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옥수동 역사 속, 산 한 자락과 밭 세 뙈기, 집터 한 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최종 수정일: 10월 15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옥수동 역사 속, 산 한 자락과 밭 세 뙈기, 집터 한 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5필지1912년 국유지 전체
9,874㎡국유지 총면적(약 2,987평)
87.4%임야 비율
3지목대지 · 임야 · 밭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는 국유지가 5필지, 총 9,874㎡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1필지 8,631㎡, 밭 3필지 1,008㎡, 대지 1필지 234㎡였습니다.
옥수동 국유지 면적의 약 87%가 임야였으며, 이 기록은 옥수동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110년 전엔 누구의 산이었을까요?
옥수동,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세요?
동호대교 너머로 번지는 노을. 언덕을 따라 층층이 선 아파트. 옥수역 플랫폼에서 보이는 한강.
요즘 옥수동은 서울에서 한강뷰가 가장 예쁜 동네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그 언덕이 1912년 장부에 어떻게 적혀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 동네 국유지는 다섯 필지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혼자서 전체의 87%를 차지했죠.
그 땅의 이름은 임야, 그러니까 산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손바닥만 한 밭 세 뙈기, 그리고 70평 남짓한 집터 한 칸.
숫자 몇 개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걸리지 않나요?
산 하나, 밭 셋, 집 한 채. 이건 마치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옮겨 적은 목록 같거든요.
지금부터 그 다섯 필지를 한 장씩 넘겨 보겠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옥수동 언덕이 전혀 다르게 보일 거예요.
목차
1912년 옥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대지·임야·밭은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옥수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1912년 옥수동은 어떤 동네였을까요?
국유지의 87%가 산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밭 세 뙈기와 집터 한 칸이 말해주는 것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달동네에서 아파트 숲으로, 땅 밑의 시간은?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어떻게 이어지나요?
옛 지적 기록이 빛난 성공 사례
산 한 자락이 우리에게 남긴 것
01
1912년 옥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답부터 드릴게요.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국유지는 모두 5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9,874㎡. 평으로 바꾸면 약 2,987평입니다.
축구장 한 면이 약 7,140㎡이니까, 축구장 하나 반이 조금 안 되는 넓이예요.
필지 수로 보면 밭이 3필지로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뒤집힙니다. 임야 단 1필지가 8,631㎡로 압도적이었거든요.
필지 수와 면적의 주인공이 서로 다른 동네. 이게 옥수동 국유지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평 환산 | 면적 비율 |
임야 | 1 | 8,631 | 약 2,611 | 87.41% |
밭(전) | 3 | 1,008 | 약 305 | 10.21% |
대지 | 1 | 234 | 약 71 | 2.37% |
국유지 전체 | 5 | 9,874 | 약 2,987 | 100% |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 국유지 현황. 지목별 합계는 9,873㎡로 총계와 1㎡ 차이(검증 노트 참고). 자료 정리: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
임야
87.41%
밭
10.21%
대지
2.37%
이미지 설명: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율 막대그래프로, 임야 87.41%, 밭 10.21%, 대지 2.37%가 표시되어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옥수동 국유지는 5필지 9,874㎡였으며 임야 1필지가 그중 87%를 차지했습니다.

02
대지·임야·밭은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1필지, 8,631㎡였습니다.
약 2,611평. 혼자서 축구장 한 면을 훌쩍 넘는 크기예요.
옥수동 국유지 면적 열 중 아홉에 가까운 몫이 이 산 한 필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3필지, 모두 합쳐 1,008㎡였습니다.
세 필지를 똑같이 나눈다고 치면 한 필지에 약 336㎡, 100평 정도예요.
요즘 주말농장 몇 구획을 이어 붙인 정도의 작은 밭들이었던 셈이죠.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1필지, 234㎡였습니다.
약 71평. 마당 딸린 초가 한 채가 앉기 딱 좋은 크기입니다.
국유지 중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이 한 칸뿐이었어요.
정리하면, 옥수동 국유지는 임야 1필지 8,631㎡, 밭 3필지 1,008㎡, 대지 1필지 234㎡로 구성되었습니다.
03
옥수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두 물이 만나는 곳, 두뭇개
옥수동의 옛 이름은 두뭇개입니다.
한자로 옮기면 두모포(豆毛浦)죠.
동쪽에서 내려오는 한강 줄기와, 북쪽에서 흘러드는 냇물이 이 앞에서 만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두 물이 모이는 포구. 이름 자체가 이 동네가 물가였다는 증명서인 셈이에요.
옥처럼 맑은 우물, 옥정수
옥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마을에 옥정수(玉井水)라는 이름난 우물이 있어서, 사람들이 이 일대를 옥정숫골이라 불렀다는 거예요.
강물이 만나는 포구, 그리고 맑은 샘물이 솟는 골짜기.
두 이야기 모두 물을 품고 있다는 게 참 이 동네답습니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이곳은 두모동, 두모리처럼 두뭇개에서 온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 193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수정(町)으로 바뀌었고, 광복 뒤 우리말 행정명인 옥수동이 되었어요.
관할 고지
1912년 기록 속 옥수동은 현재의 행정구역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당시 이 일대는 두모포 마을로 불렸고, 옥수동이라는 동명은 1936년 옥수정을 거쳐 광복 후 정착했습니다.
04
1912년 옥수동은 어떤 동네였을까요?
선비들이 책을 읽던 강가
조선시대 이 앞 한강은 동호(東湖)라고 불렸습니다.
경치가 얼마나 좋았던지, 권세 있는 집안들이 앞다퉈 정자와 별장을 지었다고 해요.
젊은 문신들이 나랏일을 잠시 내려놓고 책만 읽게 했던 독서당도 이 언저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길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 흔적이에요.
포구와 산비탈의 마을
1912년 무렵의 옥수동은 화려한 정자 시대가 지나간 뒤였습니다.
강가에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뒤편으로는 소나무 우거진 산비탈이 펼쳐졌죠.
사람들은 그 사이 좁은 땅에 집을 짓고 비탈에 밭을 일궜습니다.
산 위에는 지금도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오래된 절 미타사가 자리하고 있어요.
장부 속 다섯 필지는 바로 이런 풍경 한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05
국유지의 87%가 산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옥수동은 원래 언덕 동네
지도를 펼쳐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옥수동은 매봉산 자락이 한강을 향해 흘러내리는 비탈에 자리하고 있어요.
평지보다 경사지가 훨씬 많은 동네죠.
그러니 동 안의 땅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산이었던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 산은 국유지가 되기 쉬웠을까요?
조선시대 산림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공공의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무하고, 함께 땔감을 구하는 곳이었죠.
그런데 토지조사 과정에서 뚜렷한 소유자를 증명하기 어려운 산은 국유지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옥수동 국유지 87%가 임야였다는 숫자 뒤에는, 어쩌면 마을이 함께 쓰던 산이 국가 장부로 넘어간 사연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조사자의 눈으로 본 임야
문화유산 조사에서 산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개발이 늦게 닿은 산비탈에는 옛 무덤, 가마터, 절터 같은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8,631㎡의 국유 임야. 조사자라면 반드시 표시해 둘 구역입니다.
06
밭 세 뙈기와 집터 한 칸이 말해주는 것
비탈에 일군 작은 밭들
밭 3필지를 합쳐도 1,008㎡입니다.
넓은 평야의 밭이었다면 한 필지가 이보다 몇 배는 컸을 거예요.
작게 쪼개진 밭은 대개 경사지를 계단처럼 깎아 만든 땅이라는 신호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다지고, 한 뼘씩 넓혀 간 땅이죠.
국유지 속 단 하나의 대지
대지 234㎡, 약 71평.
국유지 중 유일하게 건물이 설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관청 관련 건물이었는지, 산지기 집이었는지, 혹은 다른 용도였는지는 이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분명한 단서입니다.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살았거나 머물렀던 자리니까요.
집터 아래에는 아궁이, 구들, 깨진 그릇 조각 같은 생활의 흔적이 남기 쉽습니다.

07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무엇이었나요?
땅마다 번호를 매긴 8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모든 땅을 측량했습니다.
경계를 긋고, 지번을 매기고, 지목을 정하고, 소유자를 기록했죠.
이때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 우리 지적 제도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장부에 담긴 빛과 그림자
이 사업은 식민지 수탈의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신고 절차를 모르거나 기한을 놓친 땅, 공동체가 함께 쓰던 땅이 국유지로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았어요.
옥수동 국유 임야 한 필지가 어떤 경로로 국유지가 되었는지, 이 자료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 장부 덕분에 우리는 110여 년 전 옥수동 언덕이 어떻게 쓰였는지 정확한 숫자로 알 수 있다는 것.
수탈의 도구가 지금은 기억의 열쇠가 되었다는 아이러니. 역사는 가끔 이렇게 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08
달동네에서 아파트 숲으로, 땅 밑의 시간은?
언덕 위에 뜨던 달
광복과 전쟁을 지나며 옥수동 비탈에는 피난민과 서민들의 집이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골목은 좁고 계단은 끝이 없었지만, 언덕 위로 뜨는 달만큼은 서울 어디보다 크게 보였다고들 하죠.
그 시절 옥수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재개발이 지나간 자리
1990년대부터 대규모 재개발이 이어지면서 언덕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습니다.
산을 깎고, 비탈을 다지고, 지하주차장을 위해 땅을 깊게 팠죠.
여기서 잠깐, 불편한 질문을 하나 해 볼게요.
그때 그 흙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확인했을까요?
모르는 사이에 퍼 올려져 사라진 흔적이 있었다면, 그건 영영 되찾을 수 없습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 다시 재건축될 땅이 남아 있는 지금. 1912년 장부를 다시 꺼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09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어떻게 이어지나요?
건설 현장에서 매장유산을 지키는 절차는 네 단계입니다.
근거 법령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예요.
첫째, 문화재 지표조사
땅을 파기 전, 문헌과 옛 지도와 지적 기록을 먼저 살핍니다.
그다음 현장을 걸으며 땅 위에 드러난 기와, 토기, 자기 조각을 찾죠.
옥수동처럼 국유 임야와 대지가 기록된 곳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반드시 짚어 볼 구역이 됩니다.
둘째, 표본조사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보이면 몇 군데를 골라 작게 파 봅니다.
전체를 건드리지 않고 땅 밑의 상태를 가늠하는 단계예요.
셋째, 시굴조사
일정한 간격으로 긴 도랑, 즉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깊이를 확인합니다.
비탈진 땅은 흙이 흘러내려 쌓이는 방향까지 고려해야 해서 조사자의 경험이 특히 중요하죠.
넷째, 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 조사에 들어갑니다.
흙을 한 겹씩 걷어내며 유구를 기록하고 유물을 수습해요.
이 모든 과정은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습니다.
옥수동 국유지 지목 | 예상 가능한 흔적 | 조사 시 확인 포인트 |
임야 8,631㎡ | 옛 무덤, 가마터, 절터 | 지표 노출 유물, 봉분 흔적 |
밭 1,008㎡ | 경작층, 계단식 석축 | 경작 흔적 아래 생활면 |
대지 234㎡ | 집터, 구들, 생활 유물 | 건물지 기초, 아궁이 자리 |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지목별 문화유산 조사 관점. 정리: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

10
옛 지적 기록이 빛난 성공 사례
빌딩 지하에 살아난 조선의 골목
종로 공평동 재개발 현장에서는 조선시대 집터와 골목길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철거하는 대신 빌딩 지하에 그대로 보존하는 길을 택했고, 지금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누구나 걸어 볼 수 있어요.
개발과 보존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입니다.
주택가 아래에서 깨어난 백제 왕성
송파 풍납동은 오랫동안 평범한 주택가였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공사 중 백제 토기가 쏟아지면서 그 아래가 백제 초기 왕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같은 한강변, 강물이 만든 땅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옥수동에 주는 시사점
두 사례의 공통점은 단순합니다.
삽을 뜨기 전에 누군가 먼저 묻고, 먼저 확인했다는 것.
옥수동처럼 산과 강이 맞닿고 오랜 역사를 품은 동네라면, 1912년 장부는 그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11
산 한 자락이 우리에게 남긴 것
숫자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장부에는 필지와 지목과 면적만 남았습니다.
비탈밭에서 돌을 골라내던 손, 산에서 나무를 지고 내려오던 등, 집터 마당에서 저녁을 짓던 연기는 적혀 있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압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9,874㎡라는 숫자도 없었을 거라는 걸.
오늘 그 언덕을 걷는 당신에게
옥수역에서 내려 한강 쪽으로 걸어 보세요.
발밑의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아래, 그 아래 어딘가에 1912년의 흙이 이어져 있습니다.
두 물이 만나던 포구의 기억, 옥처럼 맑던 우물의 기억까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결국 그 기억을 함부로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그리고 그 약속은 오늘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 같은 사람들 덕분에 지켜집니다.

검증 노트
국유지 필지 수: 대지 1 + 임야 1 + 밭 3 = 5필지로 입력 자료의 총계와 일치합니다.
면적: 대지 234㎡ + 임야 8,631㎡ + 밭 1,008㎡ = 9,873㎡로, 입력 자료의 총계 9,874㎡와 1㎡ 차이가 납니다. 원자료의 평→㎡ 환산 과정에서 생긴 반올림 차이로 보고, 총계는 원자료 값 9,874㎡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면적 비율은 총계 9,874㎡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임야 87.41%, 밭 10.21%, 대지 2.37%, 합계 99.99%).
평 환산은 1평=3.305785㎡ 기준이며 본문에서는 반올림해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옥수동은 필지 수 1위(밭 3필지)와 면적 1위(임야 1필지)가 서로 다른 지목인 사례입니다.
단일 임야 필지가 국유지 면적의 87.41%를 차지해, 경사지 동네의 임야 집중 패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깁니다.
FAQ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5필지, 9,874㎡였습니다.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1필지 234㎡였습니다.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1필지 8,631㎡로, 국유지 면적의 약 87%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옥수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3필지 1,008㎡였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옛 토지 이용을 보여주는 기초자료로, 지표조사 문헌 검토와 표본조사·시굴조사 지점 선정에 참고됩니다. 특히 임야와 대지는 옛 무덤이나 집터 흔적을 확인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 국유지는 5필지 9,874㎡로, 임야 1필지 8,631㎡·밭 3필지 1,008㎡·대지 1필지 234㎡로 구성되었으며, 옥수동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기초 기록입니다.
우리 현장,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지 궁금하신가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 서울 각 동의 기초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옛 두모포 일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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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물이 만나 포구가 되고
포구 뒤로 솔숲이 일어섰다
누군가 비탈에 돌을 쌓아 밭을 내고
누군가 그 곁에 작은 집을 지었다
장부는 그것을 다섯 줄로 적었다
산 하나, 밭 셋, 집 하나
이름은 지워져도 흙은 남아
오늘 언덕을 오르는 우리를 기억한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 옥수동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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