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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밭 열세 뙈기와 굽은다리 마을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천호동 역사

10월 26일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동구 편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밭 열세 뙈기와 굽은다리 마을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천호동 역사

21필지국유지 전체

118,972㎡국유지 총면적

49.03%밭 면적 비중

6필지논 36,076㎡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는 국유지 21필지, 총 118,972㎡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13필지 58,334㎡, 논 6필지 36,076㎡, 임야 2필지 24,562㎡였습니다.

즉 천호동 국유지의 절반 가까이(49.03%)가 밭이었고, 1912년 당시 이곳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일대였습니다.

천호동이라는 이름은, 1912년 지도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지금 천호역 사거리에 서 보세요.

현대백화점 불빛, 로데오거리의 소음, 5호선과 8호선이 갈라지는 환승 통로.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스쳐 가는 이 동네가, 백 년 전에는 이름조차 달랐다면 믿어지시나요?

그때 사람들은 이곳을 '곱은다리', 한자로 곡교(曲橋)라고 불렀습니다.

마을 앞 개울에 휘어진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소름 돋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 땅을 두고 이렇게 예언했다고 전해집니다.

"언젠가 이곳에 집 천 채가 들어설 것이다."

천 호(千戶). 지금의 동네 이름은 바로 그 풍수 예언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 측량기사들이 이 들판에 줄자를 내렸을 때.

그들의 장부에는 나라 땅 21필지가 적혔습니다.

천 채의 집은커녕, 기장과 콩이 자라던 밭이 그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장부를 한 장씩 넘겨 보려 합니다.

숫자 몇 개가 어떻게 땅속 이야기를 꺼내는 열쇠가 되는지, 끝까지 따라와 보세요.

마지막 장에서 당신이 매일 밟는 그 길이, 조금 다르게 보이게 될 겁니다.


목차

  1. 1912년 천호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2. 1912년의 천호동은 어디였나요? 곡교리와 천호 예언

  3. 천호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4. 천호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5. 천호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6. 한눈에 보는 천호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7.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중요한 이유

  8.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천호동에 적용해 보기

  9. 강 건너 이웃이 보여 준 성공 사례: 암사동과 풍납토성

  10. 자주 묻는 질문

  11. 한 줄 결론과 맺음말


1.1912년 천호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 일대에는 국유지가 21필지, 총 118,972㎡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35,989평입니다.

감이 잘 안 오시죠?

축구장 하나가 대략 7,140㎡이니, 축구장 열여섯 개 반이 넘는 땅입니다.

천호역 앞 광장부터 굽은다리역까지 이어지는 골목 상권을 통째로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이 땅은 세 가지 지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밭, 논, 그리고 임야입니다.

대지도, 도로도, 묘지도 장부의 국유지 항목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라 땅 전부가 '먹고 사는 땅' 아니면 '산'이었다는 뜻입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넓이는 약 5,665㎡였습니다.

요즘 아파트 한 동이 들어서는 대지와 비슷한 크기의 땅이, 스물한 개 흩어져 있었던 셈이죠.

한 줄 정리: 1912년 천호동 국유지는 21필지 118,972㎡였으며, 밭·논·임야 세 가지 지목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2.1912년의 천호동은 어디였나요? 곡교리와 천호 예언

그때는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1912년의 천호동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한 곡교리였습니다.

구천면이라는 이름은 조선 성종 때 이 고장에 살았던 문신 어효첨의 호에서 따왔다고 강동구 역사 자료는 전합니다.

구천면은 곡교, 고덕, 상일, 하일, 명일, 길, 둔촌, 풍납, 성내 같은 마을을 거느렸습니다.

지금 강동구와 송파구 일부가 바로 그 땅입니다.

굽은다리, 당말, 벽동말

곡교리 안에는 작은 자연 마을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습니다.

휘어진 다리가 있던 곱은다리 마을은 여러 마을 한가운데 있어 '가운뎃말'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마을 뒤에 신당이 있던 곳은 당말, 벽오동 나무가 서 있던 곳은 벽동말이었습니다.

지금 5호선 '굽은다리역'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 기억에서 왔습니다.

지하철역 이름 하나가 백 년 넘은 지명을 붙잡고 있는 셈이죠.

천호1동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마을 제사 '벽동제' 역시 벽동말의 흔적입니다.

천 호의 예언이 이름이 되기까지

곡교리가 '천호동'이 된 건 1963년 1월 1일입니다.

서울시 행정구역이 크게 넓어지면서 구천면이 성동구로 들어왔고, 이때 새 동 이름이 붙었습니다.

강동구청 자료에 따르면, 옛날부터 이곳이 수천 가구가 모여 살 땅이 되리라는 풍수 이야기가 있어 그 뜻을 따 천호(千戶)라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1975년 강남구로, 1979년 지금의 강동구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은 정말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천호동 일대에는 천 가구가 아니라 수만 명이 살고 있으니까요.

관할 표기 안내

이 글의 '천호동'은 현재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범위를 기준으로 한 표기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 당시의 관할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일대였으며, 서울 편입은 1963년의 일입니다.


3.천호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밭은 13필지, 58,334㎡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 21필지 중 13필지, 무려 62%가 밭이었습니다.

면적으로도 49.03%, 국유지의 절반에 거의 닿습니다.

여기서 잠깐, 숫자를 한 번 더 보셔야 합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 넓이는 약 4,487㎡입니다.

논 평균(약 6,013㎡)보다 작고, 임야 평균(12,281㎡)의 3분의 1 남짓입니다.

작은 밭 조각들이 들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 밭이 이렇게 많았을까요?

천호동 일대는 한강이 크게 휘어 도는 자리 바로 아래입니다.

강물이 실어 온 모래와 흙이 오랫동안 쌓인 땅이죠.

물이 잘 빠지는 모래 섞인 흙은 벼보다 콩, 조, 수수, 채소 같은 밭작물에 잘 맞습니다.

그리고 광나루 건너 도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으니, 채소를 내다 팔기도 좋았을 겁니다.

결국 장부 속 '밭 13필지'는 땅의 성질과 사람들의 생계가 함께 남긴 지문입니다.

고고학자가 이 숫자를 보면 바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아래는 강이 만든 퇴적층이구나. 그렇다면 그 사이에 옛사람의 생활면이 끼어 있을 수 있겠다."

한 줄 정리: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밭은 13필지 58,334㎡로, 국유지 면적의 49.03%를 차지한 가장 큰 지목이었습니다.


4.천호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논은 6필지, 36,076㎡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30.32%입니다.

밭보다 필지 수는 절반도 안 되지만, 필지 하나하나는 더 넓었습니다.

평균 약 6,013㎡, 한 배미 한 배미가 꽤 큼직했던 셈이죠.

논이 남긴 흔적은 왜 특별할까요?

논은 물을 가둬야 하는 땅입니다.

그래서 논이 있던 자리는 대개 낮고 평평하며, 물길과 가깝습니다.

굽은다리가 놓였던 그 개울을 떠올려 보세요.

논 6필지는 아마 그런 물줄기를 따라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발굴 현장에서 논은 의외로 보물 창고입니다.

물을 머금은 흙은 산소를 막아, 나무나 씨앗처럼 쉽게 썩는 유기물을 오래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옛 논둑의 선, 수로의 흔적, 볍씨 한 톨까지.

장부 속 '논 6필지'라는 짧은 기록이, 언젠가 시굴 트렌치 안에서 수백 년 농경사를 펼쳐 보일지도 모릅니다.

밭과 논의 면적 차이는 22,258㎡입니다.

천호동 사람들의 밥상이 쌀보다 잡곡과 채소 쪽으로 더 기울어 있었다는 작은 단서이기도 합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논은 6필지 36,076㎡로, 국유지 면적의 30.32%였습니다.


5.천호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임야는 2필지, 24,562㎡였습니다.

필지는 고작 두 개.

그런데 면적은 국유지의 20.65%, 5분의 1이 넘습니다.

필지당 평균 12,281㎡로, 세 지목 가운데 가장 큰 덩어리입니다.

평지 마을에 남은 두 자락의 산

천호동은 대부분 평탄한 동네입니다.

지금 걸어 보면 산이라고 부를 만한 언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임야 2필지가 더 눈길을 끕니다.

강가 평야 속에 솟은 작은 구릉은, 예부터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기대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릉의 능선은 무덤을 쓰기에도, 집터를 잡기에도 좋은 자리였습니다.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옛 지적도에서 임야를 가장 먼저 찾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은 주택가와 상가에 묻혀 형체를 잃었을지라도, 백 년 전 장부는 "여기 산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 한 줄이 조사 범위를 좁혀 주는 나침반이 됩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임야는 2필지 24,562㎡로, 필지 수는 가장 적지만 필지당 면적은 가장 컸습니다.



6.한눈에 보는 천호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지금까지의 숫자를 표 하나로 모았습니다.

저장해 두시면 천호동 역사나 강동구 문화유산 조사를 찾아볼 때 두고두고 쓸 수 있습니다.

표 1.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일대) 국유지 지목별 현황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환산(평)

밭

13

58,334

49.03%

4,487㎡

약 17,646

논

6

36,076

30.32%

6,013㎡

약 10,913

임야

2

24,562

20.65%

12,281㎡

약 7,430

합계

21

118,972

100.00%

5,665㎡

약 35,989

밭 13필지58,334㎡ · 49.03%

논 6필지36,076㎡ · 30.32%

임야 2필지24,562㎡ · 20.65%

그래프 설명: 1912년 천호동 국유지 면적 비중을 막대로 나타낸 것으로, 밭 49.03%, 논 30.32%, 임야 20.65% 순입니다.


표에서 눈여겨볼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필지 수와 면적의 순위가 다릅니다. 임야는 필지 수 꼴찌지만 덩어리 크기는 1등입니다.

둘째, 밭과 논을 합치면 94,410㎡, 국유지의 79.35%가 경작지였습니다.

셋째, 대지가 한 필지도 없습니다. 나라 땅에 사람이 사는 집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검증 노트

필지 합계: 밭 13 + 논 6 + 임야 2 = 21필지로, 제시된 전체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면적 합계: 58,334 + 36,076 + 24,562 = 118,972㎡로, 제시된 총면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차 없음.

비중은 소수 둘째 자리 반올림이며 합계 100.00%입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의 근삿값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천호동 국유지는 대지·도로·분묘지 없이 밭·논·임야 세 지목만으로 이루어진 '순수 농경형' 구성입니다. 그중 밭이 면적 절반(49.03%)에 육박해, 한강 범람원 모래땅의 특성이 숫자로 드러난 사례로 기록합니다.


7.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중요한 이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어요.

"백 년 전 밭이 몇 개였는지가 지금 무슨 상관이지?"

사실,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는 위로 쌓입니다.

아스팔트 아래에는 1970년대 골목이, 그 아래에는 1912년의 밭이랑이, 더 아래에는 조선과 고려, 삼국의 생활면이 겹겹이 누워 있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은 근대적 측량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땅의 사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발의 손이 닿기 직전, 원래 지형과 쓰임새를 고스란히 담고 있죠.

그래서 문화유산 조사기관은 공사 예정지를 검토할 때 옛 지적 자료를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임야였던 자리는 고분이나 건물터 가능성을, 논밭이었던 자리는 농경 유구와 취락 흔적 가능성을 따져 봅니다.

법이 정한 조사의 출발점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는 큰 공사는 땅속 유산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되는 법이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입니다.

세부 절차와 방법은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등이 정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문화재 지표조사', '문화재 발굴'이라는 말을 썼지만, 2024년 국가유산 체제로 바뀌면서 공식 용어도 '매장유산', '국가유산'으로 바뀌었습니다.

검색창에는 여전히 둘 다 쓰이니, 이 글에서는 두 표현을 함께 쓰겠습니다.

이 모든 절차의 맨 앞에 서는 것이 바로 기초자료 조사입니다.

그리고 1912년 국유지 장부는 그 기초자료의 첫 페이지가 됩니다.


8.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천호동에 적용해 보기

매장유산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지표조사땅을 파지 않고 문헌·지형·지표 유물을 살펴 유산 존재 가능성을 판단

표본조사일부 지점만 작게 파서 유물·유구가 있는지 맛보기로 확인

시굴조사트렌치를 넣어 유구의 범위와 깊이,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

발굴조사확인된 범위를 전면적으로 조사해 기록하고 보존 방안 마련


이제 천호동 장부를 이 네 단계에 대입해 볼게요.

지표조사: 장부에서 지도를 꺼내는 단계

지표조사에서는 1912년 국유지 21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도 위에 하나씩 옮겨 봅니다.

특히 임야 2필지는 별도 표시를 해 둡니다.

평지 한가운데 있던 구릉이라면, 매장유산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꼭 짚어 봐야 할 지점이니까요.

표본조사: 밭 아래를 살짝 엿보기

밭 13필지처럼 넓게 흩어진 땅은 표본조사로 효율을 높입니다.

강이 쌓은 퇴적층 사이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끼어 있는지, 작은 구덩이 몇 개로 먼저 확인하는 것이죠.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논둑 아래의 시간

논 6필지가 있던 낮은 땅에서 유물이 나온다면 시굴조사로 넘어갑니다.

긴 트렌치를 넣어 층위를 읽고, 유구가 확인되면 정식 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을 수행하는 곳이 매장유산 조사기관, 흔히 '문화재 발굴기관'이라 부르는 전문 기관입니다.

좋은 기초조사는 쓸데없는 굴착을 줄이고, 공사 일정의 불확실성도 크게 낮춰 줍니다.

땅 주인에게도, 유산에게도 이로운 일입니다.


9.강 건너 이웃이 보여 준 성공 사례: 암사동과 풍납토성

"설마 이 동네 땅 밑에 뭐가 있겠어?"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천호동의 이웃들이 이미 증명했습니다.

암사동, 홍수가 열어 준 6천 년 전 마을

천호동 바로 북쪽, 같은 구천면 땅이던 암사동.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변 모래언덕이 깎여 나가면서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신석기시대 집터들이 확인됐고, 지금은 서울 암사동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강가 모래땅이 수천 년 전 사람들의 마을이었던 겁니다.

천호동의 밭 13필지가 앉아 있던 땅도, 바로 그 한강이 만든 같은 계열의 땅입니다.

풍납토성, 재건축 현장에서 깨어난 백제

천호동 남쪽 풍납동 역시 1912년에는 같은 구천면 마을이었습니다.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 토기와 건물터가 대거 드러났습니다.

그 뒤 이어진 조사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핵심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공사는 멈췄고, 역사는 다시 쓰였습니다.

두 사례가 공통으로 말하는 교훈은 하나입니다.

땅의 과거를 미리 알아 두는 것, 그것이 유산을 지키고 동시에 개발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

천호동 1912년 국유지 기록은, 그 '미리'를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단서입니다.


10.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였나요?

A. 총 21필지, 면적은 118,972㎡(약 35,989평)였습니다.

Q.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3필지 58,334㎡로, 국유지 면적의 49.03%를 차지했습니다.

Q.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6필지 36,076㎡로, 국유지 면적의 30.32%였습니다.

Q. 1912년 천호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임야는 2필지 24,562㎡로, 국유지 면적의 20.65%였습니다.

Q. 1912년 당시 천호동은 어느 행정구역이었나요?

A.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일대였습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며 천호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1979년부터 강동구에 속합니다.

Q. 천호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나요?

A. 이곳이 언젠가 수천 가구가 살 만한 땅이 되리라는 풍수 이야기에서 '천 호(千戶)'를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A. 개발 이전의 지목과 지형을 보여 주므로, 임야·논·밭 위치를 바탕으로 매장유산 존재 가능성을 미리 가늠하고 표본조사·시굴조사 지점을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11.한 줄 결론과 맺음말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당시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국유지는 21필지 118,972㎡였으며, 밭 13필지 58,334㎡, 논 6필지 36,076㎡, 임야 2필지 24,562㎡로 구성되어 밭이 절반에 가까운 농경의 땅이었습니다.

오늘 퇴근길에 천호역을 지나신다면, 잠깐만 발밑을 내려다봐 주세요.

그 아래 어딘가에 백 년 전 누군가 김을 매던 밭이랑이 있습니다.

굽은다리를 건너 장에 가던 발자국이 있고, 홍수를 피해 구릉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몰랐겠지요.

자기가 갈던 그 작은 밭 위에, 언젠가 정말로 천 채의 집이, 아니 수만 개의 불빛이 켜지게 될 줄은.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우리의 몫입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이 땅을 먼저 일군 사람들의 시간을 기억해 주는 일.

숫자 스물한 개로 남은 그들의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고 한 겹씩 읽어 주는 일.

그것이 지표조사의 시작이고, 문화유산을 지키는 가장 따뜻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공사 예정지의 매장유산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필요하신가요?

1912년 토지 기록부터 현장 조사까지, 땅의 이야기를 먼저 읽는 조사가 시행착오를 줄입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더 많은 동네 기록을 만나 보세요: https://www.seoulheritage.org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의 국유지 지목과 면적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1912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 일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지명·연혁 참고: 강동구청 동 유래 및 강동역사 자료(강동구지, 서울지명사전 인용)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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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다리 하나 건너면모래 섞인 밭이 열세 뙈기

물 고인 논 여섯 배미에하늘이 내려와 앉고

들판 한가운데 두 자락 솔숲이홍수의 기억을 지켰다

천 채의 집이 들어서리라던오래된 말은 끝내 이루어져

오늘 그 땅 위로 불빛이 흐른다그 아래, 아직 다 읽지 못한 백 년이 잠들어 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동구 천호동 편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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