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국유지 28필지 44,251㎡ 완전 해설
- 5월 30일
- 8분 분량
문화재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 중랑구 망우동
잊음을 잊지 않는 땅, 망우동 — 대지 13필지가 품은 110년의 비밀
1912년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국유지 28필지 44,251㎡ 완전 해설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기초 분석
논이 없습니다. 논이 단 한 필지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 중 처음입니다. 논 없이 대지, 임야, 밭만으로 구성된 망우동 국유지 28필지. 그리고 그 중 대지가 13필지, 전체의 46.4%를 차지합니다. 이 동네에는 경작보다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건물이 먼저였습니다. 그 건물들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밝혀봅니다.
목차
망우(忘憂) — 근심을 잊는다는 이름이 품은 태조의 이야기
1912년 망우동 국유지 전체 통계 완전 해설
대지 13필지 15,196㎡ — 여섯 지역 중 단연 최다, 건물의 마을
대지 13필지의 정체 — 다섯 가지 가능성
밭 12필지 15,785㎡ — 대지와 거의 같은 면적, 그 의미
임야 3필지 13,269㎡ — 망우산이 품은 침묵의 기록
논이 없다 — 망우동만의 특별한 지형과 역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망우동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여섯 지역 종합 비교
망우동의 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28필지망우동 국유지 총 필지
44,251㎡전체 면적 (약 13,386평)
46.4%대지 필지 비율 (13필지)
0필지논 — 여섯 지역 중 유일
1. 망우(忘憂) — 근심을 잊는다는 이름이 품은 태조의 이야기
망우동(忘憂洞). 잊을 망(忘), 근심 우(憂). 근심을 잊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에는 놀라운 역사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무덤 자리, 즉 건원릉(健元陵)을 직접 확인하러 이 고개를 넘다가 "이제 근심을 잊겠다"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왕릉 자리를 정하고 한시름 덜었다는 그 고개 — 그것이 망우(忘憂)입니다.
지금 망우동은 중랑구 동쪽, 경기도 구리시와 맞닿은 경계 지역입니다. 망우산(芒峀山)이 중심에 자리하고, 그 산에는 1933년부터 조성된 망우리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이 산에 잠들어 있습니다. 근심을 잊겠다던 태조의 말이 이 산을 수백 년 뒤 사람들의 마지막 쉼터로 만든 것은 역사의 묘한 연결이기도 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망우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태조와 연결된 지명의 역사, 망우산이라는 독특한 지형,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 중 가장 높은 대지 비율 — 이 세 가지가 망우동을 문화재 발굴조사의 최우선 대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논이 단 한 필지도 없다는 사실이 이 땅의 성격을 다른 어느 지역과도 다르게 규정합니다.

2. 1912년 망우동 국유지 전체 통계 완전 해설
1912년 기록에 남은 망우동 국유지는 총 28필지, 44,251㎡입니다.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13,386평, 축구장 약 6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 중에서는 중간 규모에 해당하지만, 토지 구성의 독특함에서는 단연 독보적입니다.
전체 필지 수
28필지
전체 면적
44,251㎡
필지당 평균 면적
1,580㎡
환산 평수
약 13,386평
망우동 국유지는 세 종류의 토지로 구성됩니다. 대지 13필지 15,196㎡, 밭 12필지 15,785㎡, 임야 3필지 13,269㎡. 이 구성에서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논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 중 논이 없는 곳은 수유동(논 0%)과 망우동(논 0%) 둘뿐인데, 수유동은 논 없이 밭과 대지만 있었고, 망우동은 논 없이 대지·밭·임야 세 가지가 있습니다. 둘째, 대지가 13필지로 28필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대지 비율입니다.
면적 비율 분포
밭
35.7%
대지
34.3%
임야
30.0%
망우동의 가장 충격적인 수치 — 대지 13필지(46.4%), 밭 12필지(42.9%), 임야 3필지(10.7%). 필지 수에서 대지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곳은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 중 오직 망우동뿐입니다. 면적으로도 대지(34.3%), 밭(35.7%), 임야(30.0%)가 놀랍도록 균등하게 삼분됩니다.
3. 대지 13필지 15,196㎡ — 여섯 지역 중 단연 최다, 건물의 마을
대지 13필지, 15,196㎡. 필지당 평균 1,169㎡, 약 354평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의 대지를 모두 비교해 보면, 망우동의 대지 필지 수(13필지)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신림동 대지 2필지, 수유동 대지 2필지, 고덕동 대지 3필지, 논현동 대지 0필지 — 이 모든 숫자들을 합해야 망우동 하나에 겨우 미칩니다.
대지 데이터
13필지필지 수
15,196㎡총 면적
1,169㎡필지당 평균
34.3%전체 대비 비율
13개의 대지 필지가 각각 독립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13개의 서로 구별된 건물 또는 건물군이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필지당 평균 1,169㎡, 약 354평이라는 면적은 규모 있는 단독 건물 하나 혹은 작은 건물 여러 채가 들어설 수 있는 크기입니다. 13개의 대지가 모두 같은 성격의 시설이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서로 다른 목적과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망우동 전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망우동이라는 지명과 지형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태조 이성계와 연결된 이름, 왕릉과의 지리적 근접성, 망우산이라는 산악 지형 — 이 맥락에서 13필지의 대지는 왕릉 관련 시설군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합니다. 조선 시대 왕릉 주변에는 능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의 관사,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齋室), 능지기들의 숙소, 제수를 보관하는 창고 등 다수의 부속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13이라는 숫자는 이런 복합 시설군의 규모와 맞아 떨어집니다.
13개의 건물이 망우동에 서 있었습니다. 논 한 필지 없이, 오직 건물과 밭과 숲으로만 이루어진 이 땅. 이것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

4. 대지 13필지의 정체 — 다섯 가지 가능성
망우동 대지 13필지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다섯 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가능성은 망우동의 지명, 지형, 역사 기록, 인접 지역의 문화재 현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입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왕릉 부속 시설군입니다.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은 망우동 바로 옆에 위치합니다. 조선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9기의 왕릉이 모인 동구릉 권역의 외곽 관리 시설들이 망우동 대지 13필지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왕릉 주변 관리 인원의 주거 시설, 마필 관리 시설, 제수 창고, 방화선 관리 막사 등이 여러 필지에 걸쳐 분산 배치되는 것은 조선 왕릉 운영 방식에서 흔한 패턴이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역원(驛院) 및 파발 시설입니다. 망우동은 조선 시대 서울에서 함경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동북 대로의 길목에 해당합니다. 이 길을 따라 역(驛)과 원(院)이 배치되었으며, 말을 갈아타거나 관리들이 쉬어가는 복합 시설이 망우 고개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발마 관리 시설, 숙박 건물, 물자 창고가 여러 필지에 분산된 13개의 대지에 자리했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가능성은 군사 초소 및 봉수 관련 시설입니다. 망우산 능선은 서울 동북쪽의 군사적 관문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이 능선에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초소와, 봉수 신호를 전달하는 봉수군 막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소규모 군사 시설이 13필지의 대지에 분산 배치된 구조가 이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네 번째 가능성은 불교 사찰 복합 시설입니다. 망우산 일대에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사찰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본당, 요사채, 선방, 종각, 창고 등 사찰을 구성하는 여러 건물이 각각 독립 필지로 나뉘어 기록될 수 있습니다. 13필지라는 숫자는 규모 있는 사찰 복합 시설의 건물 수와 부합합니다.
다섯 번째 가능성은 이 중 두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구조입니다. 13필지 모두가 동일한 성격의 시설이 아니라, 왕릉 관련 시설 몇 필지, 역원 시설 몇 필지, 군사 시설 몇 필지가 함께 분산 배치된 복합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각 필지의 유물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이 복합 구조를 해독하는 열쇠입니다.
5. 밭 12필지 15,785㎡ — 대지와 거의 같은 면적, 그 의미
밭 12필지, 15,785㎡. 필지당 평균 1,315㎡, 약 398평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수치가 있습니다. 대지 13필지의 총 면적이 15,196㎡이고, 밭 12필지의 총 면적이 15,785㎡입니다. 두 토지의 면적 차이가 단 589㎡, 약 178평에 불과합니다. 필지 수는 대지가 하나 더 많고, 면적은 밭이 조금 더 넓습니다. 이 거의 완벽한 균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밭 데이터
12필지필지 수
15,785㎡총 면적
1,315㎡필지당 평균
35.7%전체 대비 비율
대지와 밭의 면적이 거의 같다는 것은 이 두 토지가 기능적으로 짝을 이루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건물(대지)이 있으면 그 건물을 운영하기 위한 식량 공급처(밭)가 필요합니다. 13개의 건물 시설이 12개의 밭 필지를 통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구조 — 이것이 1912년 망우동 국유지의 실제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건물과 밭이 거의 일대일로 대응하는 이 구조는 망우동이 외부 공급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독립적인 기능 시설 단지였음을 말해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밭 12필지는 대지 13필지와 반드시 연계해서 분석해야 합니다. 특정 대지 필지 바로 옆에 특정 밭 필지가 위치했다면, 그 두 필지는 하나의 생활 단위를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공간적 배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개별 시설의 성격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망우동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대지와 밭의 공간적 대응 관계를 지도로 복원하는 것입니다.

6. 임야 3필지 13,269㎡ — 망우산이 품은 침묵의 기록
임야 3필지, 13,269㎡. 필지당 평균 4,423㎡, 약 1,338평입니다. 전체 면적의 30.0%를 차지하는 이 임야는 망우산 자락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필지당 평균 4,423㎡는 지금까지 살펴본 지역 중 신림동(10,746㎡) 다음으로 큰 임야 규모입니다.
임야 데이터
3필지필지 수
13,269㎡총 면적
4,423㎡필지당 평균
30.0%전체 대비 비율
망우산의 임야가 국유지로 기록된 배경에는 왕릉 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왕릉 주변 산림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금산(禁山)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벌목과 경작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동구릉에서 가까운 망우산 일대의 임야가 이 금산 체계 안에 포함되어 국유지로 관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망우동 임야 3필지는 또한 1933년 이후 망우리 공원묘지가 조성된 공간과 일부 겹칠 수 있습니다. 공원묘지 조성 이전 이 산의 임야에 이미 조선 시대 묘역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그 아래에 훨씬 오래된 매장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임야 3필지에 대한 지표면 조사는 묘역 유구의 분포와 시대적 층위를 파악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7. 논이 없다 — 망우동만의 특별한 지형과 역사
망우동에는 논이 단 한 필지도 없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망우동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논은 평탄한 저지대와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합니다. 망우동은 망우산이라는 산악 지형이 중심이고, 주변이 구릉과 경사지로 둘러싸인 고지대입니다. 한강이나 큰 하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논을 만들기 어려운 지형 조건이었습니다.
논이 없는 이유 — 망우동 지형 분석
망우산 중심의 산악·구릉 지형 — 평탄 저지대 부재
한강 및 대형 하천과의 거리 — 안정적 수원 확보 어려움
경사지와 사면 지형 — 밭 경작에는 유리, 논 조성에는 불리
결론 — 망우동은 애초에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임야·건물 중심의 공간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지역을 논의 유무로 나누면 확연한 패턴이 보입니다. 신림동·개화동·고덕동·논현동에는 논이 있었고, 수유동과 망우동에는 논이 없었습니다. 수유동(북한산 기슭)과 망우동(망우산 중심)은 모두 산에 가까운 고지대 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논의 유무가 지형을 반영하고, 지형이 역사를 결정합니다. 망우동이 건물 중심의 특수 시설 지역이 된 것도 논농사를 할 수 없는 지형이 밭과 건물 위주의 토지 이용을 유도한 결과입니다.
8.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망우동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망우동 국유지 44,251㎡에 대한 문화재 조사는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보다 건물 유구 중심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대지 13필지가 전체의 34.3%를 차지하는 이 지역에서는 농경 유구보다 건축 유구의 발굴이 핵심 과제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대지 13필지의 공간적 배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13개의 대지가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여러 개의 소규모 군집으로 분산되어 있는지를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비교해 확인합니다. 이 배치 구조가 대지의 성격(왕릉 시설, 역원, 군사 초소 등)을 판단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또한 동구릉과의 거리와 방향성을 분석해 왕릉 관련 시설과의 연관성을 검토합니다.
표본조사(전체 44,251㎡의 2% 이내, 약 885㎡) 단계에서는 대지 13필지(15,196㎡)에서 최소 6~7개 필지를 선택해 각각 소규모 탐색 트렌치를 배치합니다. 초석, 기와편, 소토층의 분포를 확인하고, 유물의 시대적 특성을 초기에 파악합니다. 조선 전기 관청 유물, 왕릉 관련 제기류, 군사 시설 금속 유물 중 어떤 것이 나오는지에 따라 대지의 성격이 1차적으로 규정됩니다.
시굴조사(전체의 10% 이내, 약 4,425㎡) 단계에서는 대지 전체와 임야 일부를 포함한 범위로 굴착을 확대합니다. 특히 대지와 밭이 인접한 경계 구역을 집중 조사해 두 토지의 공간적 관계를 파악합니다. 임야 3필지에서는 묘역 유구의 존재 여부를 시굴 단계에서 확인합니다.
망우동에서 출토 가능성이 있는 유물은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보다 역사적 무게가 있습니다. 조선 전기 왕릉 관련 제기류, 청화백자, 청동 제기, 관청 인장, 건물 구조를 보여주는 전(磚)과 기와. 역원 관련 유물이라면 마구류, 여행자 유물, 관련 문서 인장. 군사 시설이라면 철제 무기류, 갑옷 부품, 화약 관련 유물. 어떤 가능성이 현실이 되느냐에 따라 망우동 발굴은 조선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습니다.

9. 여섯 지역 종합 비교
이제 여섯 지역 전체의 비교가 가능합니다. 각 지역의 지형과 역사적 배경이 1912년 토지 구성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그 패턴이 문화재 발굴조사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여섯 지역 국유지 종합 비교
항목 | 신림동 | 개화동 | 수유동 | 고덕동 | 논현동 | 망우동 |
총 필지 | 31 | 6 | 5 | 24 | 56 | 28 |
총 면적 | 183,752㎡ | 9,358㎡ | 6,393㎡ | 66,264㎡ | 177,104㎡ | 44,251㎡ |
논 비율 | 28.5% | 70.9% | 0% | 47.4% | 58.1% | 0% |
대지 필지 | 2 | 0 | 2 | 3 | 0 | 13 |
임야 필지 | 3 | 0 | 0 | 0 | 1 | 3 |
핵심 특징 | 밭 우세 | 논 압도 | 밭 극단 | 논밭 균형 | 논 대형화 | 대지 최다 |
여섯 지역을 가로질러 보면 하나의 선명한 패턴이 드러납니다. 한강이나 큰 하천에 가까운 저지대(개화동·고덕동·논현동)는 논 비율이 높고, 산이 가까운 고지대(수유동·망우동)는 논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지 필지가 많을수록 그 지역이 순수 농경 공간이 아니라 특수 목적 시설 공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기준에서 망우동은 여섯 지역 중 가장 비농경적, 가장 시설 집중적인 공간이었습니다.
10. 망우동의 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지금 망우동에는 아파트가 있고, 상가가 있고, 망우산 공원묘지를 오르는 등산객들이 있습니다. 그 공원묘지에는 한용운이 잠들어 있고, 방정환이 잠들어 있으며, 이중섭이 잠들어 있습니다. 근심을 잊겠다던 태조의 고개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이 모여 있습니다.
110년 전 이 땅의 대지 13필지 위에 서 있던 건물들도, 그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건물 옆 밭 12필지에서 잡곡을 키우던 손들도 —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땅은 남아 있습니다. 임야 3필지의 숲도, 밭두렁의 돌도, 건물 기초의 초석도 어딘가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망우동 국유지 44,251㎡가 품은 이야기는 단순한 농경의 역사가 아닙니다. 왕릉과 연결된 관리 시설의 역사이고, 조선 시대 동북 대로를 오가던 사람들의 역사이며, 산이라는 지형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대지 13필지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망우(忘憂) — 근심을 잊는다는 이름처럼, 이 땅은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지 13필지 위에 13개의 건물이 서 있었습니다.밭 12필지가 그 건물들의 밥을 책임졌습니다.임야 3필지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논은 — 처음부터 없었습니다.이것은 농촌이 아니었습니다.무언가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그 무언가의 이름을 찾는 것이 발굴조사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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