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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모래섬 마을 새내, 나라 땅 위에 앉은 집터 109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14일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송파구 편

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모래섬 마을 새내, 나라 땅 위에 앉은 집터 109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16필지신천동 국유지 전체

41,183㎡국유지 총면적 (약 1만 2천 평)

95.3%면적 중 대지 비율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는 국유지 116필지, 총 41,183㎡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지는 109필지 39,229㎡, 밭은 7필지 1,953㎡였습니다.

신천동 국유지는 면적의 약 95%가 집터인 대지로, 논과 임야 없이 대지와 밭 두 가지 지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잠실역 사거리.110년 전, 그곳은 강물 한가운데 떠 있던 섬이었습니다.

믿기 어렵죠.

롯데월드타워가 하늘을 찌르고, 하루 수십만 명이 오가는 그 땅이요.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습니다.

그 섬마을의 집터 상당수가 '나라 땅' 위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펼치면, 신천동 국유지 116필지 중 무려 109필지가 대지로 적혀 있습니다.

논도 없고, 산도 없습니다.

오직 집터와 작은 밭뿐이었죠.

이건 다른 동네 기록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숫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이 숫자가 오늘날 송파구 땅 아래를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끝까지 읽으시면, 아파트 숲 아래 잠든 작은 섬마을이 선명하게 떠오르실 겁니다.


목차

  1. 1912년 신천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신천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3. 신천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4. 숫자로 보는 신천동 국유지 통계표

  5. 신천동 역사, 강물에 떠 있던 섬마을 새내

  6. 왜 신천동 국유지는 대부분 집터였을까요?

  7.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8. 송파구의 성공 사례, 땅 아래에서 백제가 나왔다

  9. 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0. 매장유산 조사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요?

  11.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12. 자주 묻는 질문


011912년 신천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는 국유지가 116필지, 면적으로는 41,183㎡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만 2,458평입니다.

축구장으로 치면 대략 다섯 개 반 정도 되는 넓이예요.

숫자만 보면 그리 넓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지 수를 보세요.

116필지입니다.

한 필지 평균 넓이가 약 355㎡, 그러니까 107평 남짓입니다.

넓은 들판 한 덩어리가 아니라, 작은 땅 조각이 촘촘히 모여 있었다는 뜻이죠.

이 촘촘함이 바로 신천동 기록의 첫 번째 단서입니다.

작게 쪼개진 땅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사람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거든요.


02신천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신천동 국유지 중 대지는 109필지, 39,229㎡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94.0%, 전체 면적의 95.3%가 대지입니다.

대지는 쉽게 말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 곧 집터입니다.

그러니까 신천동 국유지는 거의 전부가 사람이 살던 자리였던 셈이에요.

대지 한 필지 평균은 약 360㎡, 약 109평입니다.

초가 한 채에 마당, 장독대, 작은 텃밭 정도가 들어가는 크기죠.

이 크기의 집터 109곳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골목이 있고, 담장이 있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있었을 겁니다.

기록 속 숫자 하나하나가 결국 한 가족의 살림터였다는 거죠.



03신천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신천동 국유지 중 밭은 7필지, 1,953㎡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6.0%, 면적으로는 4.7%에 불과합니다.

평으로 하면 약 591평이에요.

밭 한 필지 평균은 약 279㎡, 85평 정도입니다.

대지 한 필지보다도 작습니다.

이건 대규모 경작지라기보다, 집 가까이에 딸린 작은 채소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에요.

대지 면적은 밭의 약 20배입니다.

강 한가운데 모래땅이라 큰 농사가 어려웠던 환경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숫자죠.

섬마을 사람들은 땅을 갈기보다 강에 기대어 살았을 겁니다.

배를 띄우고, 물길을 건너고, 강가 모래밭에서 작물을 조금씩 길렀겠죠.


04숫자로 보는 신천동 국유지 통계표

이제 한눈에 정리해 볼게요.

아래 표는 입력 자료를 바탕으로 비율과 평균 면적을 계산해 만든 신천동 국유지 통계입니다.

구분 (지목)

필지 수

면적(㎡)

약 평수

필지 비율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국유지 전체

116

41,183

12,458

100%

100%

355.0㎡

대지

109

39,229

11,867

94.0%

95.3%

359.9㎡

밭

7

1,953

591

6.0%

4.7%

279.0㎡

표 설명: 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 116필지 41,183㎡이며, 대지 109필지 39,229㎡, 밭 7필지 1,953㎡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12년 당시 신천은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마을로,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대지 39,229㎡95.3%

밭 1,953㎡4.7%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 116필지 41,183㎡였고, 그중 대지가 109필지 39,229㎡, 밭이 7필지 1,953㎡로 면적의 95% 이상이 집터였습니다.


05신천동 역사, 강물에 떠 있던 섬마을 새내

지도에서 사라진 강, 송파강

지금의 잠실과 신천 일대는 원래 한강 위에 떠 있던 하중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섬을 잠실도라고 불렀어요.

섬의 북쪽으로는 지금의 한강 본류가 흘렀고, 남쪽으로는 송파강이라 불린 물줄기가 흘렀습니다.

지금 석촌호수가 바로 그 송파강의 흔적이에요.

1970년대 초 대규모 매립 공사로 송파강이 메워지면서, 섬은 비로소 육지와 이어졌습니다.

세 마을이 살던 섬

개발 이전 잠실도에는 새내, 잠실, 부렴 마을 세 곳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중 새내가 바로 오늘의 신천입니다.

새내라는 이름은 '새로 생긴 내', 곧 새 물길이라는 뜻이에요.

이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 신천(新川)입니다.

홍수가 나면 물길이 바뀌고, 새 물길이 생기면 마을 이름이 되는 곳.

신천은 이름부터가 강의 역사를 품고 있는 동네예요.

행정구역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신천은 서울에 속하기까지 소속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조선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한 섬마을

1912토지조사사업으로 필지와 지목이 처음 근대 장부에 기록됨

1914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소속

1949서울특별시 확장으로 성동구에 편입

1970s송파강 매립, 잠실 일대 대규모 택지 개발

1988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 신설되며 송파구 신천동

그러니까 1912년 기록 속 신천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땅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찾기 쉽도록 현재 행정구역인 송파구 신천동으로 불러 정리했어요.



06왜 신천동 국유지는 대부분 집터였을까요?

여기서 여러분이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볼 지점이 있습니다.

보통 국유지라고 하면 산이나 하천, 길 같은 땅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신천동은 국유지의 95%가 집터입니다.

이 기록만으로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짚어볼 수는 있어요.

첫째, 강물이 만든 땅이라는 점입니다.

홍수 때마다 모래가 쌓이고 깎이던 하중도는 개인 소유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땅은 토지조사 과정에서 국유지로 정리되기 쉬웠을 거예요.

둘째, 조선 시대 국가 시설과 관련된 땅일 가능성입니다.

잠실이라는 이름 자체가 누에를 치던 국가 양잠 시설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죠.

국가와 인연이 깊던 땅이었다면, 그 위에 들어선 집터가 국유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소유를 증명하지 못한 주민들의 집터일 가능성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정해진 기간에 신고해야 소유를 인정받는 방식이었어요.

섬마을 주민들이 그 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대대로 살던 집터가 서류상 나라 땅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든 분명한 건 하나입니다.

1912년 신천동 국유지 109필지 위에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07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조선총독부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벌인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물입니다.

전국의 땅을 한 필지씩 측량하고, 지목과 면적, 소유자를 장부에 적었죠.

지목은 땅의 용도를 말합니다.

대지, 밭, 논, 임야, 분묘지, 잡종지 같은 구분이 이때 정리됐어요.

이 사업은 식민지 수탈의 기반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동시에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지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지금은 땅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귀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아픈 역사가 남긴 기록이 오늘은 땅속 문화유산을 지키는 지도가 되는 셈이죠.


1910년대 강가 토지 측량 장면, 한국인 측량원과 주민, 글자 없음

08송파구의 성공 사례, 땅 아래에서 백제가 나왔다

송파구는 땅 밑의 시간이 유난히 두꺼운 곳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풍납토성이에요.

1990년대 후반, 풍납동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 토기와 유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공사는 멈췄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어졌죠.

그 결과 풍납토성이 백제 한성기 왕성일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아파트 단지 아래에 2천 년 전 왕성이 잠들어 있었던 겁니다.

몽촌토성도 마찬가지예요.

1980년대 올림픽공원 조성을 앞두고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백제 성곽과 생활 유적이 확인됐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올림픽공원을 걸으며 백제의 성벽 위를 산책할 수 있게 되었죠.

두 사례가 말해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과거를 먼저 알았다면, 더 빨리 보호하고 더 정확히 조사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신천동은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같은 한강 생활권 안에 있습니다.

섬마을 새내의 집터 기록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09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옛 집터는 유적의 가능성이 높은 자리입니다

매장유산 조사에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땅에 예전부터 사람이 살았는가.

신천동 국유지 기록은 그 질문에 숫자로 답합니다.

116필지 중 109필지가 대지였다는 건, 이 일대에 오래된 생활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보여줘요.

집터 아래에는 구들, 아궁이, 우물, 생활 토기 같은 흔적이 남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더 오래된 시대의 층이 겹쳐 있을 수도 있죠.

매립 이전의 원지형을 복원하는 단서

신천은 1970년대 매립과 대규모 개발로 지형이 크게 바뀐 곳입니다.

지금 지표만 봐서는 옛 섬의 경계도, 마을의 위치도 알기 어려워요.

이럴 때 1912년 필지 기록과 지적 원도는 원래 땅의 모습을 되짚는 기준점이 됩니다.

어디가 집터였고, 어디가 밭이었고, 어디가 물가였는지를 알아야 조사 범위를 제대로 정할 수 있거든요.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가 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공사 전에 땅 위의 유물 산포와 문헌 기록, 옛 지도를 살펴 매장유산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하는 조사입니다.

1912년 토지 기록은 이 문헌 조사 단계에서 매우 유용한 근거예요.

필지별 지목과 면적이 있으면 유적 분포 가능 구역을 훨씬 정밀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기초조사가 탄탄할수록 시굴조사와 발굴조사의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소중한 유산이 훼손되는 일도 막을 수 있어요.


10매장유산 조사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요?

개발 사업과 문화유산 보호가 만나는 지점에는 정해진 절차가 있습니다.

근거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입니다.

1단계, 지표조사

사업 예정지의 땅 위를 걷고, 문헌과 옛 지도를 살펴 매장유산의 존재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는 착공 전에 지표조사를 거치도록 되어 있어요.

1912년 토지 기록은 바로 이 단계에서 빛을 발합니다.

2단계,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가능성이 확인되면, 대상 지역의 일부를 골라 작은 범위로 파 보는 표본조사를 진행합니다.

유적이 실제로 있는지를 빠르게 확인하는 단계예요.

3단계, 시굴조사

시굴조사는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성격, 깊이를 확인하는 조사입니다.

어디까지가 유적인지를 정해야 본 발굴의 계획이 서거든요.

4단계, 발굴조사

마지막으로 유적 전체를 체계적으로 드러내 기록하는 본조사가 발굴조사입니다.

이 결과에 따라 현지 보존, 이전 보존, 기록 보존 같은 조치가 결정됩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수행하는 이 네 단계는 결국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해요.

이 땅은 예전에 어떤 땅이었는가.



11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필지 수는 대지 109필지와 밭 7필지를 더해 116필지로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은 대지 39,229㎡와 밭 1,953㎡를 더하면 41,182㎡로, 전체 41,183㎡와 1㎡ 차이가 납니다.

이는 당시 평 단위 기록을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생긴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원자료 수치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평수는 1평을 3.3058㎡로 계산했고, 비율은 소수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신천동은 국유지 면적의 95.3%가 대지로, 한 동네의 국유지가 거의 전부 집터로 이루어진 드문 사례입니다.

논과 임야가 한 필지도 없이 대지와 밭 두 지목만 나타난다는 점도 강 위 섬마을이라는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주군으로, 현재 서울 행정구역과 다르다는 점을 함께 기록해 둡니다.


12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16필지, 면적은 41,183㎡였습니다.

Q. 1912년 신천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09필지, 39,229㎡로 전체 면적의 약 95.3%였습니다.

Q. 1912년 신천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7필지, 1,953㎡로 전체 면적의 약 4.7%였습니다.

Q. 1912년 신천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A. 당시 신천은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한강 섬마을 새내였으며, 1949년 서울에 편입된 뒤 1988년부터 송파구 신천동이 되었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A. 옛 집터와 밭의 위치를 알려주어 매장유산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찾는 근거가 되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범위를 정하는 데 쓰입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유지는 116필지 41,183㎡였으며 대지 109필지 39,229㎡와 밭 7필지 1,953㎡로 구성된, 한강 섬마을 새내의 집터 기록입니다.

잠실역 출구를 나서면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타워를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발밑을 한 번 내려다보게 될 거예요.

그 아래에는 물길 따라 배를 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마당에 고추를 말리고, 채소 몇 포기를 기르고, 해 질 녘 강을 바라보던 사람들이요.

이름은 남지 않았지만, 그들이 살던 집터 109곳은 숫자로 남았습니다.

그 숫자를 읽고 지키는 일, 그게 문화유산 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당신이 걷는 길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역사가 될 테니까요.

우리 사업 부지는 옛날에 어떤 땅이었을까요?

1912년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문화유산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기초조사가 궁금하시다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지역별 기록을 확인해 보세요.

자료 기준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1912년 당시 경기도 양주군 신천)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강이 두 갈래로 흐르던 시절


모래 위에 집을 짓던 사람들이 있었다



백아홉 개의 마당


일곱 뙈기의 밭



물길은 메워지고 탑은 솟았지만


땅은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한다



새내, 새로 생긴 내


우리가 걷는 이 길 아래에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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