는 착공 전에 이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해요.
1912년 토지 기록이 가장 빛나는 단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2단계,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가능성이 보이면, 대상지 일부를 골라 작은 범위로 파 보는 표본조사를 진행합니다.
유적이 실제로 있는지를 빠르게 확인하는 단계예요.
3단계, 시굴조사
시굴조사는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성격, 깊이를 확인하는 조사입니다.
어디까지가 유적인지 정해져야 본격적인 발굴 계획을 세울 수 있죠.
4단계, 발굴조사
마지막으로 유적 전체를 체계적으로 드러내 기록하는 단계가 발굴조사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현지 보존, 이전 보존, 기록 보존 같은 조치가 결정돼요.
문화재 발굴 기관이 수행하는 이 네 단계는 결국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 땅은 예전에 어떤 땅이었는가.
12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필지 수는 대지 70필지와 밭 30필지를 더해 100필지로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은 대지 38,036㎡와 밭 13,586㎡를 더하면 51,622㎡로, 전체 51,623㎡와 1㎡ 차이가 납니다.
이는 당시 평 단위 기록을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생긴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원자료 수치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평수는 1평을 3.3058㎡로 계산했고, 비율은 소수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잠실동은 국유지가 정확히 100필지로, 필지 비율이 대지 70%, 밭 30%로 딱 떨어지는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같은 잠실도의 이웃 마을 신천동(116필지, 대지 면적 95.3%)과 비교하면, 잠실동은 밭 면적 비율이 26.3%로 다섯 배 이상 높고 필지당 평균 면적도 516㎡로 더 넓습니다.
두 동 모두 논과 임야 없이 대지와 밭 두 지목만 나타나, 강 위 섬마을이라는 지형적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주군으로, 현재 서울 행정구역과 다르다는 점을 함께 기록해 둡니다.
13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00필지, 면적은 51,623㎡(약 1만 5,616평)였습니다.
Q. 1912년 잠실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70필지, 38,036㎡로 전체 면적의 약 73.7%였습니다.
Q. 1912년 잠실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30필지, 13,586㎡로 전체 면적의 약 26.3%였습니다.
Q. 잠실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잠실은 누에를 기르는 방이라는 뜻으로, 조선 세종 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설치한 동잠실에서 유래했습니다.
Q. 1912년 잠실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A. 당시 잠실은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한강 섬마을이었으며, 1914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 1949년 서울 성동구를 거쳐 1988년부터 송파구 잠실동이 되었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A. 옛 집터와 밭의 위치를 알려주어 매장유산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찾는 근거가 되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범위를 정하는 데 쓰입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 국유지는 100필지 51,623㎡였으며 대지 70필지 38,036㎡와 밭 30필지 13,586㎡로 구성된, 왕실 누에방 동잠실 마을의 집터와 밭 기록입니다.
잠실역 출구를 나서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들어 타워를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한 번쯤 발밑을 내려다보게 될 거예요.
그 아래에는 새벽마다 뽕잎을 따던 손이 있었습니다.
누에가 잎을 갉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밭을 매고, 해 질 녘 강물을 바라보던 사람들이요.
그들의 이름은 장부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집터 70곳과 밭 30뙈기는 숫자로 남았어요.
누에가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들 듯, 우리는 그 숫자를 한 줄씩 이어 이 땅의 이야기를 다시 짜고 있습니다.
그 실을 끊기지 않게 지키는 일, 그게 바로 문화유산 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업 부지는 옛날에 어떤 땅이었을까요?
1912년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문화유산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기초조사가 궁금하시다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지역별 기록을 확인해 보세요.
자료 기준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1912년 당시 경기도 양주군 잠실)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면적
역사 참고: 송파구청 동명 유래·연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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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잎 향이 강물 위로 번지던 시절
누에가 잎을 갉는 소리로 아침을 열던 마을이 있었다
일흔 개의 마당
서른 뙈기의 밭
섬은 뭍이 되고 뽕밭은 푸른 도시가 되었지만
땅은 아직 그 실 한 올을 놓지 않았다
잠실, 누에의 방
우리가 걷는 이 길 아래에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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