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마포동의 진짜 모습』
- 2025년 5월 28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마포동 그 한강변 땅, 100년 전엔 집이 392필지였고 절터까지 있었다
1912년 마포구 마포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주거·사찰·한강 뱃길의 이야기
마포나루 자리에서 딱 한 번 멈춰봐.
지금 이 한강변,
100년 전엔 392필지의 집들이 빼곡했고,
사찰 터가 있었고,
김씨가 91필지로 마을을 이끌었다.
마포동은 처음부터 사람 냄새가 가득한 땅이었다.

목차
마포동의 1912년, 전체 모습 한눈에 보기
집이 가득했던 마포동의 삶
길 위의 역사는 어디로 향했을까
사라진 흔적, 사사지의 비밀
잡종지와 밭이 그리는 마포동 생활상
이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 성씨로 본 마포동
국가와 법인이 소유했던 마포의 땅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마포동을 걷다
마포동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공덕역 근처의 번화한 상권, 한강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목, 그리고 마포라는 이름에 묻어나는 어딘가 서울 서쪽의 정취. 지금의 마포동이 현대적인 주거·상업 지역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에 따르면, 마포동은 420필지, 146,909㎡의 땅으로 이루어진 주거 밀집 마을이었다. 무려 392필지가 대지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 사찰 터와 법인 소유지까지 담겨 있었다는 것.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보자.
1. 마포동의 1912년, 전체 모습 한눈에 보기
1912년 마포동은 총 420필지, 146,909㎡의 땅이었다. 서울의 다른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마포동만의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다. 논이 단 한 필지도 없었다는 것이다.
420필지
마포동 전체
392필지
대지 (115,124㎡)
19필지
밭 (28,439㎡)
7필지
잡종지 (3,160㎡)
1필지
사사지 (161㎡)
1필지
길 (23㎡)
논이 없다. 이건 단순히 마포동에 벼농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마포동이 한강 뱃길의 거점, 즉 마포나루로 유명한 교통·상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농경 중심이 아닌 주거와 상업 중심의 공간으로 일찍부터 발전했다는 뜻이다. 전체 420필지 중 392필지가 대지였다는 건, 이 블로그 시리즈에서 소개한 서울의 모든 동네를 통틀어 압도적으로 높은 주거 비율이다.
마포나루는 조선 시대부터 한강 수운의 핵심 거점이었다. 새우젓, 소금, 곡식이 배로 운반되어 마포에 내리고, 그 물자가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뱃길 위에서 마포동은 이미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흔적이 논 한 필지 없는 토지 구성으로 나타난 거다.
2. 집이 가득했던 마포동의 삶

1912년 마포동 대지 392필지, 115,124㎡. 이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오는가. 전체 420필지 중 93%가 집터였다. 마포동은 사실상 주거 전용 마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92필지의 집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봐. 마포나루와 가까운 이 동네에는 뱃일을 하는 사람들, 장사를 하는 상인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살았을 거다. 순수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한강 수운과 연결된 활기찬 상업적 주거 마을. 그게 1912년 마포동이었다.
집들은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뒤섞여 있었을 거다. 좁은 골목 사이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상인들이 오가던 풍경. 지금도 마포동 어딘가 오래된 골목을 걸으면 그 기억의 흔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그 골목길의 도로층, 집터의 유구들이 층위에서 확인될 수 있다.
"마포나루가 살아있던 그 시절, 마포동 392필지의 집에서 뱃사람들과 상인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살았다."
3. 길 위의 역사는 어디로 향했을까
1912년 마포동 토지 기록에 길이 딱 하나 등장한다. 1필지, 23㎡. 공식적으로 '길'로 등록된 땅이 단 하나, 23㎡에 불과했다는 게 처음엔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당시 측량 방식과 관련이 있다. 좁은 골목길들은 별도의 필지로 등록되지 않고 인접한 집터의 일부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마포동의 구불구불한 골목들 대부분은 토지 기록상 독립 필지가 아니라 각 집터 안에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단 23㎡의 공식 도로. 그 좁은 길을 기준으로 수백 개의 집이 이어졌던 거다.
이 골목들은 지금도 마포동 어딘가에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 도로와 골목의 배치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100년 전 집터의 경계가 지금의 골목 선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옛 도로층을 확인하면 1912년 마포동의 골목 지도를 복원할 수 있다.
4. 사라진 흔적, 사사지의 비밀

마포동 기록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항목이 있다. 사사지 1필지, 161㎡. 절터의 흔적이다.
마포동에 사찰 터가 있었다는 것의 의미
사사지(寺社地)는 사찰이나 신사가 있던 터를 뜻한다. 마포동처럼 한강 뱃길의 거점이었던 동네에 사찰이 있었다는 건, 물길을 오가는 뱃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 공간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 주요 나루터 인근에는 뱃길의 안전을 비는 사당이나 작은 절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포동의 161㎡ 사사지가 그런 공간이었을 수 있다.
161㎡는 작은 면적이다. 하지만 이 작은 절터가 마포나루를 오가는 뱃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을지는 면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배를 타기 전 안전을 빌고, 무사히 돌아온 후 감사를 드리던 그 공간. 그 161㎡ 어딘가에 불교 문화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불상·범종·명문 기와 같은 유물이 그 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 땅에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5. 잡종지와 밭이 그리는 마포동 생활상
1912년 마포동에는 잡종지가 7필지, 3,160㎡ 있었다. 주거가 압도적인 이 동네에서 잡종지 7필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마포나루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이 잡종지의 일부는 물자 하역과 관련된 야적장이나 임시 시장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배에서 내린 새우젓과 소금을 잠시 쌓아두던 공터, 또는 장날마다 소규모 시장이 서던 광장. 3,160㎡의 잡종지가 마포나루 상업 경제의 일부로 기능했을 거다.
밭도 있었다. 19필지, 28,439㎡. 논은 없고 밭만 있었다는 건, 마포동 사람들이 쌀은 나루터를 통해 유통된 것을 사서 먹고, 채소는 직접 키워 먹는 생활 방식이었을 거라는 걸 시사한다. 뱃사람과 상인의 마을에서도 텃밭은 필수였던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밭의 경작층과 잡종지의 사용 흔적이 토양 층위에서 확인될 수 있다.
6. 이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 성씨로 본 마포동

1912년 마포동 토지 기록에는 정말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김씨로 91필지였다. 이씨 71필지, 최씨 34필지, 강씨 15필지, 장씨 14필지, 오씨 13필지, 양씨 11필지, 안씨 10필지, 전씨 10필지 순이었다.
91필지
김씨
71필지
이씨
34필지
최씨
15필지
강씨
14필지
장씨
13필지
오씨
김씨 91필지, 이씨 71필지. 두 성씨를 합치면 162필지로, 마포동 전체 420필지의 38%를 차지한다. 이 두 가문이 마포동의 양대 지주였다. 그런데 김씨와 이씨 외에도 최씨·강씨·장씨·오씨·양씨·안씨·전씨 등 다양한 성씨가 함께 살았다는 게 마포동의 특성이다.
이 다양성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 농촌 마을에서 특정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패턴과 달리, 마포동은 한강 뱃길을 따라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든 상업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성씨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 뱃일, 장사, 짐꾼 일 등 다양한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채 이 좁은 마포동 골목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거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분포와 토지 위치를 결합하면, 당시 마포동의 사회 구조와 공간 배치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어느 성씨가 나루터에 가까이 살았고, 어느 성씨가 언덕 안쪽에 살았는지. 그 분포가 유물의 귀속을 추적하는 단서가 된다.
7. 국가와 법인이 소유했던 마포의 땅
1912년 마포동에는 국유지 6필지와 법인 소유지 13필지가 있었다. 두 항목을 합치면 19필지, 전체의 4.5%에 해당한다.
법인 소유지 13필지 — 마포동의 상업적 성격을 보여주는 흔적
이 블로그 시리즈에서 소개한 서울 동네들 중 법인 소유지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마포동에 법인 소유지 13필지가 있었다는 건, 이 동네가 단순한 주거 마을이 아니라 회사나 단체가 토지를 소유할 만큼 상업적·공공적 기능이 발달한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마포나루의 수운 관련 회사나 조합이 이 땅을 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국유지 6필지는 도로, 나루터 관련 시설, 또는 관청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마포나루가 조선 시대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주요 수운 거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루터 관련 국가 시설이 이 6필지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거다. 나루터 관련 유물은 배 부품, 화물 용기, 수운 관련 행정 기물 같은 것들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 범주다.
8.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마포동을 걷다

마포동의 1912년 기록을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지금 이 동네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392필지의 집터, 19필지의 밭, 7필지의 잡종지, 1필지의 사사지, 1필지의 길, 6필지의 국유지, 13필지의 법인 소유지. 이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1912년 마포동의 진짜 얼굴이다.
특히 논이 단 한 필지도 없고, 법인 소유지가 있으며, 사찰 터까지 존재했던 마포동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어느 동네와도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농촌이 아니라 한강 뱃길의 상업 거점이었던 마포동만의 이야기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마포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마포나루 주변 재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공사 전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이 땅에 남은 이야기를 먼저 읽어내는 것. 그게 392필지 위에 살았던 마포동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딱 한 번만 생각해봐.
이 한강을 따라 새우젓과 소금을 실은 배가 들어왔고,
그 짐을 내리던 뱃사람이 절터에 가서 안전을 빌었고,
김씨와 이씨가 골목 사이 집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했다.
그 모든 삶이 392필지 위에 있었다.
마포동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땅이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마포동역사마포구문화재발굴문화재지표조사발굴조사기관시굴조사표본조사서울발굴조사1912년마포동seoulheritage매장문화재마포나루역사사사지발굴서울역사탐방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