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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은평구 불광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2025년 4월 1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1912년 은평구 불광동논과 밭과 무덤이공존했던 마을의 기억

489필지, 682,670㎡. 지금의 아파트 숲 아래 잠든 농촌 마을의 시간을 되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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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불광동 아파트 단지 지하 어딘가에는 110년 전 누군가가 모를 심던 논바닥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가 쟁기를 끌던 흙의 결, 밤새 내린 빗물을 받아내던 연못의 흔적, 그리고 조용히 잠든 무덤의 자취까지. 이 모든 것이 개발의 시간 속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지층 속에 고스란히 눌려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 된다. 왜 불광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한 지역인지, 그리고 489라는 숫자가 단순한 필지 수가 아니라 살아있던 사람들의 숫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목 차

  1. 489필지, 682,670㎡ — 불광동이 품었던 시간의 규모

  2. 논과 밭이 85%였다 — 불광동 토지 구성의 진짜 의미

  3. 무덤과 연못이 공존한 마을 — 생활과 죽음이 붙어 있던 공간

  4. 공씨·고씨·김씨 — 이름으로 읽는 불광동 사람들의 지도

  5. 농촌형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인 이유

  6.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불광동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7. 성공 사례 — 비슷한 땅에서 역사가 올라온 순간들

  8. 불광동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489필지, 682,670㎡ — 불광동이 품었던 시간의 규모

1912년 은평구 불광동은 총 489개 필지, 682,670㎡의 땅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 면적을 지금의 감각으로 환산하면 축구장 약 95개를 나란히 붙여놓은 크기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편의점, 카페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 동네가 100년 전에는 이 넓은 땅을 논과 밭으로 가득 채운 전형적인 서울 외곽 농촌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이나 훈정동 같은 도심 지역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공평동이 167필지 전부를 대지로 채운 도심형 생활 공간이었다면, 불광동은 거의 정반대의 구조다. 489개 필지 중 대지는 87필지에 불과했다. 나머지 400개가 넘는 필지가 논이거나 밭이었다. 이 차이가 문화재 발굴 조사의 접근 방식을 완전히 바꾼다.

불광동의 땅 규모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682,670㎡라는 면적은 서울 구도심의 한 블록이나 두 블록이 아니라, 하나의 자립적인 마을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는 규모다. 논에서 물을 끌어오고 밭에서 먹거리를 키우며, 집에서 가족을 돌보고 마을 어귀 무덤에서 조상을 기리는 순환의 공간이 이 489필지 안에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구조가 지금의 지표 아래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묻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489

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682,670㎡

전체 면적


(축구장 약 95개)

논 110필지

309,135㎡


전체의 45.3%

밭 284필지

291,131㎡


전체의 42.6%

집 87필지

50,611㎡


전체의 7.4%

무덤 3필지

6,876㎡


연못 1개소도 존재


2논과 밭이 85%였다 — 불광동 토지 구성의 진짜 의미

1912년 불광동 토지 구성 비율

논 (110필지)45.3% · 309,135㎡

밭 (284필지)42.6% · 291,131㎡

대지 (87필지)7.4% · 50,611㎡

임야 (4필지)3.5% · 23,990㎡

무덤 (3필지)1.0% · 6,876㎡

연못 (1개소)0.14% · 925㎡

숫자를 보고 나면 불광동이 어떤 동네였는지 단박에 이해된다. 논과 밭을 합치면 394필지, 전체 면적의 87.9%에 달한다. 대지는 고작 12.8%다. 이 구조는 1912년 불광동이 농업을 기반으로 한 마을이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가장 많은 필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밭 284개이지만,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논 309,135㎡다. 필지 수는 밭이 많고, 면적은 논이 크다는 뜻인데, 이는 밭은 작은 필지들이 여럿 나뉘어 있었고 논은 비교적 큰 단위로 구획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구조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논과 밭 중심의 토지는 도심형 대지와는 전혀 다른 유물 분포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대지에서는 생활유구, 건물지, 우물, 배수시설 같은 것들이 주로 나온다. 반면 논에서는 수리 시설의 흔적인 보, 수로, 논두렁 구조물이 나올 수 있고, 밭에서는 시비와 경작의 흔적, 저장용 토기류가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불광동처럼 복합적인 농경 구조를 가진 지역은 조사 설계 자체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임야 4필지와 무덤 3필지, 그리고 연못 1개소의 존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요소들은 불광동이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생활과 자연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공존했던 유기적 마을 생태계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현대 도시 개발의 시간을 거쳐도 지층 속에 다층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3무덤과 연못이 공존한 마을 — 생활과 죽음이 붙어 있던 공간

불광동 토지 구성에서 가장 독특한 요소는 무덤 3필지와 연못 1개소의 존재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옆에 무덤이 있고, 그 근처에 연못이 있는 풍경. 하지만 1912년 당시의 농촌 마을에서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공간 배치였다. 산기슭이나 마을 가장자리에 조상의 무덤을 모시고, 물을 다스리기 위한 연못을 두는 것은 당시 조선의 마을 문화에서 보편적인 풍경이었다.

무덤 3필지 6,876㎡라는 기록은 그 규모도 무시할 수 없다. 개인 무덤 몇 기가 아니라, 여러 가문의 묘역이 일정한 구역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는 크기다. 조선 시대 묘역 주변에는 묘비, 석인, 향로석 같은 석물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벌초와 제사를 위한 시설물이 주변에 조성되기도 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도 지층 속에 일부 남아 있을 수 있다.

연못 925㎡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물웅덩이가 아니라,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 기능을 겸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못 주변은 물을 다루던 농기구나 생활 도구가 유실되어 퇴적층을 형성하기 좋은 환경이다. 실제로 국내 농촌 지역 발굴 조사에서 연못 퇴적층 속의 목제 농기구나 씨앗류가 확인된 사례가 여럿 있다. 불광동의 연못 자리가 지금 어디와 겹치는지, 그곳의 지반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지표조사의 첫 번째 과제가 된다.

"무덤과 논밭이 한 마을 안에 공존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았던 시대의 감각을 보여 준다. 그 감각의 흔적이 문화재 발굴의 현장에서 되살아난다."

4공씨·고씨·김씨 — 이름으로 읽는 불광동 사람들의 지도



1912년 불광동에서 토지를 소유했던 성씨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이 마을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는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가장 많은 필지를 보유했던 성씨는 공씨로 89개 필지에 달했다. 이어서 고씨 50필지, 김씨 49필지, 오씨 34필지, 박씨 30필지, 이씨 28필지, 정씨 27필지, 차씨 24필지, 문씨 23필지, 장씨 22필지, 호씨 19필지, 최씨 16필지 순으로 이어졌다.

눈에 띄는 것은 공씨의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89필지는 전체 489필지 중 약 18.2%에 해당한다. 이것은 공씨 가문이 불광동에서 단순히 토지를 보유한 수준이 아니라 마을의 중심 가문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불광동 인근의 해주오씨 집성촌이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이 지역이 특정 가문의 오랜 거주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문헌으로도 뒷받침된다. 공씨의 89필지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씨와 고씨, 김씨처럼 상위 3개 성씨가 188필지, 전체의 38.4%를 점하는 반면, 나머지 60% 이상은 오씨부터 최씨에 이르는 다양한 성씨들이 나눠 가졌다. 이 구조는 불광동이 특정 가문 중심의 폐쇄적 집성촌도, 완전한 익명의 분산 공동체도 아닌, 중심 가문과 다양한 이웃이 공존했던 반집성촌 형태의 농촌 마을이었음을 보여 준다. 문화재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이런 취락 구조 분석은 어떤 유형의 유물이 어떤 분포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를 예측하는 핵심 근거가 된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고

1위

공씨

89필지

불광동 최다 보유

2위

고씨

50필지

3위

김씨

49필지

4위

오씨

34필지

해주오씨 집성촌 역사 기록

5위

박씨

30필지

6위

이씨

28필지

7위

정씨

27필지

기타(차·문·장·호·최씨 등)

82필지

다양한 성씨 분산 소유


5농촌형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인 이유

불광동처럼 논과 밭 중심의 농촌형 토지 구성을 가진 지역에서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접근법이 도심 지역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도심형 지역에서는 생활유구가 수직으로 쌓인 문화층 안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좁은 면적에 여러 시기의 흔적이 겹쳐진 구조다. 반면 불광동 같은 농촌형 지역은 수평적으로 넓게 퍼진 구조다. 논두렁과 수로, 밭의 경계선이 광범위한 면적에 걸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좁은 면적을 집중적으로 파는 방식으로는 핵심 흔적을 놓칠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는 먼저 1912년의 필지 경계와 토지 용도가 지금의 도로망, 건물 배치, 지번 체계와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특히 논이었던 구역 중에서 지금도 지반 높낮이가 낮게 형성된 곳이 있다면, 그 아래에 수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연못 925㎡가 있던 위치가 지금의 어느 블록과 겹치는지 역시 이 단계에서 면밀하게 확인해야 한다.

무덤 3필지의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조선 시대 묘역은 풍수지리적 원칙에 따라 배산임수의 구조를 선호했다. 불광동의 지형 특성과 임야 4필지의 위치를 함께 분석하면 묘역이 어느 방향으로 배치되었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사전 분석이 있어야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의 트렌치 위치가 정밀해진다. 무작위로 넓게 파는 방식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의 예측 발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농촌형 지역 문화재 조사 단계 정리



지표조사 → 시굴조사(표본조사) → 발굴조사



도심형과 달리 농촌형 지역은 수평적 광역 분포를 특징으로 한다. 논·밭·무덤·연못 등 각 토지 유형별로 출토될 유물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지표조사 단계에서 1912년 토지조사부와 현재 지형 데이터를 정밀 비교하는 작업이 조사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6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불광동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불광동 같은 농촌형 복합 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어떤 것들이 나올 수 있을까. 논 110필지에서는 수로 구조물의 석열, 보와 관련된 나무 말뚝 흔적, 농기구류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논 퇴적층은 혐기성 환경을 형성하기 때문에 유기물이 부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목제 농기구, 짚 등 유기물이 보존된 사례가 국내 다른 발굴 현장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밭 284필지에서는 경작과 관련된 토층 변화, 시비의 흔적, 작물 저장용 소형 토기, 밭 고랑의 흔적이 나올 수 있다. 밭고랑 구조가 확인되면 당시 어떤 방식으로 농사가 이루어졌는지 복원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 발굴을 넘어서 생업 방식과 농업 기술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무덤 3필지에서는 이야기가 더 풍부해진다. 조선 시대 분묘 조사에서는 묘비, 지석, 관 못, 복식류, 부장용 도자기, 심지어 미라가 발견된 사례까지 있다. 불광동의 무덤 필지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 어떤 가문과 연결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 공씨나 오씨 가문처럼 불광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집안의 묘역이라면, 그 안에서 가문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연못 자리에서는 수변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층에서는 물과 관련된 도구들, 우연히 빠진 장신구나 생활 도구들이 퇴적된 채로 발견될 수 있다. 연못은 물을 모아두는 공간인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고 일상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퇴적층에 눌려 있을 수 있다.


7성공 사례 — 비슷한 땅에서 역사가 올라온 순간들



불광동의 발굴 가능성이 막연한 상상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비슷한 조건의 땅에서 실제로 역사가 올라온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 은평구에서는 2006년부터 진행된 은평뉴타운 사업 부지 발굴조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조선 시대 민묘 수백 기와 함께 건물지, 수로, 우물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류와 지석은 당시 서울 북서쪽 외곽 지역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다. 이 발굴은 아파트 개발 예정지였던 농촌형 부지에서 얼마나 풍부한 역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는지를 증명한 대표적 사례다.

경기도 화성시 발안리 일대의 논 발굴 조사에서는 고려 시대 이전의 경작 흔적과 수리 시설이 확인되었다. 논 퇴적층에서 출토된 씨앗류 분석을 통해 당시 재배했던 작물의 종류까지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조사들은 논밭이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와 생활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불광동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나 있지만,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구역이나 재개발 예정 지역에서라면 1912년 토지조사부가 보여 주는 그 풍경의 흔적을 찾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시굴조사로, 그리고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접근이 그 기회를 살리는 방법이다.

성공 사례 · Success Case

은평뉴타운 발굴 — 아파트 부지에서 조선의 마을이 나왔다

2006년 이후 진행된 은평뉴타운 조성 부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민묘 수백 기와 건물지, 수로,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불광동과 같은 은평구 내에서, 농촌형 토지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진행된 이 조사는 서울 서북부 외곽 지역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개발과 문화재 보존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이기도 하다.


8불광동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 불광동 어딘가에서 땅을 파면, 무엇이 나올까?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재개발이 반복된 서울 외곽 동네에서 무슨 유물이 나오겠냐고. 하지만 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파트 기초 공사가 닿지 않은 깊이, 도로 포장이 덮지 못한 구석, 지반이 교란되지 않은 층에 1912년의 흔적들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다.

489필지 중 논이었던 110필지 어딘가의 지층에는 벼를 키우던 흙의 결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무덤 3필지의 자리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지석이 묻혀 있을 수도 있다. 연못 925㎡의 퇴적층에는 어느 여름날 물가에서 잃어버린 빗살무늬 장신구 하나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공씨와 고씨와 김씨의 이름으로 기록된 그 필지들 어딘가에, 이름도 기억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하루가 눌려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눌린 시간을 꺼내는 행위다. 그것이 단순한 공사 전 의무 절차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기억을 지키는 최소한의 약속이라는 것을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불광동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 줄 때를 기다리며.

은평구 또는 서울 외곽 권역에서 개발·공사·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사업 부지의 문화재 지표조사 의무 여부를 반드시 먼저 확인하세요. 불광동처럼 논밭이 중심이었던 농촌형 부지는 도심 지역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유물 손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관련 정보는 국가유산청(khs.go.kr)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비용·일정·법적 절차 FAQ도 seoulheritage.org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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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HI
서울 HI
2025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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