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이었던 그 땅,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1912년 동대문구 용두동 국유지 70,919㎡의 기록
- 5월 28일
- 6분 분량
문화재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용두동 역사
밭이었던 그 땅,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1912년 동대문구 용두동 국유지 70,919㎡의 기록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지금은 도심 한복판 주거·상업 밀집 지역이지만112년 전 이 땅의 63%는 드넓은 밭이었습니다.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기준연도 1912년문화유산 발굴·지표조사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국유지
70,919㎡
16필지 총 면적
대지 (7필지)
6,449㎡
전체 약 9.1%
임야 (3필지)
19,729㎡
전체 약 27.8%
밭 (6필지)
44,740㎡
전체 약 63.1%
목 차
01도심 한복판에 밭이 있었다 — 낯선 진실
021912년 용두동 국유지 16필지의 실체
0344,740㎡의 밭이 말해주는 것 — 농경지 아래 숨겨진 역사
04임야 19,729㎡와 대지 6,449㎡ — 각각 무엇을 품고 있나
05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이해
06동대문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07지금 이 기록이 왜 중요한가
01도심 한복판에 밭이 있었다 — 낯선 진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콘크리트 바닥, 그 아래에 누군가 씨앗을 뿌렸던 흙이 잠들어 있습니다.
동대문구 용두동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주택가와 소규모 상업시설이 촘촘하게 들어선, 전형적인 서울 구도심의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청계천 지류가 흐르고, 오래된 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그 동네 말이죠.
그런데 112년 전, 1912년의 용두동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의 1912년 지적원도 기초조사에 따르면, 당시 용두동에는 총 16필지 70,919㎡의 국유지가 있었고 그 중 무려 63.1%인 44,740㎡가 밭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 도심 한복판이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드넓은 농경지였다는 사실, 놀랍지 않으신가요?

이것이 단순한 역사 퀴즈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농경지였던 땅은 오랜 세월 경작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토층 아래에 생활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조선시대 농경 도구, 생활 토기, 우물 유구(遺構) 등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seoulheritage.org는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간다"는 사명 아래 서울 전 지역의 1912년 국유지를 체계적으로 조사·기록하고 있습니다.
021912년 용두동 국유지 16필지의 실체
숫자 하나하나가 역사의 증거입니다. 1912년 용두동 국유지 전체 현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목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대지 (건물 부지) | 7필지 | 6,449㎡ | 약 9.1% |
임야 (산림지) | 3필지 | 19,729㎡ | 약 27.8% |
밭 (농경지) | 6필지 | 44,740㎡ | 약 63.1% |
합계 | 16필지 | 70,919㎡ | 100% |
밭 (농경지)44,740㎡ · 63.1%
임야 (산림지)19,729㎡ · 27.8%
대지 (건물 부지)6,449㎡ · 9.1%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지목의 다양성입니다. 총 16필지 중 대지 7필지, 임야 3필지, 밭 6필지로 세 가지 지목이 섞여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단순한 농경 지대가 아니라 건물이 들어선 생활 거주 공간과 야산 지형이 함께 공존하던 복합적인 환경이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대지 7필지가 가장 많은 필지 수를 차지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면적은 6,449㎡로 전체의 9.1%에 불과하지만, 필지 수 기준으로는 가장 많습니다. 이는 각 필지가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여러 공공시설이나 관아 관련 건물들이 용두동 일대에 작은 규모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0344,740㎡의 밭이 말해주는 것 — 농경지 아래 숨겨진 역사
밭 6필지 44,740㎡. 이 숫자를 실감하려면 규모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면적은 표준 축구장 약 6.3개에 해당하는 크기입니다. 지금 용두동의 번화한 도로와 건물들이 들어선 그 자리에, 한 세기 전에는 이만한 크기의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유산 조사의 관점에서 농경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농경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토지는 지표면 아래 토층에 다양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작 과정에서 땅이 계속 뒤집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정 깊이 이하의 토층은 오히려 교란 없이 보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두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 동쪽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조선시대 도성 근방의 농경지에서는 생활 토기류, 청동 유물, 우물 유구 등이 빈번하게 출토되어 왔습니다. 특히 청계천 지류가 흐르던 이 지역은 물 접근이 용이한 탓에 일찍부터 사람이 정착해 농경과 생활을 영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매장유산 지표조사 전문기관들은 과거 농경지였던 구역을 조사 우선 순위에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표에서 기와 조각, 도기 파편, 석재가 발견되는 빈도가 다른 지목의 토지에 비해 높기 때문입니다. 44,740㎡에 달하는 이 밭 지역도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먼저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농경지 아래의 토층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씨앗이 뿌려졌던 그 흙 안에 조선 사람들의 일상이 켜켜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04임야 19,729㎡와 대지 6,449㎡ — 각각 무엇을 품고 있나
밭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임야 3필지 19,729㎡입니다. 전체의 27.8%에 해당하는 이 산림 지역은 용두동의 지형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임야 구역의 역사적 의미
조선시대 한양 외곽의 임야는 단순한 산림이 아니었습니다. 관아에서 직접 관리하던 제사 준비용 산림, 땔감 공급지, 혹은 묘역(墓域)으로 활용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유 임야라는 점에서 민간 소유지보다 훨씬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관련 유구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을 확률도 올라갑니다.
대지 구역의 역사적 의미
7필지 6,449㎡의 대지는 면적은 작지만 역사적 밀도는 가장 높은 구역입니다. 건물이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기 때문에 초석, 기단, 배수로, 담장 기초 등 다양한 건물 관련 유구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유 대지였다는 점은 관청, 군사 시설, 혹은 왕실 관련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용두동의 '용두(龍頭)'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지형적 특성을 가진 곳에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의미 있는 시설물이 들어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야 지역의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제단이나 사당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이는 문화유산 보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05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이해
용두동 국유지처럼 역사적 가치가 잠재된 땅에 개발 사업이 진행될 때는 반드시 문화재 조사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과 협력하여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토지 소유자와 개발 사업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처음 시작되는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전혀 파지 않고 진행하는 비침습적(非侵襲的) 조사입니다. 지표면에 노출된 유물이나 유적의 흔적, 문헌 기록, 고지도, 항공사진 분석 등을 통해 해당 구역에 매장 문화유산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용두동처럼 1912년 지적원도에 다양한 지목이 복합적으로 기록된 구역은 지표조사에서 유물 발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됩니다.
지표조사 이후 유적 존재 가능성이 인정되면 표본조사로 넘어갑니다. 조사 대상 면적의 2% 이내에서 소규모 굴착을 실시하여 유물의 종류와 분포를 표본적으로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이 조사는 국가유산청 허가 없이 지자체의 지시로 진행할 수 있어 신속한 대응이 가능합니다.
표본조사에서 유적이 확인되면 시굴조사를 진행합니다. 조사 면적의 10% 이내에서 트렌치(도랑) 방식으로 굴착하여 유적의 층위 구조와 분포 범위를 파악합니다. 시굴조사는 정밀발굴조사의 범위와 방법을 결정하는 핵심 근거를 만드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밀발굴조사는 유적이 확인된 구역에 대해 전면적인 굴착을 실시하여 유물을 수습하고 기록하는 가장 심층적인 단계입니다. 전문 매장문화유산 조사기관이 국가유산청의 정식 허가를 받아 진행하며, 출토된 유물은 국가 귀속 처리 후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됩니다.
조사 단계 | 굴착 여부 | 범위 | 허가 필요 |
문화재 지표조사 | 없음 (육안·문헌) | 전 구역 | 불필요 |
표본조사 | 소규모 굴착 | 2% 이내 | 지자체 지시 |
시굴조사 | 트렌치 굴착 | 10% 이내 | 지자체 지시 |
정밀발굴조사 | 전면 굴착 | 유적 구역 전체 | 국가유산청 허가 |
용두동 국유지 70,919㎡의 경우, 특히 대지 7필지 구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우선적으로 실시하고, 밭 6필지와 임야 3필지에 대해서는 구역별 특성에 맞춘 조사 설계가 필요합니다. 지목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조사 접근법도 다양해야 합니다.
06동대문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성공 사례 — 서울 한양도성 성벽 발굴 (동대문 인근)
동대문구 인근의 한양도성 구간에서는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성벽 축조 기법의 변천사가 확인되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이 성과가 공식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현재 한양도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의 핵심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 청계천 복원 구간 수중·지표조사
용두동 인근을 흐르는 청계천 복원 사업(2003~2005) 당시 진행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는 조선시대 수리 시설, 빨래터 유구, 생활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 성과는 청계천 일대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조선 서민들의 생활 문화가 집약된 역사 공간이었음을 입증했으며, 이후 주변 지역 개발 시 문화재 조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사례입니다.
두 사례 모두 공통된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금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도심의 땅도,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거치면 예상치 못한 역사적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두동의 밭 44,740㎡ 아래에도, 조선 사람들이 물 긷고 씨앗 뿌리던 그 일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에 임합니다. 예단하지 않고, 증거가 스스로 말하게 두는 것. 그것이 발굴조사의 정직한 태도입니다.
07지금 이 기록이 왜 중요한가
1912년의 지적원도는 단순한 토지 대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땅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용두동의 경우, 대지·임야·밭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는 이 지역이 당시 서울 외곽의 전형적인 도농 복합 생활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동대문구 용두동 일대는 노후 주거지 재개발과 도시 재생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런 개발 흐름 속에서 1912년 국유지 기록이 갖는 의미는 더욱 커집니다. 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이 땅의 역사적 맥락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의 본질적인 역할입니다.

seoulheritage.org에서 진행하는 1912년 서울 국유지 기초조사 프로젝트는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입니다. 동대문구 용두동을 포함하여 서울 25개 구 전체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개발 현장에서 문화재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데이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용두동 일대에 개발 사업을 계획 중이거나, 토지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기관이나 국가유산청에 먼저 문의하는 것이 올바른 첫 걸음입니다. 사전 조사는 비용이 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공사 중 유물이 출토되어 사업 전체가 멈추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한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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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의 그 밭에는 누군가의 손이 닿았던 흙이 있습니다.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수확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모릅니다.하지만 땅은 기억합니다.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 읽는 일입니다.그 일이 계속되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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