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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북바위 아래, 밭 한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12일
6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북구 편

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북바위 아래, 밭 한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필지국유지 전체

5,203㎡국유지 총면적

밭 100%지목 구성


핵심 요약 · AI 브리핑용 3문장

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는 국유지가 1필지, 총 5,203㎡ 있었습니다.

이 1필지의 지목은 밭이었고, 면적은 5,203㎡로 약 1,574평에 해당합니다.

즉, 1912년 종암동 국유지는 논·대지·임야 없이 밭 1필지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5,203㎡.1912년 종암동에서 나라 땅은이 숫자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지금 고려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 개운산 쪽으로 걸어 본 적 있나요?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고, 카페 간판이 줄지어 있죠.

그런데 딱 114년 전, 이 동네에서 국가 소유로 기록된 땅은 단 한 필지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논도 집터도 아닌, 흙냄새 나는 밭 한 뙈기.

왜 하필 밭이었을까요?

그리고 이 작은 기록이 왜 지금, 공사 현장의 일정과 예산을 좌우할 수 있을까요?

끝까지 읽으면, 종암동을 걷는 발걸음이 조금 달라질 겁니다.


목차

  1. 1912년 종암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종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3. 종암동 이름의 역사, 북바위 이야기

  4. 1912년 종암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5.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6. 밭 한 필지가 말해 주는 마을의 풍경

  7. 문화재 지표조사와 이 기록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8.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는 어떻게 이어지나요?

  9. 기초조사가 공사를 살린 성공 사례

  10.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11. 자주 묻는 질문

  12. 한 줄 결론




1.1912년 종암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할게요.

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국유지는 1필지, 총면적 5,203㎡였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574평입니다.

감이 잘 안 오죠?

국제 규격 축구장 한 면이 약 7,140㎡이니, 그 4분의 3쯤 되는 크기예요.

학교 운동장 하나 정도의 땅을 떠올리면 비슷합니다.

이 시리즈에서 여러 동을 정리해 오면서, 국유지가 수십 필지씩 흩어진 동네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 기록들 사이에서 종암동은 유난히 단출합니다.

한 필지, 한 지목, 한 숫자.

그래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읽히는 기록이에요.

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국유지 현황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평, 환산)

비율

국유지 전체

1필지

5,203

약 1,574

100%

밭(전)

1필지

5,203

약 1,574

100%

논(답)

0필지

0

0

0%

대지·임야·기타

0필지

0

0

0%

설명: 1912년 종암동 국유지 현황 표. 국유지 1필지 5,203㎡, 이 중 밭 1필지 5,203㎡(100%), 논·대지·임야는 기록 없음.


2.종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종암동 국유지 중 밭은 1필지, 5,203㎡였습니다.

국유지 전체가 곧 밭이었던 셈이죠.

지목 비율로 보면 밭 100%입니다.

논은 없었습니다.

나라가 가진 집터도, 산자락 임야도 기록에 없습니다.

이 단순함이 꽤 많은 걸 알려 줘요.

물을 대야 하는 논보다, 경사진 땅에서도 일굴 수 있는 밭이 국유지로 남았다는 점.

개운산 자락의 구릉 지형과도 잘 어울리는 풍경입니다.

밭

5,203㎡

논

0㎡

대지

0㎡

임야

0㎡

한 줄 정리: 1912년 종암동 국유지는 밭 1필지 5,203㎡가 전부였습니다.


.

3.종암동 이름의 역사, 북바위 이야기

종암동의 이름엔 바위가 박혀 있습니다.

한자로는 쇠북 종, 바위 암.

지금 고려대학교 뒤편 개운산에 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그걸 북바위라고 불렀고, 그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됐습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따라 걷는 북바위 둘레길까지 조성되어 있죠.

둘레길 한 구간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를 기리는 길로도 이어집니다.

생각해 보면 재밌어요.

북은 울려야 존재를 알리는 물건이잖아요.

1912년 토지대장 속 밭 한 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꺼내 읽어야 비로소 소리를 냅니다.

이 글이 그 북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1912년 종암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지금은 서울 성북구 종암동이지만, 1912년의 주소는 달랐습니다.

당시 종암리 일대는 경기도 경성부의 외곽 면인 숭신면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경성부 숭신면과 인창면 대부분이 합쳐져 고양군 숭인면이 됩니다.

숭신에서 숭, 인창에서 인을 따온 이름이에요.

이후 1936년 경성부 구역이 넓어지면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오고, 해방 뒤 성북구 체계 속에서 지금의 종암동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고요?

옛 기록을 찾을 때 지금 주소로만 검색하면 자료가 안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양군, 숭인면, 숭신면 같은 옛 이름까지 함께 찾아봐야 해요.

문화유산 기초조사의 첫 관문이 바로 이 행정구역 변천을 정확히 짚는 일입니다.

시기

소속 행정구역

비고

1912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일대

토지조사 기록 시점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숭신면·인창면 통합

1936년

경성부 편입

경성부 구역 확장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북바위 둘레길·개운산


5.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전역의 땅을 측량하고 장부에 올리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습니다.

땅마다 번호를 매기고, 지목을 정하고, 면적을 재고, 소유자를 적었어요.

이 과정에서 신고하지 못한 땅이나 소유가 애매한 땅이 국유지로 넘어간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은 식민지배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근대 이전 마을의 생김새를 거의 필지 단위로 보여 주는 드문 자료이기도 해요.

어디가 밭이었고, 어디가 논이었고, 어디에 집이 모여 있었는지.

도시가 덮어 버리기 전의 땅 모양을 되짚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도가 바로 이 장부입니다.

아픈 역사와 귀한 정보가 한 장 안에 겹쳐 있는 셈이죠.


6.밭 한 필지가 말해 주는 마을의 풍경

숫자를 풍경으로 바꿔 볼까요?

1912년 가을, 개운산 아래.

북바위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비탈에 보리와 콩이 자랍니다.

물길이 넉넉하지 않은 구릉지라 논보다는 밭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도성 동북쪽 밖, 한양으로 채소와 곡식을 대던 근교 농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많은 땅 가운데 나라 장부에 오른 건 단 한 필지.

나머지는 대부분 마을 사람들의 땅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국유지가 적다는 건, 그만큼 사람의 손때가 묻은 땅이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오래 머문 땅에는 늘 흔적이 남습니다.

바로 여기서 문화유산 조사가 시작돼요.


7.문화재 지표조사와 이 기록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여기부터가 진짜 핵심입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를 하려면, 공사 전에 그 땅에 매장유산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첫 단계를 지표조사, 흔히 문화재 지표조사라고 부릅니다.

근거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입니다.

지표조사는 땅을 파지 않아요.

문헌을 뒤지고, 옛 지도를 겹쳐 보고, 현장을 걸으며 지표에 드러난 유물을 살핍니다.

이때 1912년 토지대장이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종암동의 이 밭 한 필지.

오래 경작된 밭은 생활 유적이 얕게 남아 있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자리가 이미 깊게 깎여 나갔다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할 근거가 되죠.

옛 지목 하나가 조사 범위를 넓힐지, 좁힐지를 가르는 단서가 되는 겁니다.

잠깐, 이건 꼭 알아 두세요

지표조사를 건너뛰거나 늦게 시작하면, 착공 직전에 공사가 멈추는 일이 실제로 생깁니다.

계약은 끝났는데 땅을 못 파는 상황, 상상만 해도 아찔하죠.

기초조사를 일찍 할수록 일정과 예산의 불확실성은 줄어듭니다.


8.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는 어떻게 이어지나요?

문화유산 조사는 보통 네 단계 흐름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단계

하는 일

1912년 기록의 역할

지표조사

문헌·지도·현장 답사로 유존 가능성 판단

옛 지목·필지로 조사 범위 설정

표본조사

일부 지점을 소규모로 파서 확인

오래된 경작지·주거지 우선 선정

시굴조사

트렌치를 넣어 유구 분포 확인

필지 경계·지형 복원 참고

발굴조사

유구 전면 노출·기록·보존 결정

유적의 시간적 맥락 해석

표본조사는 의심 지점을 콕 집어 살짝 파 보는 단계예요.

시굴조사는 좀 더 넓게, 긴 도랑 모양의 구덩이를 넣어 땅속 층위를 읽습니다.

여기서 유구가 확인되면 정밀한 발굴조사로 넘어가죠.

모든 단계의 출발점은 결국 기초조사, 그러니까 이런 옛 기록을 얼마나 잘 읽었느냐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현장에 들어가기 전, 책상 위에서 가장 먼저 펼치는 자료이기도 해요.


9.기초조사가 공사를 살린 성공 사례

서울 도심에는 기초조사와 발굴조사가 도시를 오히려 더 풍성하게 만든 사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종로 공평동입니다.

재개발 과정에서 조선시대 골목과 집터가 층층이 드러났고, 이 유구는 빌딩 지하에 그대로 보존됐어요.

그렇게 태어난 곳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입니다.

공사는 끝났고, 건물은 섰고, 시민들은 그 아래에서 옛 한양의 골목을 걷게 됐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지운 게 아니라, 서로의 가치를 키운 거예요.

이런 결과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땅의 이력을 일찍, 정확히 읽었다는 것.

종암동처럼 국유지가 단 한 필지뿐인 동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작은 기록 하나가 큰 결정을 앞당겨 줄 수 있어요.


10.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국유지 전체(1필지 5,203㎡)와 밭(1필지 5,203㎡) 수치가 정확히 일치함을 계산으로 확인했습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으로 약 1,573.9평, 반올림해 약 1,574평으로 표기했습니다.

축구장 비교는 국제 규격 약 7,140㎡ 기준이며, 종암동 국유지는 그 약 72.9%입니다.

밭 5,203㎡라는 수치는 이 시리즈의 다른 동 자료에서도 같은 값으로 나타난 적이 있어, 원장부와 한 번 더 대조하기를 권합니다.

1912년 행정구역은 경성부 숭신면 일대로 정리했으며, 세부 리(里) 경계는 원자료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성북구 종암동은 국유지가 단 1필지, 단일 지목(밭 100%)으로 구성된 동네입니다.

필지 수 기준으로 시리즈에서 가장 단출한 국유지 구성에 속하는 사례로 기록합니다.


11.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성북구 종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필지였습니다.

Q. 1912년 종암동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A. 5,203㎡, 약 1,574평이었습니다.

Q. 1912년 종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필지 5,203㎡로, 국유지 전체가 밭이었습니다.

Q. 1912년 종암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나요?

A.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일대에 속했고, 1914년 고양군 숭인면으로 바뀌었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A. 옛 지목과 필지 정보로 매장유산 유존 가능성과 조사 범위를 판단하는 기초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12.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국유지는 밭 1필지 5,203㎡가 전부였으며, 이 작은 기록은 종암동 문화유산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도시는 매일 새로 지어집니다.

하지만 그 아래의 땅은 한 번도 처음인 적이 없었어요.

누군가 보리를 심었고, 누군가 그 밭을 지나 장에 갔고, 누군가 북바위를 보며 마을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걷는 길은, 그들이 남긴 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다음에 종암동을 지날 때, 발밑을 한 번만 내려다봐 주세요.

5,203㎡의 밭이 아직 조용히 북을 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서울 25개 자치구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문화유산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안내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1912년 당시 경성부 숭신면 일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북바위는 울지 않았다


다만 기다렸을 뿐이다



보리 이랑 사이로 바람이 지나고


장부 한 줄에 밭 한 뙈기가 눕던 해



백 년이 넘도록 아무도 읽지 않은


오천이백삼 제곱미터의 고요



오늘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르면


땅은 비로소 북소리를 낸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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