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학이 날던 언덕, 다섯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2일 전
-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학이 날던 언덕, 다섯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5필지국유지 전체
14,750㎡총면적 · 약 4,462평
4종지목 구성
69.8%임야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는 국유지 5필지, 총 14,750㎡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2필지 10,297㎡, 논 1필지 2,945㎡, 밭 1필지 862㎡, 대지 1필지 644㎡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69.8%가 임야로, 신길동의 국유지는 마을 뒷산의 나지막한 구릉이 중심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어떤 마을의 국유지 대장은 단 다섯 줄이면 끝났습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양천구 신정동을 기억하시나요.
국유지 31필지, 45만 ㎡가 넘는 갈대벌의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샛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국유지 다섯 필지.
대장 한 페이지도 다 채우지 못하는 짧은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짧은 기록일수록, 읽는 재미는 오히려 진해집니다.
다섯 필지 안에 임야와 논, 밭, 집터가 하나씩 정확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을 하나를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처럼 말입니다.
학이 날아들던 언덕의 마을, 1912년 신길동의 다섯 줄을 지금부터 한 줄씩 읽어 보겠습니다.

목차
한눈에 보는 신길동 국유지 핵심 요약
1912년 신길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신길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임야 2필지 10,297㎡, 마을 뒷산이 국유지가 된 사연
논 1필지 2,945㎡, 단 한 배미의 국유 논
밭 1필지 862㎡와 대지 1필지 644㎡의 기록
이웃 신정동과 비교하면 무엇이 보이나요?
숫자로 다시 보는 신길동 — 표와 그래프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 한눈에 보는 신길동 국유지 핵심 요약
바쁜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14,750㎡, 평수로 환산하면 약 4,462평입니다.
지목은 네 종류입니다.
임야 2필지 10,297㎡, 논 1필지 2,945㎡, 밭 1필지 862㎡, 대지 1필지 644㎡입니다.
면적의 69.8%를 임야가 차지하고, 논이 20.0%, 밭이 5.8%, 대지가 4.4%로 뒤를 잇습니다.
임야, 논, 밭, 대지가 거의 하나씩 갖춰진, 작지만 완결된 구성이 신길동 기록의 매력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국유지 5필지. 본 시리즈에서 다뤄 온 서울의 동네들 가운데 손에 꼽히는 소규모 기록입니다. 바로 앞서 다룬 양천구 신정동의 31필지 453,327㎡와 비교하면 필지 수는 6분의 1, 면적은 약 30분의 1 수준입니다. 반면 임야 비율 69.8%는 구릉지 마을의 전형을 보여 주는 수치로, 저지대 잡종지의 신정동과 완벽한 대칭을 이룹니다.
2. 1912년 신길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신길이라는 이름에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새로울 신 자에 길할 길 자.
새로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이 일대에는 더 오래된 이름도 있습니다.
방학곶, 학을 놓아기르던 물가라는 뜻의 지명이 이 부근 한강가에 전해 내려옵니다.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모래톱과 언덕에 학이 내려앉던 풍경을 상상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시흥군 관할이었습니다.
영등포 들판의 동쪽, 한강 샛강 남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
언덕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언덕 사이 골짜기마다 논과 밭이 들어앉은 전형적인 근교 농촌이었습니다.
큰 벌판의 마을이 아니라, 언덕의 마을.
이 지형의 성격이 국유지 다섯 필지의 구성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3. 신길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신길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50㎡입니다.
축구장 두 개를 조금 넘는 크기입니다.
한 필지의 평균은 2,950㎡, 약 890평입니다.
다섯 필지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길동 땅의 절대다수가 민유지, 곧 마을 사람들의 이름으로 등록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국가 장부에 오른 땅은 뒷산 두 자락과 논 한 배미, 밭 한 뙈기, 집터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국유지가 적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소유 관계가 분명한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 촘촘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 다섯 필지를 하나씩 열어 보겠습니다.
4. 임야 2필지 10,297㎡, 마을 뒷산이 국유지가 된 사연
신길동 국유지의 몸통은 임야입니다.
2필지에 10,297㎡, 전체 면적의 69.8%입니다.
한 필지 평균이 5,149㎡, 1,500평이 넘는 산자락입니다.
조선시대의 산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소유하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서 땔감을 하고, 묘를 쓰고, 버섯과 나물을 얻었습니다.
주인 없이 모두가 쓰는 산, 이른바 무주공산의 관행이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과 뒤이은 임야 정리 과정에서 이런 산들은 소유를 입증할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대거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신길동의 임야 두 필지도 그 흐름 속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제까지 온 마을의 산이었던 언덕이, 장부 위에서는 국가의 산이 된 것입니다.
학이 내려앉던 소나무 언덕은 그렇게 다섯 줄 기록의 첫머리에 올랐습니다.
덧붙이자면, 구릉의 마을이라는 성격은 오늘의 신길동에도 이어집니다.
지금도 신길동 일대를 걸어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이지 않는데, 그 언덕길의 뿌리가 바로 1912년 대장 속 임야 두 필지의 지형입니다.

5. 논 1필지 2,945㎡, 단 한 배미의 국유 논
다음 줄은 논입니다.
단 1필지, 2,945㎡.
약 890평짜리 논 한 배미가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20.0%에 해당하는 면적입니다.
구릉지 마을에서 이만한 크기의 논이라면, 골짜기 아래 물이 모이는 가장 좋은 자리였을 것입니다.
국유지가 된 논에서도 농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대개 마을 농민이 소작인으로 등록되어 해마다 모를 내고, 수확의 일부를 소작료로 냈습니다.
봄이면 무논에 하늘이 비치고, 가을이면 벼 이삭이 언덕 그림자 아래로 고개를 숙였을 한 배미.
대장에는 한 줄이지만, 그 한 줄에 기대어 살아간 식구들이 있었습니다.
6. 밭 1필지 862㎡와 대지 1필지 644㎡의 기록
남은 두 줄은 밭과 대지입니다.
밭은 1필지 862㎡, 약 260평입니다.
언덕 자락의 양지바른 비탈에서 보리와 콩, 채소가 자랐을 크기입니다.
그리고 대지 1필지, 644㎡.
약 195평의 집터 하나가 국유지 대장의 마지막 줄을 차지합니다.
흥미로운 우연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글의 신정동에도 국유 대지는 단 1필지 664㎡였습니다.
신길동의 644㎡와 불과 20㎡ 차이.
강을 사이에 둔 두 마을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200평 남짓한 국유 집터 하나씩만을 남긴 셈입니다.
이 644㎡가 어떤 건물의 터였는지 대장은 침묵합니다.
다만 훗날 이 일대에서 조사가 이뤄진다면, 가장 먼저 도면 위에 동그라미가 쳐질 자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7. 이웃 신정동과 비교하면 무엇이 보이나요?
같은 시리즈의 바로 앞 기록과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양천구 신정동은 국유지 31필지 453,327㎡, 그중 86.7%가 저습지의 잡종지였습니다.
영등포구 신길동은 국유지 5필지 14,750㎡, 그중 69.8%가 구릉지의 임야입니다.
하나는 물의 마을, 하나는 언덕의 마을.
안양천과 샛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두 동네의 국유지는 지형이 곧 장부가 된다는 사실을 교과서처럼 보여 줍니다.
저지대 범람원에서는 갈대벌이 잡종지로, 구릉지에서는 마을 뒷산이 임야로 국유지에 편입되었습니다.
백 년 전 측량 기수들이 남긴 숫자들은, 이렇게 서울 서남부의 옛 지형도를 문자로 복원해 줍니다.

8. 숫자로 다시 보는 신길동 — 표와 그래프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장의 표로 정리합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율 | 필지당 평균(㎡) |
임야 | 2필지 | 10,297 | 69.8% | 5,149 |
논 | 1필지 | 2,945 | 20.0% | 2,945 |
밭 | 1필지 | 862 | 5.8% | 862 |
대지 | 1필지 | 644 | 4.4% | 644 |
합계 | 5필지 | 14,750 | 100% | 2,950 |
※ 면적 비율은 소수점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값입니다. 지목별 면적의 단순 합은 14,748㎡로, 제시된 총면적 14,750㎡와 2㎡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세 내용은 아래 검증 노트를 참고해 주세요.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관할이었으며, 현재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일대에 해당합니다.
면적 비율을 그래프로 보면 임야의 무게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임야
69.8%
논
20.0%
밭
5.8%
대지
4.4%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 5필지 14,750㎡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것으로, 임야 2필지 10,297㎡, 논 1필지 2,945㎡, 밭 1필지 862㎡, 대지 1필지 644㎡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9.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검증 노트
본 시리즈는 모든 수치를 프로그램으로 교차 검산한 뒤 공개합니다.
첫째, 필지 수 검증입니다. 임야 2필지, 논 1필지, 밭 1필지, 대지 1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5필지로, 제시된 전체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둘째, 면적 검증입니다. 지목별 면적을 모두 더하면 10,297 + 2,945 + 862 + 644 = 14,748㎡입니다. 제시된 총면적 14,750㎡와 2㎡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원자료 작성 당시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필지별 반올림 값이 누적되며 흔히 생기는 오차로 판단됩니다.
본 시리즈는 이런 차이를 임의로 맞추어 지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기초조사 자료의 생명은 정확성과 투명성이기 때문입니다.
10.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다섯 필지짜리 기록이 문화재 발굴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오히려 작은 기록일수록 조사 현장에서는 더 또렷한 표적이 됩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의 출발점이 기초조사, 곧 옛 기록의 검토입니다.
1912년 대장 속 신길동의 다섯 필지는 조사자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임야 두 자락에는 오래된 묘역과 옛 마을의 뒷산 유적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골짜기의 논 한 배미 아래에는 수백 년 경작의 층위가 쌓여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644㎡의 대지에는 건물의 주춧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기초조사가 만들어 낸 실제 성공 사례들
기록에서 출발한 조사가 실제로 무엇을 찾아냈는지, 세 장면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동대문운동장입니다.
운동장 철거에 앞서 옛 문헌과 지적 기록을 토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조선시대 군영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 이간수문이 땅속에서 온전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핵심 유적 전시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풍납토성입니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진행된 조사가 한성백제 왕성의 실체를 밝혀내며 한국 고대사 연구의 지형을 바꿨습니다.
기록 검토와 시굴조사가 없었다면 2천 년 왕성은 지금도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 2021년 인사동입니다.
재개발 부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에 담긴 채 쏟아져 나왔습니다.
정식 조사 절차가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실물을 서울 한복판에서 되찾아 낸 순간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분모는 단순합니다.
흙을 파기 전에 기록을 먼저 팠다는 것.
오늘 정리한 신길동의 다섯 줄도, 언젠가 이 언덕에서 시작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첫 페이지가 되기 위해 여기 남겨 둡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총 5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14,750㎡로, 약 4,462평에 해당합니다.
Q2. 1912년 신길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임야입니다. 2필지 10,297㎡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69.8%를 차지했습니다. 마을 뒷산의 구릉이 국유지로 편입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Q3. 1912년 신길동 국유지 중 논과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논은 1필지 2,945㎡, 밭은 1필지 862㎡였습니다. 경작지를 합치면 2필지 3,807㎡로 전체 면적의 25.8%였습니다.
Q4. 대지 1필지 644㎡는 어떤 땅이었나요?신길동의 유일한 국유 집터입니다. 약 195평 규모로, 어떤 건물의 터였는지는 대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향후 문화유산 조사에서 우선 검토 대상이 되는 지점입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되는 기초조사의 핵심 문헌 자료입니다. 옛 집터와 경작지, 산림의 위치를 필지 단위로 파악해 조사 범위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활용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 총 5필지 14,750㎡였으며,
임야 2필지 · 논 1필지 · 밭 1필지 · 대지 1필지로 구성되어
전체 면적의 69.8%가 마을 뒷산의 임야였습니다.
개발 예정 부지의 문화유산 조사가 필요하신가요?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백 년의 기록을 읽는 것에서 시작하는 정확한 기초조사를 제공합니다.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현재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일대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신길동#영등포구신길동#신길동국유지#토지조사사업#문화재발굴#문화재발굴기관#문화재지표조사#문화유산지표조사#발굴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매장유산#서울역사#영등포구역사#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큰 장부는 큰 마을을 말하고
작은 장부는 깊은 마을을 말한다.
다섯 줄의 기록 속에
산 두 자락, 논 한 배미,
밭 한 뙈기, 집터 하나.
학은 떠났어도 언덕은 남아
오늘도 누군가의 오르막길이 된다.
당신이 오르는 그 골목의 경사가
백십사 년 전 대장의 첫 줄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