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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영등포구 도림동

  • 5월 25일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영등포구 도림동

논밭 사이로 기차가 달리던 땅 —1912년 도림동 국유지 18필지가 품은여섯 가지 이야기

208,833㎡, 18필지. 그리고 무려 여섯 가지 지목. 잡종지, 철도용지, 논, 임야, 밭, 분묘지. 경부선이 막 달리기 시작하던 1912년, 도림동 국유지는 조선의 끝과 근대의 시작이 충돌하는 가장 극적인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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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도야미리에서 도림동으로 — 이름 속의 역사

  • 18필지 208,833㎡ — 규모가 말하는 것

  • 잡종지 159,746㎡ — 전체의 76%를 차지한 거대한 땅

  • 철도용지 15,890㎡ — 기차가 달리던 그 자리

  • 논·밭·임야 — 전통 농경 공간의 흔적

  • 분묘지 1,114㎡ —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거운 기록

  • 문화재 지표조사와 이 기록의 관계

  • 성공 사례 — 영등포 땅이 꺼낸 역사들

  • 1912년 도림동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

기차 소리와 소 울음소리가 뒤섞이던 땅. 1912년 도림동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경부선이 이미 달리고 있었고, 논과 밭은 아직 남아 있었고, 누군가의 무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영등포구 도림동. 지금은 신도림역 동쪽, 경부선 남쪽의 주택 밀집 지역입니다. 하지만 1912년의 도림동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도야미리·원지목리에 속하던 이 동네에, 18필지 208,833㎡의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여섯 가지 지목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드립니다. 끝까지 읽으면, 지금 도림동 땅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도야미리에서 도림동으로 — 이름 속의 역사

도림(道林). 길과 숲. 이 단순한 두 글자 안에 이 동네의 긴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도림'이라는 이름은 옛 지명인 '도야미리(道也味里)'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도야미리 혹은 원지목리에 속해 있었던 이곳은, 한강 남쪽 시흥 일대의 평범한 농경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철도입니다. 1899년 경인선이 노량진-인천 구간을 처음 개통하고, 1905년 경부선이 서울-부산을 연결하면서 영등포 일대는 한반도 철도 교통의 핵심 분기점이 됩니다. 조용한 농촌이던 영등포와 그 주변 도림 일대가 갑자기 근대 산업화의 전선에 서게 된 것입니다.

1912년은 경부선 개통(1905년)으로부터 불과 7년 뒤입니다. 철도가 달리기 시작하자 주변 토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18필지 208,833㎡의 국유지가 도림동에 기록된 것은 바로 이 격동의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2. 18필지 208,833㎡ — 규모가 말하는 것

먼저 숫자를 보겠습니다. 18필지, 208,833㎡. 지금까지 살펴본 서울 각 동네의 국유지 중 단연 가장 큰 규모입니다. 마포구 대흥동 56,654㎡, 양천구 신월동 78,631㎡와 비교해도 도림동은 두 곳을 합친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축구장 29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도림동 국유지 전체208,833㎡18필지 · 6가지 지목 · 축구장 약 29개 면적

이 압도적인 규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1912년 도림동이 국가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지목 구성을 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잡종지159,746㎡5필지 · 76.5%

철도용지15,890㎡1필지 · 7.6%

15,593㎡5필지 · 7.5%

임야11,504㎡3필지 · 5.5%

4,895㎡3필지 · 2.3%

분묘지1,114㎡1필지 · 0.5%

잡종지

159,746㎡ (76.5%)

철도용지

15,890㎡ (7.6%)

15,593㎡ (7.5%)

임야

11,504㎡ (5.5%)

4,895㎡ (2.3%)

분묘지

1,114㎡ (0.5%)


3. 잡종지 159,746㎡ — 전체의 76%를 차지한 거대한 땅

도림동 국유지의 76.5%, 5필지 159,746㎡가 잡종지입니다. 축구장 22개를 합쳐놓은 크기. 이 어마어마한 잡종지는 1912년 도림동의 가장 큰 수수께끼이자 가장 중요한 단서입니다.

잡종지란 특정한 농업적·건물 용도로 분류되지 않는 다목적 토지입니다. 1912년 도림동에서 이 규모의 잡종지가 국유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철도 부설과 함께 이 지역이 급속히 다용도 국가 관리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경부선 개통 이후 영등포 일대에 일본 자본의 공장과 창고, 군사 관련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이 거대한 잡종지가 그 부지로 사용됐거나 예정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철도용지와 거대한 잡종지가 공존하는 이 구성은, 1912년 도림동이 이미 근대 산업 인프라의 전초지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전통 농경 마을이 공업 지대로 탈바꿈하는 첫 번째 흔적이 바로 이 기록 안에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잡종지는 가장 복잡한 지층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농경지처럼 일정한 방식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반복해서 땅을 파고 메우고 구조물을 세우고 허물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래 지층에는 근대 공사 흔적과 그 이전 시대 생활유적이 복층으로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4. 철도용지 15,890㎡ — 기차가 달리던 그 자리

1필지 15,890㎡의 철도용지. 이 기록이 이번 도림동 국유지 자료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선명한 증거입니다. 도림동 한복판에 국유 철도용지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의 도림동 어딘가를 경부선 또는 그 관련 지선이 실제로 지나고 있었음을 직접 증명합니다.

1912년 도림동을 달리던 기차는 무엇인가

1899년 경인선이 노량진-인천 구간을 처음 개통했고, 1905년 경부선이 서울-부산 전 구간을 연결했습니다. 도림동은 경부선의 남쪽에 위치하며, 좌측은 신도림역(도림천 건너편), 우측은 영등포역과 가깝습니다. 1912년 철도용지 15,890㎡는 영등포역에서 이어지는 경부선 선로 부지, 또는 그 부속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영등포는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으로, 철도 인프라가 가장 빠르게 확장되던 지역이었습니다.

경부선의 역사를 잠깐 되짚겠습니다. 1901년 일본 자본의 경부철도 주식회사가 서울 영등포에서 기공식을 열었고, 1905년 1월 1일 전 노선 운행이 시작됐습니다. 이 철도는 군사적, 경제적 목적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에 강요한 노선이었습니다. 철도 건설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고, 연선 토지가 강제 수용됩니다. 1912년 도림동의 철도용지 15,890㎡는 바로 그 역사적 흔적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철도용지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근대 산업 문화유산으로서, 선로 기초 구조물, 침목 매설 흔적, 철도 관련 시설물의 기초 등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철도 부지 아래, 즉 철도 건설 이전 시대의 지층에는 그 이전 농경 문화 또는 더 오래된 시대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 논·밭·임야 — 전통 농경 공간의 흔적

철도용지와 잡종지의 압도적인 존재감 뒤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전통 농경지들이 있습니다. 논 5필지 15,593㎡, 밭 3필지 4,895㎡, 임야 3필지 11,504㎡. 이 세 지목이 합쳐 31,992㎡로 전체의 15.3%를 차지합니다.

논 + 밭 합계

20,488㎡

8필지 · 전통 농경지

임야

11,504㎡

3필지 · 산림 지역

이 농경지와 임야의 존재는 1912년 도림동이 이미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아직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잡종지와 철도용지 옆에 논과 밭과 숲이 공존하는 이 풍경. 전통과 근대가 같은 땅 위에서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의 모습입니다.

임야 3필지 11,504㎡는 도림동 어딘가의 구릉 지대였을 것입니다. 철도와 공장 부지로 평지가 빠르게 전용되는 상황에서도, 구릉 위 임야는 상대적으로 오래 원형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임야 지층에는 철도 이전 시대의 생활유적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6. 분묘지 1,114㎡ —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거운 기록

마지막으로, 가장 작지만 가장 묵직한 지목. 분묘지 1필지 1,114㎡입니다. 전체의 0.5%에 불과한 이 작은 땅이, 어쩌면 이 기록 전체에서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분묘지는 무덤이 있는 땅입니다. 국유 분묘지라는 것은 국가가 관리하는 묘지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묘지였을 수도 있고, 공무 중 사망한 관리나 군인의 묘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인근 철도 공사 관련 사망자의 묘지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철도가 들어서고 공업화가 시작되던 그 격동의 시기. 그 땅의 어느 구석에 1,114㎡짜리 국유 무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차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분묘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항상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유골과 부장품, 묘비, 석물 등 소중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 기록의 공백을 채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이 기록의 관계

1912년 도림동 국유지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여섯 가지 지목이 각각 다른 방식의 조사 접근법을 필요로 합니다.

잡종지와 철도용지 구역은 근대 산업 문화유산 조사의 대상입니다. 경부선 선로 기초, 침목, 철도 관련 구조물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으며, 그 아래 지층에는 철도 건설 이전 시대의 농경 유적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이 구역에서의 조사는 근대 고고학(Industrial Archaeology) 기법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논과 밭 구역은 습지 고고학과 건식 지층 분석을 각각 적용합니다. 논 지층은 수분 보존 환경으로 인해 유기물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밭 지층은 깊이에 따른 층위 분석이 중요합니다. 임야 구역은 구릉지 고고학 기법으로 접근하며, 분묘지 구역은 묘제 분석과 유골 감정을 포함하는 특수 조사가 필요합니다.

seoulheritage.org가 영등포구 영등포동, 양평동, 신길동에 이어 도림동 조사 자료를 축적하는 것은, 영등포구 전체 역사 지층 지도를 완성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특히 도림동처럼 여섯 가지 지목이 혼재하는 복합적인 공간은, 단순한 농촌 지역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층적인 역사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8. 성공 사례 — 영등포 땅이 꺼낸 역사들

성공 사례 1

문래동 철강골목 — 근대 산업 문화유산의 현장

도림동 바로 인근인 문래동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철강골목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경부선과 함께 들어선 공업 시설의 흔적입니다. 근대 산업 시설이 문화유산으로 재인식되면서, 철도와 공업화의 역사가 쌓인 도림동 일대의 조사 중요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습니다. 1912년 철도용지 기록은 이 근대 산업 문화유산의 뿌리를 추적하는 핵심 자료입니다.

성공 사례 2

seoulheritage.org 영등포구 지역조사 — 1912년 영등포의 숨은 역사

seoulheritage.org는 영등포구 영등포동, 양평동, 신길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연속으로 분석하고 공개해왔습니다. 그 결과 영등포 일대가 1912년에 이미 철도와 상업 인프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근대화되고 있었음이 확인됐습니다. 도림동 기록은 이 연구 시리즈의 핵심 퍼즐 조각으로, 특히 잡종지와 철도용지의 대규모 존재가 영등포구 근대화의 지형을 완성시켜줍니다.

성공 사례 3

경성방직 자리 — 공업화의 역사를 담은 부지

영등포 일대에는 경성방직을 비롯해 대선제분 공장 부지 등 일제강점기 공업화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영등포가 공업지역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12년 이전부터 이미 철도용지와 잡종지 형태로 대규모 국유지가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림동의 18필지 208,833㎡는 그 역사의 시작점입니다.



9. 1912년 도림동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

18필지, 208,833㎡, 여섯 가지 지목. 이 기록을 읽고 나면, 1912년 도림동이 어떤 곳이었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기차 연기와 논 냄새가 뒤섞이던 땅, 거대한 잡종지 한켠에 작은 무덤이 조용히 서 있던 땅, 전통 농경과 근대 산업이 충돌하던 바로 그 현장.

첫째, 이 기록은 도림동에서 어떤 개발이나 건축 공사가 진행될 때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근거입니다. 분묘지의 존재, 논과 임야의 유물 보존 가능성, 그리고 철도용지와 잡종지 아래에 숨은 근대 문화유산의 가능성까지. 이 여섯 가지 지목이 각각의 이유로 조사의 필요성을 웅변합니다.

둘째, 이 기록은 영등포 근대화의 첫 페이지입니다. 1912년 도림동의 잡종지와 철도용지는, 이후 1930년대 영등포가 경성 최대의 공업지대로 성장하는 역사적 토대였습니다. 그 시작점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서울의 근대사를 완성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셋째, 분묘지 1,114㎡라는 기록은 개발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차가 달리고 공장이 들어서던 그 땅 위에, 누군가의 마지막 자리가 조용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덤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것. 그것도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기차 소리와 소 울음소리가 뒤섞이던 1912년,도림동 땅 위에는 조선의 끝과 근대의 시작이 공존했습니다.그 여섯 가지 지목 위에서,우리의 오늘이 자라났습니다.

18필지, 208,833㎡, 여섯 가지 이야기.잡종지의 비밀, 철도용지의 역사, 논밭의 기억, 무덤의 침묵.이 기록 한 장이 영등포 도림동의 100년을 꿰뚫고 있습니다.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그 기억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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