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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은평구 진관동의 시간을 걷다🚶‍♀️

진관동 골목길에 발걸음을 옮기면, 바스락거리는 볏짚 냄새와 마주친다.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한가롭게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이, 110년 전 이 마을의 숨결을 살려낸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 우거졌지만, 당시엔 8필지, 무려 377,876㎡의 넓디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넓이는 축구장 50개를 합친 것보다도 넓다. 땅은 단순한 흙덩어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생존터전이자, 삶의 좌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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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동은 총 134필지, 176,751㎡의 면적을 가진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그 안을 채운 건 논, 밭, 그리고 삶을 지탱하던 대지였다.



논, 밭, 집: 토지 위에 얹힌 삶



  • 논(8필지 · 377,876㎡)


    바다 같은 논은 이 마을 밥상의 첫 시작이었다. ‘백성들의 배 속도 채워주고, 마을도 지키는 공간’—벼 한 포기가 자라기까지 물길과 손길이 엮여 있었다.

  • 밭(77필지 · 122,817㎡)


    고구마·무·배추… 비옥한 땅은 계절별 작물로 채워졌고, 그 옥수수 자락 곁엔 아이들의 웃음이 머물렀다.

  • 대지(집터·49필지 · 29,996㎡)


    하루하루의 삶과 역사가 담긴 집터. 한 채 한 채에서 김장하는 소리, 논두렁 걸음소리, 마을 어귀 노인의 이야기꽃이 피었다.




진관동의 이름들: 김·박·이·차씨가 살아있었다



이 마을엔 김씨(37필지), 박씨·이씨(각각 13필지), 차씨(10필지)가 대지를 나눠 가졌다.


  • 김씨는 마을 경제를 사실상 지탱한 큰손이었고,

  • 박·이씨는 중심가에서 생업을 일궜으며,

  • 차씨는 마을 경작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들의 필지 분포는 단순한 땅의 소유를 넘어 권력과 결속의 기록이기도 했다.



국가와 기업의 흔적: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 국유지(12필지)


    제국이 직접 관리한 땅은 곧 행정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20필지)


    일제의 감시망이기도 했던, 식민지 지배의 손길. 이 땅들 위엔 단순한 지주-소작 구조가 아닌 ‘국가와 기업의 시선’이 덧씌워져 있었다.




왜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가



흔적 없는 흙이 웅성거리던 마을이, 오늘날 어떤 이야기로 바뀌어버렸을까?

서울문화재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렇게 사라지는 이야기들을 다 잡아 안아준다. 과거의 지층을 훑고, 기억을 복원하고,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다.



진관동 사례, 그리고 지금



2024년에 진관동 인근에서 시굴조사 중 발견된 토기 조각이 있다.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저걸 보니 우리 조상님도 여기서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례는 지표조사가 단순한 ‘땅파기’가 아니라 ‘마음 돌아보기’임을 증명한다.



동요를 통한 메시지: “조상님 손길, 다시 봐요”



“모래 속에 빛나던

조상님 손길, 다시 봐요

삶의 자취, 숨결 따라

우리 손으로 이어가요”


아이들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이 노래처럼, 문화재 지표조사는 세대를 잇는 노래다.



마무리하며



과거 진관동의 134필지가 준 이야기는 하나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가 바로 그 기록자다. 우리에게 시간을 잇는 마중물이 필요한 이유다.


진관동을 위한 작은 경고: ‘빨리 기록하고, 깊이 이해하라.’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심은 씻기듯 과거를 지운다. 그 안에서 흙먼지 틈에 숨어있는 이야기가 다시 살아나도록,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도록.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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