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동구 둔촌동26필지 62,486㎡논·임야·밭이 품은 600년의 비밀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관 완벽 가이드
둔촌 이집(遁村 李集) 선생의 고장 · 강동구 둔촌동
1912년 강동구 둔촌동26필지 62,486㎡논·임야·밭이 품은 600년의 비밀
고려 말 대학자 둔촌 이집이 은거했던 바로 그 땅.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지고 밭이 펼쳐졌던 이 고장에지금 우리가 아직 모르는 역사가 잠들어 있다.
논 35,742㎡ (57.2%)
밭 24,152㎡ (38.6%)
임야 2,591㎡ (4.2%)
26필지
총 필지 수
62,486㎡
총 면적
2,403.3㎡
필지당 평균
1912년
지적 등록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 · 고려 말 대학자
"고려 말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한 선비가 이 땅에 숨어들어 둔촌(遁村)이라 불렀다.그 이름이 600년을 넘어 지금도 살아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지금은 대규모 재건축으로 주목받는 이 동네의 이름은, 고려 말 대학자 둔촌 이집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마을 이름을 '둔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 1912년 이 땅의 국유지 26필지 62,486㎡에는 논(57.2%), 밭(38.6%), 임야(4.2%)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600년 역사의 선비 마을, 그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지금부터 파헤친다.
목차 — Table of Contents
011912년 둔촌동 국유지 통계 — 논·임야·밭 26필지의 진실
02둔촌동이란 어디인가 — 둔촌 이집과 600년 마을의 역사
03논·임야·밭 각각의 발굴 가치 — 토지 유형별 분석
04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선비 마을 터를 읽는 법
05표본·시굴·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06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07실제 성공 사례 — 둔촌의 땅이 꺼낸 역사들
08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01핵심 통계
1912년 둔촌동 국유지 통계 — 논·임야·밭 26필지의 진실

62,486㎡ — 축구장 약 8.8개 면적 · 26필지
논 14필지 · 57.2%밭 11필지 · 38.6%임야 1필지 · 4.2%
🌾
논 (畓)
14필지
35,742㎡ · 전체 57.2%
필지당 평균 2,553㎡
🌱
밭 (田)
11필지
24,152㎡ · 전체 38.6%
필지당 평균 2,195㎡
🌲
임야 (林野)
1필지
2,591㎡ · 전체 4.2%
단독 필지
26필지
총 필지
2,403.3㎡
필지당 평균
57.2%
논 비율
1912년
지적 등록
토지 유형별 면적 비율 (총 62,486㎡)
🌾논
57.2%35,742㎡
🌱밭
38.6%24,152㎡
🌲임야
4.2%2,591㎡
서울 국유지 논 비율 비교 — 둔촌동의 위치
둔촌동
논 57.2%
57.2%
삼성동
논 27.8%
27.8%
녹번동
임야 66%
66.0%
후암동
밭 82.9%
82.9%
이 통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논의 압도적 비중이다. 14필지 35,742㎡, 전체의 57.2%가 논이었다. 필지당 평균 2,553㎡에 달하는 논은 소규모 자작농의 논배미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관리되던 국유 수전(水田) 지대였을 것이다. 둔촌동이 성내천과 가까운 저지대 평야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이 논들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전통 수리 농업의 산물이었다.
11필지 24,152㎡의 밭은 전체의 38.6%를 차지하며, 논과 함께 이 마을 농경지의 핵심 축을 이루었다. 논과 밭의 비율이 57대 39로 비교적 균형 잡혀 있다는 점은 이 지역이 수전과 전작을 함께 운영하는 복합 농업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필지 2,591㎡의 임야는 규모는 작지만, 이 마을의 생태 환경을 완성하는 요소다. 마을 뒤편 구릉지에 자리 잡았을 이 작은 숲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 자원과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을 보호하는 배산(背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02역사 배경
둔촌동이란 어디인가 — 둔촌 이집과 600년 마을의 역사

둔
촌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년 ~ 1387년 · 고려 말 대학자 · 은거 문인
고려 말 공민왕~우왕 시대의 대학자이자 문인. 원나라 지배와 고려 왕조의 혼란을 피해 이곳 한강 동쪽 숲과 논밭이 어우러진 마을에 은거하며 스스로 호를 '둔촌(遁村, 마을에 숨어든 사람)'이라 지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마을 이름은 600년을 넘어 지금도 '둔촌동'으로 불린다. 한 선비의 은거가 영원한 지명이 된 놀라운 이야기.
둔촌동(遁村洞)의 이름이 이집 선생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 마을의 역사적 깊이를 단번에 설명해준다. 600년 전 한 고려 선비가 은거를 선택한 땅. 그것은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고려 말의 정치적 격동과 지식인의 고뇌,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 했던 한 인간의 삶이 새겨진 특별한 공간이었다.
지리적으로 둔촌동은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城內川) 유역에 위치한다. 이 하천은 마을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했고, 전체 국유지의 57.2%가 논이었던 배경이 됐다. 주변의 완만한 구릉지는 임야를 형성했고, 그 사이사이 밭이 펼쳐졌다. 논·밭·임야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이 지형이 바로 이집 선생이 은거지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1912년 당시 둔촌동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둔촌리였다. 조선시대 내내 성내천변의 조용한 농촌 마을로 이어져 오다, 일제강점기에 지적 등록이 이루어지면서 26필지 62,486㎡의 국유지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 국유지가 어떤 연유로 국가 소유로 등록되었는지도 흥미로운 역사 연구의 대상이다. 둔촌 이집 선생의 후손들이 살던 마을이 어떤 경위로 국유지가 되었는지, 그 안에는 조선~일제 전환기의 복잡한 토지 역사가 담겨 있다.
나라가 기울어도 땅은 남는다. 이집 선생이 은거한 그 논밭은 600년을 버텼다. 조선이 오고, 일제가 오고, 아파트가 들어서도, 그 땅 아래 선비의 발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03유형별 분석
논·임야·밭 각각의 발굴 가치 — 토지 유형별 분석

🌾
논 (畓) — 57.2%
35,742㎡
수분 보존으로 목재·씨앗·유기물 보존 탁월. 논두렁·수로 유구로 고대 수리 기술 복원 가능. 성내천 수계와 연결된 관개 체계 흔적 기대.
🌱
밭 (田) — 38.6%
24,152㎡
고려~조선시대 도자기·기와·철기 파편 분포 기대. 경작층 아래 원지형 층에서 더 이른 시기 유구 가능성. 선비 마을 생활사 자료 풍부.
🌲
임야 (林野) — 4.2%
2,591㎡
마을 뒤편 배산 역할. 고려~조선 분묘 유구 가능성. 인위적 교란 없어 보존 상태 양호. 둔촌 이집 관련 유구 접근 가능성.
세 유형 중 가장 독특한 발굴 가치를 지닌 것은 단연 논(畓)이다. 성내천 유역 저지대에 형성된 35,742㎡의 논은 수백 년간 물이 고이는 환경 속에서 유기물이 보존될 수 있는 혐기성 조건을 만들어왔다. 이런 환경에서는 볍씨, 농기구 자루, 짚 엮기 흔적, 심지어 당시 사람들의 옷감 조각까지 원형에 가깝게 출토되는 기적 같은 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고려 말 이집 선생이 은거하던 시절의 볍씨가 이 논 아래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역사책 어디에도 없는 600년 전 둔촌동의 첫 번째 증언이 될 것이다.
임야 2,591㎡는 면적은 작지만 발굴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수다. 마을 뒤편 구릉지를 덮은 이 작은 숲은 오랜 세월 인위적 교란 없이 유지되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조선시대 분묘(墳墓) 유구가 이 임야 안에 잠들어 있을 수 있으며, 극히 드문 경우에는 둔촌 이집 선생 또는 그 후손들과 관련된 유구가 발견될 수도 있다. 단 1필지에 불과하지만, 이 임야는 62,486㎡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역사적 내러티브를 품고 있다.
💡 둔촌동 발굴의 핵심 포인트 — 이집 선생 관련 유구
둔촌 이집 선생(1327~1387)이 이 마을에 은거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고려 말 지식인 문화와 관련된 유구·유물이 이 땅 아래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문방구(文房具), 서책 관련 유물, 선비 생활 도구, 제사 관련 유물 등이 대지 혹은 임야 구간에서 출토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농촌 발굴을 훨씬 넘어서는 역사적 발견이 될 것이다.
04조사 방법론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선비 마을 터를 읽는 방법
둔촌동처럼 역사 인물과 직접 연결된 마을의 지표조사는 일반 농경지 조사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히 "유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을 넘어, "어떤 유물이 어디에, 어떤 맥락에서 있는가"를 미리 예측하는 역사 해석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지표조사의 첫 번째 단계는 문헌 분석이다. 둔촌 이집 선생 관련 문헌, 고려 말~조선 초 광주목 읍지, 성내천 수리 기록 등을 종합 분석해 이 26필지의 역사적 용도와 공간적 맥락을 파악한다. 특히 이집 선생의 호 '둔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가 실제 거주했던 위치가 현재 어느 필지와 대응하는지를 문헌을 통해 최대한 좁혀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성내천 유역 수리 지형 분석이다. 논 35,742㎡를 가능하게 했던 관개 체계의 흔적을 위성사진과 지형도로 추적한다. 세 번째는 현장 지표 조사로, 26필지 전체를 격자 방식으로 순회하며 기와 파편, 도자기 조각, 석재 분포를 기록한다.
1
둔촌 이집 관련 문헌 분석 및 고려 말 역사 맥락 파악
이집 선생의 문집, 행장(行狀), 광주목·구천면 읍지, 조선시대 지리지 등을 분석해 선비 마을의 공간 구성과 역사적 위치를 확인한다. 현 지번과 역사 기록의 대조가 핵심이다.
2
성내천 수계 분석 및 논 관개 체계 복원
성내천과 연결된 고대 수로망의 흔적을 항공사진·위성사진으로 추적한다. 14필지 35,742㎡ 논을 가능케 한 관개 체계의 원형을 복원하면 이 지역 농업사의 새 장이 열린다.
3
임야 구간 집중 지표 조사 — 고려 분묘 흔적 탐색
1필지 2,591㎡ 임야는 분묘 유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간이다. 지표 석재 분포, 봉분 흔적, 석물 파편 등을 집중 조사하여 고려~조선시대 분묘군의 존재 여부를 파악한다.
4
26필지 전체 격자 지표 조사 및 유물 분포 지도 작성
논·밭·임야 전 구간을 격자로 나누어 표면 유물 분포를 체계적으로 기록한다. 고려 청자 파편이나 분청사기 조각이 발견되는 구간은 발굴 1순위 후보가 된다.
05발굴 단계
표본·시굴·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62,486㎡는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인 3만 제곱미터를 두 배 이상 초과하는 면적이다. 이 규모에서의 발굴조사는 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밟아가야 한다. 특히 둔촌동처럼 고려 말 역사 인물과 연결된 마을에서는 각 단계마다 역사 전문가와 고고학자가 협업하는 학제 간 접근이 필수다.
표본조사는 62,486㎡의 2% 이내, 최대 1,249.7㎡에서 진행된다. 논, 밭, 임야 세 유형 각각에서 대표 구간을 선정해 탐색 트렌치를 파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 논 구간 트렌치에서는 퇴적층의 구성과 두께를, 밭 구간에서는 유물 밀도와 원지형 층의 깊이를, 임야 구간에서는 석재 분포와 봉분 흔적의 잔존 여부를 우선 확인한다.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10%까지, 6,248㎡를 확장 조사한다. 이 단계에서 마을 전체의 역사 층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고려 청자가 섞인 지층이 확인된다면, 이집 선생이 살았던 시기(14세기)의 생활 유구에 도달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발굴은 단순한 문화재 조사를 넘어 고려 말 지식인 마을의 실체를 최초로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적 프로젝트로 격상된다.
정밀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선비 마을의 건물 기단, 우물, 담장, 문간채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텍스트로만 전해지던 이집 선생의 은거 생활을 눈앞에서 재현하는 순간이다. 역사책이 말로 설명하는 것을 땅이 직접 보여주는 그 순간, 발굴조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완성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오고, 일제가 오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모든 격변 아래에서도 둔촌 이집 선생이 걸었던 논두렁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굴은 그 기억에 처음으로 형체를 주는 일이다.
06기관 안내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둔촌동 국유지 발굴조사는 단순한 토지 개발 사전 조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사안이다. 고려 말 역사 인물과 연결된 600년 마을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이 조사는, 국가유산청 등록 전문기관 중에서도 중세 고고학(고려~조선시대 발굴)에 특화된 경험을 가진 기관이 담당해야 한다. 특히 논 발굴에서 필요한 습지 고고학 기법과 고려 청자·분청사기 유물 판독 능력이 핵심 역량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둔촌동처럼 역사 인물과 연결된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가진 서울 각 지역의 국유지 기록을 분석하며, 그 발굴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둔촌동 26필지 62,486㎡는 이 시리즈에서 다룬 어떤 지역보다도 뚜렷한 역사 인물 관련 발굴 가능성을 가진 곳으로 특별히 주목받고 있다.
기관 선정 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국가유산청 정식 등록 여부, 고려~조선 중세 유적 발굴 경험, 논·습지 발굴 전문성, 역사 인물 관련 유구 조사 경험, 그리고 62,486㎡ 규모의 대면적 조사 수행 능력이다. 둔촌동처럼 역사적 의미가 명확한 지역의 발굴은 단 한 번뿐인 기회다. 처음부터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한다.
성공 사례 — 강동구 암사동 선사주거지 발굴
강동구에서 진행된 암사동 신석기시대 선사주거지 발굴은 서울 동부 지역 발굴의 대표 성공 사례다. 한강 유역 특유의 충적 토양 환경에서 수천 년 된 유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이 사례는, 같은 강동구에 위치한 둔촌동 논·밭 발굴에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보존 상태의 유구를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공 사례 — 경기도 광주 고려~조선시대 선비 마을 발굴 (참고 사례)
광주군 일대에서 진행된 고려~조선 전환기 선비 마을 발굴에서는 고려 청자·분청사기와 함께 건물 기단, 우물, 담장 등 마을 생활 공간이 복합적으로 확인되었다. 같은 광주군 소속이었던 둔촌동의 발굴에서도 이와 유사한,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구가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07성공 사례
실제 성공 사례 — 둔촌의 땅이 꺼낸 역사들

둔촌동 주변 강동구 일대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놀라운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암사동 선사주거지다.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 집터가 원형 그대로 발견된 이 유적은, 강동구의 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잘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지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다. 같은 강동구에 위치한 둔촌동도 그 보존의 가능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결과다. 대규모 재건축 공사 전 조사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구 흔적이 확인되었다. 기와 파편, 도자기 조각, 건물 기단의 흔적들이 이 마을에 오랜 역사적 생활 층위가 존재함을 입증했다. 국유지 26필지 62,486㎡는 그 조사 구역과 맞닿아 있거나 일부 겹칠 가능성이 있으며, 미조사 구간에서 더 이른 시기인 고려시대의 유구를 만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가능성은 이집 선생 관련 유구다. 그가 은거했던 14세기 후반의 건물 기단, 우물, 담장, 혹은 그의 서재(書齋)로 사용되었을 공간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한국 고려 말 지식인 문화의 물리적 증거를 최초로 발굴하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문헌 속에만 존재했던 '둔촌'의 실체가 땅 위로 올라오는 그 순간을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08행동 촉구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이 글을 끝까지 읽어온 당신은 이제 '둔촌동'이라는 이름을 다르게 들을 것이다. 부동산 뉴스에서 들리던 재건축 단지 이름이 아니라, 600년 전 고려의 선비가 나라의 혼란을 피해 숨어든 그 논밭의 이름으로. 그 논밭이 지금 이 순간에도 26필지 62,486㎡의 땅속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만약 당신이 강동구 둔촌동이나 인근 지역에서 건설·개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62,486㎡는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인 3만 제곱미터를 두 배 이상 초과한다. 착공 전 국가유산청 및 서울시와 사전 협의는 법적 의무이자 역사를 지키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법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이집 선생이 떠나면서 이 마을에 남긴 것은 이름 하나뿐이 아니었다. 그가 걸었던 논두렁, 바라보았던 하늘, 새벽 성내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던 그 공간이 땅속에 있다. 그 공간을 꺼내 이 시대와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둔촌동'이라는 이름에 진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이다.
600년 전 이집 선생은 이 마을에 숨어들어 '둔촌'이라 불렀다. 600년 후 우리는 이 마을의 땅속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발굴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지금도 둔촌동처럼 특별한 역사적 맥락을 가진 서울 각 지역의 국유지 기록을 한 필지씩 분석하며 잠든 역사를 찾아가고 있다. 1912년 강동구 둔촌동 62,486㎡의 이야기는 아직 절반도 들리지 않았다. 나머지는 첫 번째 삽이 그 논 아래를 열 때, 비로소 시작된다.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필요하신가요?
둔촌동처럼 역사 인물과 연결된 고려~조선 마을 터의 발굴은 한 번의 기회뿐입니다. 착공 전 반드시 전문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에 먼저 문의하세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국가유산청 등록 전문기관 정보와 절차를 안내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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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저물던 가을,한 선비가 이 논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나라는 흔들려도 땅은 남는다고,씨앗은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난다고.600년이 지난 지금,그 논길이 우리에게 같은 말을 건넨다.잊혀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둔촌 이집이 걸었던 그 땅이 지금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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