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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굽이치던 그 땅,1912년 강동구의 숨겨진 기록

5월 31일
5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

한강이 굽이치던 그 땅,1912년 강동구의 숨겨진 기록

강동구 전체 4,821필지 · 16,053,906㎡ — 논밭과 무덤과 프랑스인이 공존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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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에 프랑스인이 땅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요?

지금의 강동구는 현대식 아파트와 지하철 노선으로 가득 찬 서울 동쪽의 핵심 거주지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땅에는 이씨 문중의 광대한 논이 펼쳐져 있었고, 프랑스인이 4필지의 땅을 쥐고 있었으며, 34곳의 무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이 잊혀진 기억을 땅속에서 꺼내는 작업이다. 지금부터 1912년 강동구의 진짜 얼굴을 함께 들여다보자.


목차

11912년 강동구의 전체 규모 — 한강변 농촌의 실체

2논과 밭 — 강동구를 먹여 살린 광활한 농경지

3집과 산과 무덤 — 삶과 죽음이 공존한 땅

4성씨별 토지 소유 — 이씨가 장악한 강동구의 지형도

5국유지·일본인·프랑스인 — 식민지와 열강의 발자국

6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강동구가 중요한가



01 · 기초 통계

1912년 강동구의 전체 규모 — 한강변 농촌의 실체

1912년 강동구는 총 4,821필지, 면적 16,053,906㎡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약 1,605헥타르, 현재 여의도 면적의 5.5배에 달하는 규모다. 지금의 강동구가 고층 아파트와 올림픽공원, 현대적 상업지구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것과 달리, 110년 전의 강동구는 한강 하류를 끼고 펼쳐진 광대한 농촌 지대였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이처럼 구별·동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어디에 무덤이 있었는지, 어느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지금 그 자리 아래 어떤 유물이 잠들어 있을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 필지 수

4,821

필지

총 면적

16,053,906

논 필지

1,488

필지

밭 필지

2,493

필지

대지(집)

403

필지

임야(산)

403

필지

놀라운 우연이 하나 있다. 대지 필지 수와 임야 필지 수가 똑같이 403필지다. 집이 있는 땅과 산이 있는 땅이 정확히 같은 수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러나 면적은 극명하게 갈린다. 대지가 394,408㎡인 데 반해 임야는 2,782,786㎡로 약 7배 더 넓다. 필지 수는 같지만 한 필지의 평균 크기가 임야에서 압도적으로 컸다는 뜻이다.


02 · 농경지 분석

논과 밭 — 강동구를 먹여 살린 광활한 농경지



강동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지목은 밭이었다. 2,493필지에 7,542,731㎡, 전체 면적의 약 47%를 밭이 덮고 있었다. 논은 1,488필지에 5,308,304㎡로 전체의 약 33%였다. 논과 밭을 합산하면 3,981필지, 12,851,035㎡로 강동구 전체 면적의 약 80%가 순수 농경지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밭이 논보다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한강에 인접한 지역은 수리 조건이 좋아 논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강동구의 경우 밭이 논의 약 1.42배에 달했다. 이는 한강과 일정 거리가 있는 내륙 구릉지대에 밭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암사동, 길동, 명일동 일대의 낮은 언덕 지형이 밭농사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논 면적 5,308,304㎡는 현재 강동구 내 올림픽공원(약 1.5㎢)의 약 3.5배에 해당한다. 그 너른 논에서 강동구 사람들은 해마다 쌀을 거두며 살았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바로 이런 오래된 논 경작층을 분석해 당시의 농경 방식과 수리 시설 흔적을 파악한다.


03 · 삶과 죽음의 공간

집과 산과 무덤 — 삶과 죽음이 공존한 땅

1912년 강동구에서 집이 들어선 대지는 403필지, 394,408㎡였다. 전체 면적의 약 2.5%에 불과했다. 지금의 강동구가 아파트와 빌딩으로 빼곡히 채워진 것을 생각하면 당시가 얼마나 드문드문한 풍경이었는지 실감된다. 그 희박한 대지 위에 마을들이 작은 섬처럼 모여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논과 밭과 산과 무덤이었다.

무덤, 즉 분묘지는 34필지에 25,676㎡였다. 축구 경기장 3.6개 규모의 묘지가 강동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분묘지 34필지는 숫자상으로 적어 보이지만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조선 시대 무덤에는 청동기 유물, 도기, 묘지명(墓誌銘), 복식 유물 등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아 당대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된다.

대지(집)

403

필지 / 394,408㎡

임야(산)

403

필지 / 2,782,786㎡

분묘지(무덤)

34

필지 / 25,676㎡

국유지

186

필지

임야는 403필지에 2,782,786㎡였다. 지금의 일자산, 명일근린공원, 고덕산 일대가 대부분 이 임야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것은 임야의 필지당 평균 면적이 6,905㎡에 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임야 필지가 평균적으로 2,000평이 넘었다는 뜻이다. 반면 대지는 필지당 평균 979㎡로 임야의 7분의 1 수준이었다. 당시 강동구 사람들에게 산은 생활 공간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자 공동 자원이었다.



04 · 성씨별 토지 분포

성씨별 토지 소유 — 이씨가 장악한 강동구의 지형도

강동구의 토지는 누가 얼마나 갖고 있었을까. 1912년 성씨별 소유 현황을 보면, 강서구나 서울 전체와는 사뭇 다른 구조가 드러난다. 강서구에서는 김씨가 1위였고, 서울 전체에서는 박씨가 압도적 1위였다. 그러나 강동구에서는 이씨가 976필지로 선두를 달렸다.

이씨

976필지

김씨

718필지

심씨

408필지

조씨

264필지

어씨

210필지

박씨

200필지

유씨

140필지

정씨

134필지

최씨

130필지

윤씨

125필지

양씨

100필지

이씨 976필지, 김씨 718필지를 합산하면 1,694필지로 전체 4,821필지의 약 35.1%를 두 성씨가 쥐고 있었다. 특히 심씨가 3위(408필지)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띈다. 서울 전체 통계에서 심씨는 상위권에 들지 못했지만, 강동구에서는 조씨(264필지)와 박씨(200필지)를 크게 앞섰다. 이는 특정 심씨 집성촌이 강동구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가장 흥미로운 이름은 어씨(魚氏)다. 210필지로 5위를 차지했다. 어씨는 전국 희귀 성씨 중 하나로 주로 충청 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12년 강동구에서 무려 210필지를 보유하며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어씨 집성촌 혹은 어씨 가문의 대규모 토지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문화재 지표조사 입장에서는 어씨 집중 소유 구역이 중요한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성공 사례 — 집성촌 성씨 기록과 발굴 연결

강동구 암사동 일대에서 재개발 공사 착공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1912년 기록에서 이씨 집중 소유지와 무덤 필지가 중첩되는 구역이 확인되었다. 시굴조사로 이어진 결과, 조선 중기 분묘 3기와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발굴은 암사동 신석기 유적과 더불어 강동구가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연속적인 거주 공간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05 · 식민지와 열강의 흔적

국유지·일본인·프랑스인 — 식민지와 열강의 발자국



1912년 강동구의 국유지는 186필지였다. 서울 전체 국유지 7,883필지의 약 2.4%에 해당한다. 강동구의 전체 필지 수가 서울 전체의 3.9%임을 감안하면, 국유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이는 강동구의 농경지 대부분이 여전히 민간 성씨 소유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며, 식민지 정부의 토지 수탈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을 공동 소유 토지는 단 3필지였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12필지에 그쳤다. 강서구의 일본인 소유 15필지, 서울 전체의 5,904필지와 비교해도 눈에 띄게 적은 수치다. 강동구는 서울 동쪽 외곽의 순수 농촌 지대였기 때문에, 상업 이익이 집중되는 도심부보다 일본 자본의 침투 속도가 훨씬 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강동구에 프랑스인이 4필지의 땅을 갖고 있었다. 당시 강동구와 같은 외곽 농촌 지대에 서양인 소유 토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서울 전체 프랑스인 소유 186필지 중 4필지가 강동구에 있었다. 이 프랑스인들은 아마도 한강 동쪽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천주교 사제들이거나, 당시 경인선 철도 및 각종 근대 시설 사업에 관여하던 기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4필지의 정확한 위치와 용도는 아직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국유지

186

필지

일본인

12

필지

프랑스인

4

필지

마을 공동

3

필지


06 · 현재와의 연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강동구가 중요한가



강동구는 서울 25개 구 중에서도 문화재 발굴조사의 역사가 유독 풍성한 지역이다. 암사동 선사 주거지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서울 문화재 발굴의 상징적인 성공 사례다. 그리고 이 선사 유적 위에 조선 시대의 논밭과 무덤이 켜켜이 쌓이고, 다시 그 위에 1912년의 토지 기록이 남겨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강동구는 여러 이유로 특별하다. 첫째, 심씨와 어씨처럼 비교적 희귀한 성씨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집성촌에는 재실, 사당, 선산(先山)이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분묘지 34필지가 비교적 좁은 면적(25,676㎡)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부 마을 공동 묘지가 특정 구역에 밀집했음을 시사하며, 해당 구역의 시굴조사가 매우 중요하다.

셋째, 프랑스인 4필지의 위치다. 만약 이 토지가 선교 관련 시설이었다면, 그 자리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의 건축 유구와 종교 관련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인의 생활 유물과 서양 근대 문물이 교차하는 복합 문화층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강동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발굴이 될 것이다.

성공 사례 — 강동구 개발지 문화재 보호

강동구 고덕동 일대 대규모 주택 재개발 구역에서 시행된 문화재 표본조사에서, 1912년 기록 상 임야와 분묘지가 중첩되던 구역을 집중 조사한 결과 조선 후기 백자 도편 수십 점과 장방형 분묘 석곽 2기가 발굴되었다. 해당 유물들은 현장 보존 처리를 거쳐 강동구 향토문화관에 이전 수장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역사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912년 지목 기록 한 장이 소중한 문화재를 영구 보존으로 이어준 것이다.



당신이 강동구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든, 강동구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든, 아니면 그저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된 사람이든 — 이 기록은 당신과 이어져 있다. 4,821필지의 땅 위에서 논을 갈던 이씨 집안의 누군가, 심씨 문중의 재실에서 제사를 지내던 누군가, 그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던 프랑스인 한 명. 그들의 삶이 지금 당신이 밟는 땅 아래 조용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잠든 이야기를 깨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열쇠는 언제나 기록에 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처럼, 누군가 꼼꼼히 남긴 숫자들이 110년 후의 우리에게 역사의 문을 열어준다.

4,821필지의 기억,그 땅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논물이 흘렀던 자리에 아파트가 섰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났다. 프랑스인의 땅이었던 어딘가에 지금 누군가의 집이 있다. 우리가 그 역사를 기억하고 지킬 때, 이 도시는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기억의 공간이 된다. 오늘 이 글이 당신에게 그 기억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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