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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응봉동 역사 속, 매가 앉던 산 두 자락과 밭 두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4일 전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일 전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응봉동 역사 속, 매가 앉던 산 두 자락과 밭 두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4필지1912년 국유지 전체

33,613㎡국유지 총면적(약 10,168평)

95.4%임야 비율

2지목임야 · 밭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에는 국유지가 4필지, 총 33,613㎡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2필지 32,066㎡, 밭 2필지 1,547㎡였습니다.

응봉동 국유지 면적의 약 95.4%가 임야였으며, 이 기록은 응봉동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매년 봄, 노랗게 타오르는 그 산.110년 전 장부엔 누구의 땅으로 적혀 있었을까요?

응봉산, 가 보셨나요?

4월이면 산 전체가 개나리로 물듭니다.

해 질 녘 팔각정에 서면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오죠.

야경 맛집, 일출 명소, 서울숲 옆 산책 코스.

요즘 응봉동을 설명하는 말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숫자가 있어요.

95.4%.

1912년 응봉동 국유지 가운데 산이 차지한 비율입니다.

국유지 네 필지 중 두 필지가 산이었고, 그 두 필지가 면적의 거의 전부를 가져갔습니다.

남은 건 손바닥만 한 밭 두 뙈기뿐이었죠.

왜 하필 산이었을까요?

그 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힌트는 동네 이름에 숨어 있습니다. 응봉(鷹峰), 매의 봉우리.

지금부터 그 매가 내려다보던 땅을 한 필지씩 펼쳐 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다음 봄 개나리가 조금 다르게 보일 거예요.


목차

  1. 1912년 응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2. 임야와 밭은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3. 응봉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4. 1912년 응봉동은 어떤 동네였을까요?

  5. 국유지의 95%가 산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6. 밭 두 뙈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7.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8. 매사냥터에서 개나리 동산으로, 땅 밑의 시간은?

  9.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어떻게 이어지나요?

  10. 옛 지적 기록이 빛난 성공 사례

  11. 매의 봉우리가 우리에게 남긴 것


01

1912년 응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의 국유지는 모두 4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33,613㎡. 평으로 환산하면 약 10,168평입니다.

축구장 한 면이 약 7,140㎡이니, 축구장 네 면 반을 넘는 넓이예요.

지목은 단 두 가지, 임야와 밭이었습니다.

필지 수로 보면 2대 2. 아주 공평해 보이죠.

그런데 면적으로 바꾸는 순간 균형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임야 2필지가 32,066㎡, 밭 2필지는 1,547㎡. 임야가 밭보다 약 20.7배 넓었어요.

필지 수는 같은데 면적은 스무 배 차이. 이게 응봉동 국유지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평 환산

면적 비율

임야

2

32,066

약 9,700

95.40%

밭(전)

2

1,547

약 468

4.60%

국유지 전체

4

33,613

약 10,168

100%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 현황. 지목별 합계와 총계가 정확히 일치. 자료 정리: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임야

95.40%

밭

4.60%

이미지 설명: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율 막대그래프로, 임야 95.40%, 밭 4.60%가 표시되어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응봉동 국유지는 4필지 33,613㎡였으며 임야 2필지가 그중 95.4%를 차지했습니다.


02

임야와 밭은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2필지, 32,066㎡였습니다.

약 9,700평. 이것만으로 축구장 네 면 반 가까운 크기예요.

두 필지를 똑같이 나눈다고 가정하면 한 필지가 약 16,033㎡입니다.

한 필지 한 필지가 웬만한 동네 국유지 전체보다 넓었던 셈이죠.

응봉동 국유지 면적 스무 몫 가운데 열아홉 몫이 이 산 두 자락에 몰려 있었습니다.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2필지, 모두 합쳐 1,547㎡였습니다.

약 468평. 한 필지 평균으로는 약 774㎡, 230평 남짓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작은 텃밭 단지 하나 정도의 크기예요.

그래도 이 밭이 의미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국유지 가운데 사람의 손이 매일 닿던 땅은 이 두 필지뿐이었거든요.

정리하면, 응봉동 국유지는 임야 2필지 32,066㎡와 밭 2필지 1,547㎡로 구성되었습니다.

03

응봉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매 응(鷹), 봉우리 봉(峰)

응봉동의 이름은 동네 뒷산, 응봉산에서 왔습니다.

응봉은 매의 봉우리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부터 매봉, 매봉산이라고도 불렸죠.

해발 100m도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입니다.

하지만 이 산 꼭대기에 서면 한강과 중랑천, 그 너머 들판까지 막힘 없이 펼쳐져요.

사냥감을 노리는 매에게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왕이 매를 날리던 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산에서 매사냥을 즐겼다고 합니다.

왕이 된 뒤에도 발길은 이어졌고,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여러 임금이 이 일대에서 참매를 날렸다고 전해져요.

산기슭에는 왕실의 매를 기르고 관리하던 관청, 응방(鷹坊)이 있었다고 합니다.

매가 머물던 산이라서 응봉. 이름 하나에 600년 넘는 시간이 접혀 있는 거죠.

지금도 응봉동 주민들은 해마다 매사냥 축제를 열어 그 기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관할 고지

1912년 기록 속 응봉동은 현재의 행정구역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한 두모방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로 다시 들어오며 응봉정이 되었습니다. 응봉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후 정착했습니다.


04

1912년 응봉동은 어떤 동네였을까요?

두 물길이 만나는 모서리

응봉동은 서울 지도에서 아주 독특한 자리에 있습니다.

북쪽에서 흘러온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는 바로 그 모서리예요.

물이 만나는 곳에는 모래가 쌓이고, 들이 넓어지고, 사람이 모입니다.

응봉산 동쪽 아래로는 오늘날 서울숲 일대로 이어지는 넓은 벌판이 펼쳐졌고, 조선시대에는 그 들판이 왕실 목장과 사냥터로 쓰였다고 전해집니다.

나루와 다리, 그리고 산

가까운 곳에는 조선 초기에 놓인 돌다리, 살곶이다리가 지금도 남아 있어요.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니, 사람과 짐이 끊임없이 오갔을 겁니다.

1912년 무렵 응봉동은 왕의 사냥터 시절이 지난 뒤였습니다.

산비탈엔 나무와 풀이 자라고, 산자락 아래 좁은 땅엔 밭이 일궈져 있었죠.

장부 속 네 필지는 바로 이 산과 물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05

국유지의 95%가 산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왕실의 산은 주인 없는 산이 되었다

응봉산은 오랫동안 왕실과 관청의 영향 아래 있던 산이었습니다.

매를 기르고 사냥을 하던 곳이니, 개인이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죠.

조선시대 산림은 원래 특정 개인이 독점하기 어려운 공공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은 모든 땅에 단 하나의 소유자를 적도록 요구했어요.

뚜렷한 개인 소유 증거가 없는 산, 관청이 쓰던 산은 대부분 국유지로 정리되었습니다.

응봉동 국유지 95.4%가 임야였다는 숫자는, 매가 날던 왕실의 산이 국가 장부로 옮겨 간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낮지만 넓은 산

응봉산은 높지 않습니다. 대신 바위가 많고 비탈이 가팔라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 많았어요.

밭으로 바꾸기 힘든 땅은 자연스럽게 산으로 남았고, 그 산은 고스란히 국유 임야로 기록되었죠.

조사자의 눈으로 본 임야

문화유산 조사에서 이런 산은 특별합니다.

오래 개발되지 않은 산비탈에는 옛 무덤, 제사터, 봉수나 망루 같은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거든요.

왕실 응방이 있었다는 기록까지 겹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32,066㎡의 국유 임야. 조사자라면 지도 위에 굵은 선으로 표시해 둘 구역입니다.


06

밭 두 뙈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산자락에 붙어 있던 작은 밭

밭 2필지를 합쳐 1,547㎡입니다.

강가의 넓은 들판에 있는 밭이었다면 한 필지가 이보다 훨씬 컸을 거예요.

필지가 작다는 건 대개 산자락이나 비탈 끝에 붙은 땅이라는 신호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북돋우고, 해마다 조금씩 넓혀 가던 땅이었겠죠.

왜 밭이 국유지였을까요?

이 자료만으로 두 밭이 국유지가 된 경위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관청 소유였던 산자락을 누군가 개간해 경작했을 수도 있고, 응방이나 관청에 딸린 땅이었을 수도 있어요.

분명한 건, 그 밭에서 실제로 누군가 땀을 흘렸다는 사실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밭은 의미가 있습니다. 경작층 아래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생활면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쟁기가 닿는 깊이까지는 흙이 뒤섞이지만, 그 아래는 수백 년 전 시간이 그대로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07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모든 땅에 번호를 붙인 8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모든 땅을 측량했습니다.

경계를 긋고, 지번을 매기고, 지목을 정하고, 소유자를 적었죠.

이때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오늘날 우리 지적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장부가 남긴 빛과 그림자

이 사업은 식민지 지배의 토대이기도 했습니다.

신고 절차를 몰랐던 땅, 마을이 함께 쓰던 땅, 왕실과 관청이 쓰던 땅이 대거 국유지로 넘어갔어요.

국유지는 다시 일본인이나 회사에 불하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응봉동 국유 임야 두 필지가 그 뒤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별도의 추적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요.

그 장부 덕분에 우리는 110여 년 전 응봉산이 어떤 땅이었는지 정확한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빼앗기 위해 만든 장부가 이제는 지키기 위한 지도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늘 이렇게 조용히 찾아옵니다.


08

매사냥터에서 개나리 동산으로, 땅 밑의 시간은?

바위산이 노란 산이 되기까지

광복과 전쟁을 지나며 응봉산 자락에도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산은 깎이고, 비탈엔 길이 뚫리고, 강변으로는 철길과 도로가 지나갔죠.

헐벗었던 바위산에 개나리를 심기 시작한 건 그 뒤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노란 응봉산은, 사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가꾼 결과예요.

다시 시작되는 변화

그리고 지금, 응봉동은 또 한 번 크게 바뀌려 하고 있습니다.

재개발과 재건축 소식이 이어지고, 한강변 스카이라인이 새로 그려지고 있죠.

여기서 잠깐, 마음에 걸리는 질문 하나를 던져 볼게요.

예전에 산을 깎고 땅을 팔 때, 그 흙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확인했을까요?

왕의 매를 기르던 응방 자리는 정확히 어디였을까요?

확인하지 않고 퍼낸 흙은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금이야말로, 1912년 장부를 다시 펼쳐 봐야 할 때입니다.


09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어떻게 이어지나요?

건설 공사 전에 땅속 매장유산을 확인하는 절차는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근거 법령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예요.

첫째, 문화재 지표조사

삽을 뜨기 전에 문헌, 옛 지도, 지적 기록부터 꼼꼼히 살핍니다.

그다음 현장을 걸으며 땅 위에 드러난 기와 조각, 토기 조각, 자기 조각을 찾아요.

응봉동처럼 왕실 응방 기록과 넓은 국유 임야가 겹치는 곳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구역입니다.

둘째, 표본조사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보이면 몇 곳을 골라 작게 파 봅니다.

전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땅 밑 상황을 가늠하는 단계예요.

셋째, 시굴조사

일정한 간격으로 긴 도랑,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깊이를 확인합니다.

바위가 많은 산지는 흙이 얕고 쓸려 내려간 곳이 많아서, 유물이 아래쪽 비탈에 모여 있는 경우도 있어요. 조사자의 경험이 빛나는 순간이죠.

넷째, 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 조사로 넘어갑니다.

흙을 한 겹씩 걷어내며 유구를 기록하고 유물을 수습해요.

이 모든 과정은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아 진행합니다.

응봉동 국유지 지목

예상 가능한 흔적

조사 시 확인 포인트

임야 32,066㎡

옛 무덤, 관청 시설 터, 제사 흔적

지표 노출 기와·토기, 봉분, 평탄지

밭 1,547㎡

경작층, 석축, 하층 생활면

경작층 아래 유물 포함층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지목별 문화유산 조사 관점. 정리: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0

옛 지적 기록이 빛난 성공 사례

빌딩 지하에서 다시 걷는 조선의 골목

종로 공평동 재개발 현장에서는 조선시대 집터와 골목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허물지 않고 빌딩 지하에 그대로 남기는 길을 택했고, 지금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누구나 그 골목을 걸어 볼 수 있어요.

개발과 보존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장면입니다.

주택가 아래 잠들어 있던 백제 왕성

송파 풍납동은 오랫동안 평범한 주택가였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공사 도중 백제 토기가 쏟아지면서, 그 아래가 백제 초기 왕성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응봉동과 같은 한강변, 물이 만든 땅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응봉동에 주는 메시지

두 사례가 말하는 건 하나입니다.

공사 전에 누군가 먼저 묻고, 먼저 기록을 확인했다는 것.

왕의 매가 날던 산, 두 물길이 만나는 모서리. 응봉동은 그 질문을 던질 이유가 충분한 동네입니다.

그리고 1912년 장부는 그 질문의 첫 페이지가 되어 줍니다.


11

매의 봉우리가 우리에게 남긴 것

숫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장부에 남은 건 필지와 지목과 면적뿐입니다.

매를 팔뚝에 올리고 산을 오르던 응사의 숨소리, 비탈밭에서 돌을 고르던 손, 산에서 땔감을 지고 내려오던 등은 적혀 있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압니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33,613㎡라는 숫자도 있다는 걸.

다음 봄, 응봉산에 오르는 당신에게

개나리가 피면 팔각정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가 보세요.

발밑의 노란 꽃 아래, 그 아래 흙, 그 아래 어딘가에 1912년의 산이 이어져 있습니다.

더 깊은 곳에는 왕의 매가 앉았던 바위의 기억까지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결국 그 기억을 함부로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그리고 그 약속은,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준 당신 같은 사람이 있기에 지켜집니다.

하늘 높이 원을 그리던 매처럼, 우리도 가끔은 높은 곳에서 내 동네의 시간을 내려다볼 필요가 있으니까요.


검증 노트

국유지 필지 수: 임야 2 + 밭 2 = 4필지로 입력 자료의 총계와 일치합니다.

면적: 임야 32,066㎡ + 밭 1,547㎡ = 33,613㎡로 입력 자료의 총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반올림 차이는 없습니다.

면적 비율은 총계 33,613㎡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임야 95.40%, 밭 4.60%, 합계 100%).

필지당 평균 면적은 임야 약 16,033㎡, 밭 약 774㎡이며, 이는 균등 분할을 가정한 참고값으로 실제 개별 필지 면적은 원자료에 없습니다.

평 환산은 1평=3.305785㎡ 기준이며 본문에서는 반올림해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응봉동은 국유지 지목이 임야와 밭 두 가지뿐이며, 두 지목의 필지 수가 2대 2로 같지만 면적은 약 20.7배 차이가 나는 사례입니다.

임야 비율 95.40%는 같은 성동구 옥수동(87.41%)보다 높아, 성동구 한강변 산지 동네의 임야 집중 패턴을 한층 뚜렷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깁니다.


FAQ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4필지, 33,613㎡였습니다.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2필지 32,066㎡로, 국유지 면적의 약 95.4%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응봉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2필지 1,547㎡였습니다.

응봉동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매 응(鷹), 봉우리 봉(峰)을 써서 매의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조선 왕실이 응봉산에서 매사냥을 하고 응방을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옛 토지 이용을 보여주는 기초자료로, 지표조사 문헌 검토와 표본조사·시굴조사 지점 선정에 참고됩니다. 특히 넓은 국유 임야는 옛 무덤이나 관청 시설 흔적을 확인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는 4필지 33,613㎡로, 임야 2필지 32,066㎡·밭 2필지 1,547㎡로 구성되었으며, 응봉동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기초 기록입니다.

우리 현장,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지 궁금하신가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 서울 각 동의 기초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응봉산 일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매 한 마리 봉우리에 앉아


두 물이 만나는 곳을 오래 바라보았다


왕은 떠나고 응방은 무너지고


장부는 그 산을 두 줄로 적었다


산 둘, 밭 둘


바위 틈에 누군가 개나리를 심었고


봄마다 산은 노랗게 날개를 편다


흙은 아직, 그 매를 기억한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 응봉동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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