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랑구 상봉동12필지 5,662㎡전부 대지 — 중랑천변 마을의 기억
- 5월 29일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관 완벽 가이드
1912년 중랑구 상봉동12필지 5,662㎡전부 대지 — 중랑천변 마을의 기억
서울 동북쪽 끝자락, 중랑천이 흐르는 그 마을에조선의 삶터가 통째로 잠들어 있다.12필지 전부 대지 —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12총 필지 수
5,662㎡총 면적
100%전부 대지
471.8㎡필지당 평균 면적
약 142.7평 — 마을 단위 대형 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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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변 마을, 12필지 5,662㎡.단 한 평도 임야도, 밭도 아닌 — 오직 사람이 살던 터였다."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 지금은 지하철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교통 요지이자 상봉터미널이 들어선 이 동네에, 1912년 국유지로 등록된 대지 12필지 5,662㎡가 있었다. 임야도 밭도 없다. 전부 집이 서 있던 땅이었다. 그것도 필지당 평균 471.8㎡, 약 143평의 넓직한 터였다. 이 큼직한 대지들이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 안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지금부터 파헤친다.
목차 — Table of Contents
011912년 상봉동 국유지 통계 — 12필지 전부 대지의 의미
02상봉동이란 어디인가 — 중랑천변 마을의 오랜 역사
03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마을 터를 읽는 방법
04표본·시굴·발굴조사 — 마을 대지의 단계별 조사법
05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06실제 성공 사례 — 마을 터에서 꺼낸 역사들
07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01핵심 통계
1912년 상봉동 국유지 통계 — 12필지 전부 대지의 의미

5,662㎡ — 전부 대지(垈地)
토지 유형대지 100% · 임야·밭 0%
총 필지12필지
필지 평균471.8㎡ (약 142.7평)
12필지
국유지 총 필지 수
5,662㎡
총 면적
100%
대지 비율
1912년
지적 등록 연도
12필지 대지 시각화 — 평균 471.8㎡ 규모의 마을 터
대지 필지 (12개 전부)
임야·밭·도로부지 = 0필지
서울 국유지 대지 비율 비교 — 상봉동의 위치
상봉동
(대지)
100%
경운동
(대지)
100%
후암동
(밭 82.9%)
17%
녹번동
(임야 66%)
1.4%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필지당 평균 면적이다. 12필지에 총 5,662㎡라면 필지 하나당 평균 471.8㎡, 약 143평에 달한다. 이것은 단순한 주거용 소형 필지가 아니다. 143평짜리 대지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꽤 규모 있는 건물이나 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넓은 터다. 이 규모의 대지가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땅이 단순한 민가(民家) 부지가 아니라 국가 관련 시설이나 특별한 용도로 관리되던 땅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12필지 전체가 예외 없이 대지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대지와 임야, 밭이 혼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상봉동 국유지는 단 한 필지도 임야나 밭이 없다. 이것은 1912년 당시 이 12필지 모두에 건물이나 시설이 들어서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인간의 활동이 집중된 공간일수록 지하에 축적된 문화층의 두께와 밀도는 더욱 풍부해진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상봉동 국유지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도심이 아닌 하천변 외곽에 형성된 대규모 국유지 마을 터는, 도심 발굴과는 또 다른 차원의 역사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다.
02역사 배경
상봉동이란 어디인가 — 중랑천변 마을의 오랜

상봉동(上鳳洞)은 중랑구의 서쪽에 위치한 동네로, 중랑천(中浪川)과 가까운 완만한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상봉(上鳳)'이라는 이름은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형상의 지세(地勢)를 가진 곳 중 위쪽에 해당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봉황은 전통적으로 길하고 고귀한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으니, 이 이름 자체가 이 땅이 예로부터 좋은 터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중랑천은 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다. 조선시대 중랑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었다. 한강으로 합류하는 이 물길은 물자를 운반하는 수운(水運)의 통로이자, 농업용수 공급원이었다. 한양 도성 동북쪽의 사람들이 중랑천을 따라 모여 살며 마을을 이루었고, 상봉동 일대도 그런 하천변 마을 중 하나였다.
1912년 당시 상봉동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로 불렸다.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미 1912년에 이곳에 국유지 대지 12필지 5,662㎡가 존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서울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외곽 지역에 이만한 규모의 국유지 대지가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은, 국가 혹은 왕실이 이 지역에 특별한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왕실 소유 농장, 관아 관련 시설, 역원(驛院) 또는 군사 시설 등이 그 후보가 될 수 있다.
중랑천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새벽 물안개 속에서 눈을 뜨던 사람들. 그들이 살던 터가 지금 우리의 발밑에 있다. 강은 기억을 씻어내지 않는다. 다만 더 깊이 간직할 뿐이다.
03조사 방법론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마을 터를 읽는 방법

중랑구 상봉동처럼 하천변에 형성된 마을 대지의 지표조사는 독특한 접근 방식을 필요로 한다. 하천 주변 지역은 홍수와 범람에 의한 토사 퇴적이 반복되는 특성이 있어, 문화층이 두꺼운 퇴적층 아래에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발굴 조사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물이 더 잘 보존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하천변 마을 대지는 네 가지 방향으로 접근한다. 첫째는 문헌·고지도 분석이다. 1912년 지적도 외에 조선시대 양주목 지도, 중랑천 유역 역사 기록, 군현지(郡縣誌) 등을 분석해 상봉동 일대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를 파악한다. 둘째는 하천 범람 역사 조사다. 중랑천의 역사적 범람 기록을 분석하면 특정 시기 지층의 두께와 퇴적 특성을 예측할 수 있다. 셋째는 지표 유물 수습이다. 농업 활동이나 공사로 지표에 노출된 기와·도자기·석재 파편의 분포와 밀도를 기록한다. 넷째는 토층 관찰이다. 인근 공사 현장이나 하천 절개면에서 노출된 토층을 분석해 문화층의 깊이와 두께를 추정한다.
상봉동 12필지 5,662㎡는 법적으로도 지표조사 의무 기준인 3만 제곱미터에는 못 미치지만, 국유지라는 특성과 중랑천 인접 지역이라는 역사 문화적 맥락을 감안하면 사전 기초조사를 통해 발굴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1
고지적 기록 및 중랑천 역사 문헌 분석
1912년 지적도와 조선시대 양주목·구리면 관련 역사 기록, 중랑천 유역 수리(水利) 문서 등을 종합 분석하여 상봉동 국유지의 역사적 용도를 추적한다.
2
하천 퇴적층 분석 및 지형 조사
중랑천의 역사적 범람 경로와 퇴적 특성을 분석해 문화층의 예상 깊이를 파악한다. 하천변 대지는 홍수 퇴적층이 문화층을 덮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별도 해석이 필요하다.
3
현장 답사 — 지표 유물 및 기와 파편 수습
12필지 전체를 격자 방식으로 순회하며 지표에 노출된 유물을 수습하고 GPS 위치를 기록한다. 기와 파편, 도자기 조각의 분포 밀도가 발굴 우선 구간 결정의 핵심 지표가 된다.
4
종합 보고서 작성 및 발굴 방향 제언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상봉동 12필지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고, 추가 표본·시굴·발굴조사의 필요성과 우선순위를 담은 종합 보고서를 작성한다.
04발굴 단계
표본·시굴·발굴조사 — 마을 대지의 단계별 조사법

상봉동처럼 하천변 마을 대지에서의 발굴조사는 그 어떤 유형의 발굴보다 풍부한 생활사 자료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도심의 관청 건물 터와 달리, 마을 대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했던 온갖 물건들이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마을 터 발굴의 가장 큰 매력이다.
표본조사 단계에서는 5,662㎡의 2% 이내, 즉 최대 113.2㎡ 범위에서 탐색 트렌치를 파게 된다. 하천변 대지에서는 퇴적층을 고려해 일반 발굴보다 더 깊이 파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첫 삽에서 조선시대 기와 건물 기단이나 온돌 구조가 확인되면, 이것은 이미 중요한 발굴의 예고편이다. 특히 143평 규모의 대형 필지들이므로, 표본조사 한 구간에서 건물의 전체 윤곽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시굴조사는 면적의 10%인 566㎡까지 확장한다. 12필지에 걸쳐 대지가 분포해 있으므로, 필지별로 대표 트렌치를 설치해 각 필지의 문화층 두께와 유물 분포를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마을 전체의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물 위치, 담장 경계, 건물 간의 거리 관계 등이 확인되면 당시 마을의 생활 방식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정밀발굴조사에 이르면, 마을의 모든 것이 나온다. 온돌방의 구들돌, 부엌 아궁이의 재, 장독대 자리, 우물 속 유물, 담장 안에 묻힌 동전. 이 모든 것들이 100년 전 상봉동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증언하는 유물이 된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 발굴을 통해 처음으로 이름을 얻는다.
국보나 보물보다 더 값진 유물이 있다. 누군가의 집 우물에서 나온 깨진 밥그릇 하나.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자,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이 100년 전에도 여기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다.
중랑천변 대지 발굴의 특수 고려 사항
중랑천 인접 지역은 하천 퇴적에 의한 모래·자갈층이 문화층 위를 덮고 있는 경우가 있어, 일반 발굴보다 퇴적층 분석에 더 많은 시간과 전문성이 필요하다. 또한 지하수위가 높은 구간에서는 발굴 중 유수 차단 작업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목재·직물·유기물 유물이 더 잘 보존된 상태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05기관 안내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매장유산 조사는 국가유산청에 정식 등록된 전문 조사기관만이 수행할 수 있다. 하천변 마을 대지처럼 퇴적층과 지하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에서는, 이런 환경에서의 발굴 경험을 갖춘 기관이 특히 중요하다. 수중·습지 발굴 기법이나 유기물 보존 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서울 전역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중랑구 상봉동처럼 도심 외곽 하천변 마을 대지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지당 471.8㎡라는 대형 규모의 대지가 12개나 연속해서 국유지로 등록된 사례는 서울 국유지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주목할 만한 패턴이다.
발굴조사 기관 선정 시 확인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국가유산청 정식 등록 여부, 하천변·충적지 발굴 경험, 지하수 대응 기술 보유 여부, 유기물 유물 보존 처리 능력, 그리고 조사 완료 후 20일 이내 보고서 제출 실적이다. 중랑구처럼 도심과 외곽의 경계에 있는 지역에서는 서울시와 경기도의 행정 경계 역사까지 파악하고 있는 기관이 더욱 유리하다.
성공 사례 — 은평구 구산동 국유지 조사
서울 외곽 하천변에 위치한 구산동 국유지 사례는 상봉동과 유사한 지형적 조건을 가진다. 이 조사에서는 고지적 분석만으로도 해당 부지의 역사적 용도를 상당 부분 규명할 수 있었으며, 이는 상봉동 12필지 기초조사의 방법론적 선례가 된다.
성공 사례 — 경기도 하남 이성산성 일대 마을 터 발굴 (참고 사례)
한강 지류 인근 마을 터에서 진행된 이 발굴에서는 고려~조선시대 생활 유구와 함께 목재 구조물, 유기물 유물이 지하수 보존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출토되었다. 중랑천변 상봉동 대지 발굴에서도 유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고 사례다.
06성공 사례
실제 성공 사례 — 마을 터에서 꺼낸 역사들

마을 터 발굴은 역사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이다. 왕의 행차가 지나던 도로 발굴도, 관청 건물 터 발굴도 아닌,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이를 키우던 그 공간을 발굴하는 것. 중랑구 상봉동 대지 발굴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서울 외곽 하천변 마을 터 발굴에서는 종종 놀라운 발견이 이어진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일대 하천변 발굴에서는 조선 후기 마을 전체의 공간 구성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드러났다. 우물, 담장, 온돌방, 창고 터가 일정한 배치 패턴으로 확인되었고, 출토된 일상 도구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업과 식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해주었다. 상봉동 143평 규모의 대형 필지들이라면, 이보다 더 규모 있는 마을 생활 유구가 펼쳐질 수 있다.
하천변 발굴의 또 다른 선물은 목재 유물이다. 일반적인 건조한 환경에서는 300~400년 된 목재가 썩어 사라지지만, 지하수가 높은 하천변 퇴적층 속에서는 오히려 혐기성 환경이 형성되어 목재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나무 그릇, 빗, 목제 농기구가 그대로 출토된다면, 그것은 고고학 역사에 남을 발견이 될 것이다. 상봉동 중랑천변 대지 12필지는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땅이다.
5,662㎡라는 면적은 작지 않다. 경운동의 13,557㎡보다는 작지만, 후암동의 4,528㎡보다는 크다. 그리고 전부 대지라는 특성상, 이 면적 전체에 걸쳐 조선시대 생활 유구가 분포해 있을 수 있다. 발굴이 진행된다면, 중랑구 역사의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07행동 촉구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이 글을 끝까지 읽어온 당신은 이제 중랑구 상봉동의 12필지 5,662㎡가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님을 안다. 143평짜리 대형 필지 12개가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던 그 땅, 중랑천이 내려다보이는 그 터에서 누군가가 살았고, 그 삶의 흔적이 지금도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만약 당신이 중랑구나 서울 동북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건축·개발 사업을 준비 중이라면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해당 부지가 하천 인접 지역이거나, 과거 국유지 기록과 겹치는 지역이라면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 기관에 기초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모두를 아끼는 길이다. 공사 도중 뒤늦게 유구가 발견되어 모든 것이 중단되는 상황은 사전 조사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무와 예방의 문제를 넘어선다. 1912년 상봉동 국유지 12필지에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다는 증거, 그들의 밥그릇과 아궁이와 우물이 지금도 그 땅 아래에 있다. 그것을 꺼내 이 시대와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문화재 발굴조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중랑천은 오늘도 흐른다. 100년 전에도 흘렀고, 앞으로 100년도 흐를 것이다. 강이 기억하는 것을 땅도 기억한다. 상봉동 12필지는 그 기억의 마지막 증인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지금도 상봉동처럼 서울 곳곳의 숨겨진 국유지 기록들을 한 필지씩 분석하며 잠든 역사를 찾아가고 있다. 1912년 중랑구 상봉동 5,662㎡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마을이 다시 목소리를 내는 날, 우리는 처음으로 그 이름들을 듣게 될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필요하신가요?
중랑구 상봉동처럼 하천변 마을 대지는 지표 아래 풍부한 역사 유산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국가유산청 등록 전문기관 정보와 발굴 절차를 안내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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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은 오늘도 흐른다.그 옆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강물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라땅속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12필지 5,662㎡의 마을 터가당신에게 전하는 말은 단 하나다.우리도 여기에 살았다고.기억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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