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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국유지는 몇 필지? 논·밭·임야 면적 완전 정리

  • 22시간 전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19시간 전

1912년 토지조사사업 · 국유지 기초조사 시리즈 · 동대문구 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왕의 밭이 남긴 12필지 242,602㎡

조선 국왕이 손수 씨앗을 뿌리던 적전(籍田)의 후손 — 논·밭·임야 지목별 완전 분석과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12필지전체 국유지

242,602㎡총 면적

4필지밭 (면적 최대)

51,768㎡밭 면적


핵심 요약 — 브리핑 인용용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의 국유지는 총 12필지, 242,602㎡였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4필지(51,768㎡), 임야 4필지(25,967㎡), 논 3필지(6,290㎡)가 확인되었으며, 나머지 1필지(158,577㎡)는 제공 자료상 지목이 별도 기재되지 않은 대형 필지입니다.

전농동은 조선 초부터 왕이 직접 경작하던 적전(籍田·東籍田)이 있던 곳으로, 이 역사적 토지 이용 기록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자료입니다.


①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국유지는 몇 필지? 논·밭·임야 면적 완전 정리

② 조선 왕의 친경지가 1912년 국유지로 — 전농동 12필지 242,602㎡의 기록

③ 1912년 전농동 국유지 현황: 밭 4필지 51,768㎡, 임야 4필지 25,967㎡, 논 3필지 6,290㎡

④ 적전(籍田)의 땅, 1912년 동대문구 전농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발굴을 위한 토지 기록

⑤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전농동 — 왕의 경작지가 남긴 1912년 국유지 242,602㎡


목 차

1. 왕이 직접 씨앗을 뿌린 땅, 전농동

2. 1912년 전농동 국유지 전체 현황 — 숫자로 보는 역사

3. 밭 4필지 51,768㎡ — 가장 넓은 경작지의 기록

4. 임야 4필지 25,967㎡ — 배봉산이 품은 고구려의 흔적

5. 논 3필지 6,290㎡ — 적전의 벼농사

6. 왕의 친경지 적전과 문화유산의 연결고리

7. 문화유산 조사 관점 — 왜 전농동은 특별한가

8. 성공 사례 — 왕실 관련 토지에서 역사를 건져낸 현장

9. 자주 묻는 질문 5가지

10. 한 줄 결론 · 해시태그


SECTION 01

왕이 직접 씨앗을 뿌린 땅, 전농동

지명 하나가 500년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전농(典農), 왕이 손수 밭을 갈던 그 땅이 지금의 동대문구 전농동이다.

조선 왕조는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 믿음이 얼마나 깊었냐면, 왕이 직접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친경(親耕) 의례를 해마다 치렀을 정도다. 그 땅을 적전(籍田), 또는 전농(典農)이라 불렀다. 지금의 동대문구 전농동은 바로 그 왕의 경작지 자리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이 특별한 땅을 국유지 12필지 242,602㎡로 기록했다. 조선 왕의 밭이 일제의 장부에 숫자로 남은 것이다. 이 글은 그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적전(籍田·東籍田)이란?

조선시대 왕이 직접 경작하여 농업의 중요성을 백성에게 보여주던 상징적 경작지다. 국가 제례용 곡식을 재배하는 기능도 했다. 전농동의 동적전(東籍田)은 한성 동쪽 교외에 위치한 왕의 경작지였으며, 동명(洞名) '전농(典農)'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 땅에 왕의 친경 의례가 행해졌다는 사실은, 이 일대의 토지가 단순한 농경지를 넘어 국가 의례의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전농동은 청량리역 동쪽에 자리한다. 지금은 아파트와 대학교가 들어선 평범한 주거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의 이름 석 자는 조선 왕조 전체를 관통하는 농업 철학을 담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이 땅에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놀라운 사실이다. 거기다 전농동 배봉산에서는 고구려 관방유적이 발굴되었고, 조선 개국공신의 제당인 부군당이 수령 300년의 물푸레나무와 함께 지금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층층이 쌓인 역사의 땅이다.


1912년은 조선이 무너지고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다. 왕이 씨앗을 뿌리던 그 땅은 이제 총독부 장부에 '국유지'로 기록되었다. 조선의 국가 의례 공간이 식민지 행정의 자산 목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12필지 242,602㎡라는 숫자는 그 전환의 역사적 증거다.


SECTION 02

1912년 전농동 국유지 전체 현황 — 숫자로 보는 역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에 따르면,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의 국유지는 총 12필지, 242,602㎡였다. 지목별 내역은 다음과 같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면적 비율

필지 비율

4필지

51,768㎡

21.3%

33.3%

임야

4필지

25,967㎡

10.7%

33.3%

3필지

6,290㎡

2.6%

25.0%

미기재 지목

1필지

158,577㎡

65.4%

8.3%

합계

12필지

242,602㎡

100%

100%

데이터 주석: 제공된 자료에서 논(3필지)·밭(4필지)·임야(4필지)의 소계는 11필지 84,025㎡입니다. 전체 합계(12필지 242,602㎡)와의 차이에 해당하는 1필지 158,577㎡는 지목이 별도로 기재되지 않은 대형 국유지 필지입니다. 위 표에 '미기재 지목'으로 투명하게 표기합니다.

면적 기준 시각 비교

지목

면적 분포 (전체 대비)

면적

미기재 지목

65.4%

158,577㎡

21.3%

51,768㎡

임야

10.7%

25,967㎡

2.6%

6,290㎡

4밭 · 필지51,768㎡

4임야 · 필지25,967㎡

3논 · 필지6,290㎡

1미기재 · 필지158,577㎡

수치 구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 1필지의 미기재 지목이 전체 면적의 65.4%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이 158,577㎡, 축구장 약 22개에 달하는 이 대형 필지는 특수 목적의 국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적전(籍田) 부지가 일제에 의해 하나의 국유지 필지로 묶여 관리되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는 문화유산 조사의 핵심 관심 구역이 된다.


SECTION 03

밭 4필지 51,768㎡ — 가장 넓은 경작지의 기록


1912년 전농동 국유지 중 확인된 지목 가운데 가장 넓은 것은 밭이었다. 4필지, 51,768㎡. 축구장 약 7.3개에 해당하는 이 넓은 밭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전농동은 이름 자체가 왕의 농경지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 땅에서 왕실 관련 농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1912년에도 이 일대에 넓은 경작지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왕이 씨앗을 뿌리던 신성한 밭이 일제의 수탈 체제하에서 국유 농경지로 관리된 것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왕실 경작지 밭의 고고학적 가치

밭으로 분류된 구역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백 년간 농경이 이루어진 땅은 상층이 경작으로 교란되어 있지만, 그 아래층에는 오히려 이전 시대의 유구가 잘 보존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왕실 의례와 관련된 경작지 주변에는 제기(祭器), 농기구, 건물지, 의례 관련 시설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농동 밭 구역의 토층 분석은 시굴조사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또한 밭 4필지의 위치가 현재의 어느 지번에 해당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이 지역 재개발이나 건설 공사 시 지표조사 구역 선정에 직접 활용될 수 있다. 1912년 밭 기록이 현대 개발 사업의 문화재 영향 평가에서 첫 번째 참고 자료가 되는 이유다.


SECTION 04

임야 4필지 25,967㎡ — 배봉산이 품은 고구려의 흔적


임야는 4필지, 25,967㎡였다. 필지 수는 밭과 같지만 면적은 절반 수준이다. 이 임야 필지는 전농동 일대의 산지, 즉 배봉산(拜峰山) 자락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봉산은 전농동과 맞닿아 있는 동대문구의 유일한 산지형 공원이다. 이 산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1968년부터 2015년까지 정상부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2015년 군부대 이전 후 공원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고구려 관방유적(보루)이다. 이 유적은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배봉산 보루와 1912년 임야 국유지의 연결

1912년 임야 국유지 4필지가 배봉산 자락과 연관된 구역이라면, 이 땅 아래에는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층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보루가 정상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인근 사면부에도 관련 시설이 분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임야로 지정된 국유지는 수백 년간 경작이나 건축 교란이 없었던 만큼, 지하 유구가 가장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구역이 될 수 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에 따르면, 고구려 유적 확인 지역 인근의 개발 사업은 문화재 영향 검토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1912년 임야 국유지의 정확한 위치 확인은 이 법적 절차의 기초 작업이 된다.

또한 조선 왕실과의 연결도 주목할 만하다. 배봉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을 향해 정조가 절을 올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왕실 묘역과 인접한 임야는 조선 시대부터 국유지로 엄격히 관리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1912년 기록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SECTION 05

논 3필지 6,290㎡ — 적전의 벼농사


논은 3필지, 6,290㎡였다. 세 지목 가운데 필지 수와 면적 모두 가장 적지만, 이 논의 존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적전(籍田)에서 재배한 곡식은 왕실의 제례에 사용되었다. 벼쌀은 그 중심 작물이었다. 1912년에도 전농동 일대에 논 3필지가 국유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왕조의 종언 이후에도 이 땅의 농경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의 적전이었던 그 벼논은 이제 제국주의 일본의 국유지 장부에 숫자로만 남았다.

논 구역의 고고학적 특수성

논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환경 때문에 유기물이 썩지 않고 보존되는 무산소 층위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논 구역 발굴에서는 목기, 짚제품, 씨앗류, 동물 뼈 등 일반적인 토양 조건에서는 소멸하고 마는 유기 자료들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다. 전농동 논 3필지 구역은, 만약 원지층이 보존되어 있다면 조선 시대 농경 관련 유기 유물이 출토될 잠재력이 있는 구역이다.

6,290㎡, 축구장 하나보다 약간 작은 이 논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지표조사 선행 작업의 핵심이다. 왕실 친경 의례가 열렸던 바로 그 논이 지금의 전농동 어느 골목 아래에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SECTION 06

왕의 친경지 적전과 문화유산의 연결고리


전농동의 역사층은 단순히 조선 시대 농경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땅에는 층층이 다른 시대의 흔적이 쌓여 있다.

가장 오래된 층은 고구려다. 배봉산 정상부에서 발견된 고구려 관방유적은, 이 일대가 삼국 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보루는 한강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방어 체계의 일부였다. 전농동 임야 구역이 이 보루의 영향권 안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위에 쌓인 층은 조선이다. 조선 초부터 이 땅은 왕의 친경지였고, 적전 관련 시설물이 세워졌을 것이다. 제관들이 머무는 건물, 농기구 보관소, 의례 준비 시설 등이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전농동 부군당과 민간 신앙의 역사층

전농동에는 세종 20년(1438년)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군당(府君堂)이 지금도 남아 있다. 수령 300년이 넘는 물푸레나무가 신단수로 서 있는 이 당집은, 조선 개국공신 조반(趙胖, 1341~1401)을 주신으로 모신다. 이 부군당의 존재는 전농동의 역사가 공식 기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의 친경지 바로 옆에서, 민중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땅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군당과 적전, 이 두 공간의 지리적 관계를 분석하는 것도 지표조사의 중요한 관점이다.

1912년 전농동 국유지 12필지 242,602㎡는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니다. 고구려의 방어선, 조선 왕의 친경지, 민중의 토속 신앙이 겹겹이 쌓인 역사의 지층(地層)이다.


SECTION 07

문화유산 조사 관점 — 왜 전농동은 특별한가


전농동이 문화유산 조사에서 특별히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왕실 의례 공간으로서의 고고학적 잠재력

적전(籍田)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었다. 왕이 직접 의례를 거행하는 국가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 주변에는 의례 관련 시설물, 의기(儀器), 건물지가 분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12년 밭·논으로 기록된 구역이 조선 초기 적전 구역과 겹친다면, 그 지하에는 왕실 의례 관련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2. 삼국 시대 유적 분포 구역

배봉산 고구려 보루의 발견은 이 일대가 삼국 시대부터 유적 분포 지역임을 공식 확인해준 사건이다.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르면, 기 확인된 유적의 인접 구역은 신규 개발 시 문화재 영향 검토를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1912년 임야 국유지 4필지가 배봉산 자락과 연결된다면, 이 의무 적용 구역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3. 단 1필지가 전체 면적의 65%를 차지하는 대형 국유지

12필지 중 지목 미기재 1필지가 158,577㎡, 전체의 65.4%를 차지한다. 이 대형 필지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전농동 국유지 조사의 최우선 과제다. 조선 시대 적전 부지가 통째로 하나의 국유 필지로 관리되었을 가능성, 또는 왕실 관련 대형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 모두 배제할 수 없다. 이 필지의 지목과 위치를 현재 지번과 대조 확인하는 작업은 향후 지표조사의 우선순위 1번이다.

자료 출처 및 분석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원자료를 기반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분석하였습니다.

자료 기준 연도: 1912년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SECTION 08

성공 사례 — 왕실 관련 토지에서 역사를 건져낸 현장

성공 사례 1

풍납토성 발굴조사 — 도시 한가운데서 백제 왕성을 발견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발굴조사는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 아래에 백제 왕성이 잠들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 중 백제 유물이 대거 쏟아지면서 시작된 이 조사는, 서울 도심 개발지 어디서나 대규모 역사유적이 나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왕실 관련 토지는 반드시 사전 지표조사가 필수다.

성공 사례 2

배봉산 고구려 보루 발굴 — 48년 만에 드러난 역사

전농동 바로 인근 배봉산에서 2015년 군부대 이전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고구려 관방유적(보루)이 발견되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이 유적은, 48년간 군사시설로 막혀 있던 구역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더욱 극적이다. 오랫동안 접근이 차단된 땅일수록 유적이 양호하게 보존될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증명한 사례다.

성공 사례 3

인사동 금속활자 발굴 — 기초조사가 만든 기적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재개발 구역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 초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쏟아졌다.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이 구역이 조선 시대 시전(市廛) 인근의 특수 필지였음을 확인한 것이 조사 범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사전 자료 분석과 단계적 조사 절차가 세기의 발굴을 가능하게 한 모범 사례다.

전농동의 경우, 조선 왕의 친경지라는 역사적 배경과 배봉산 고구려 보루의 존재, 그리고 대형 미기재 국유지 필지의 불명확한 정체가 겹쳐 있다.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표조사의 충분한 근거가 되지만,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땅이 문화유산 조사의 핵심 대상임을 뜻한다.


SECTION 09

자주 묻는 질문 5가지

Q1.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 면적은 얼마였나요?

A.총 12필지, 242,602㎡였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4필지(51,768㎡), 임야 4필지(25,967㎡), 논 3필지(6,290㎡)가 확인되며, 나머지 1필지(158,577㎡)는 지목이 별도 기재되지 않은 대형 국유지 필지입니다.

Q2.1912년 전농동 국유지 중 밭은 몇 필지, 면적은 얼마였나요?

A.밭은 4필지, 51,768㎡였습니다. 확인된 지목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합니다.

Q3.전농동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전농동은 조선 왕이 직접 경작하던 적전(籍田·동적전)이 있던 곳으로 왕실 의례 관련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인근 배봉산에서 고구려 관방유적이 확인되어 삼국 시대부터 역사 유적이 분포하는 구역입니다. 셋째, 전체 면적의 65%를 차지하는 대형 미기재 국유지 필지의 성격을 밝혀야 합니다.

Q4.1912년 전농동 국유지 중 임야는 몇 필지였나요?

A.임야는 4필지, 25,967㎡였습니다. 배봉산 자락과 연관된 구역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관방유적 인접 구역으로서 문화재 조사 시 우선 검토 대상입니다.

Q5.전농동 일대에서 개발 공사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A.먼저 e-minwon.go.kr(국가유산청 전자민원) 포털에서 해당 지번의 문화재 보호구역 및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해당 여부를 확인합니다. 이후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초기 상담부터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까지 전 과정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SECTION 10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국유지는 총 12필지 242,602㎡이며, 조선 왕의 친경지 적전(籍田)에서 비롯된 이 땅의 밭·임야·논 기록은 고구려 보루와 왕실 의례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가진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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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이 허리를 굽혀 씨앗을 심었다.그 땅에서 자란 벼가 종묘 제사상에 올랐다.500년이 흘러 일제의 장부가 그 땅을 삼켰고,또 다시 100년이 흘러 아파트가 들어섰다.그러나 땅은 기억한다.왕이 뿌린 씨앗을, 고구려 병사가 쌓은 돌을,그리고 물푸레나무 아래 300년 동안 올린 제문을.1912년 12필지 242,602㎡,그 숫자 아래에 우리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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