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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후암동 국유지 4,528㎡,그 땅이 품은 100년의 비밀

  • 5월 29일
  • 5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관용산구 후암동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문화유산 기관 완벽 가이드

1912년 용산구 후암동 국유지 4,528㎡,그 땅이 품은 100년의 비밀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땅 아래, 100년 전 역사가 잠들어 있다면?문화재 시굴·표본·지표조사의 모든 것을 지금 밝힌다.

4필지총 필지 수

4,528㎡총 면적

82.9%밭 비율

1912년지적 등록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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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땅 아래,100년 전 역사가 잠들어 있다면?"

서울 용산구 후암동. 지금은 카페와 빌라가 빼곡한 이 동네에, 1912년 일제강점기 당시 국유지로 등록된 땅 4,528㎡가 있었다. 그 땅은 지금 무엇을 품고 있을까.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들은 왜 이 작은 땅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걸까. 끝까지 읽으면, 당신의 도시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목차 — Table of Contents

011912년 후암동 국유지 통계 — 숫자가 말하는 역사

02후암동이란 어디인가 — 용산이 품은 격동의 역사

03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땅을 읽는 첫 번째 눈

04표본·시굴·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05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06실제 성공 사례 — 땅속에서 꺼낸 역사들

07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01

1912년 후암동 국유지 통계 — 숫자가 말하는 역사



4필지

국유지 총 필지 수

4,528㎡

국유지 총 면적

3필지

대지 (건축 가능)

776㎡

대지 면적 합계

1필지

밭 (농경지)

3,752㎡

밭 면적 — 전체 82.9%

이 숫자들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난다. 전체 4,528㎡ 중 대지는 고작 776㎡(17.1%)에 불과하고, 나머지 82.9%에 달하는 3,752㎡는 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후암동이 빽빽한 주거지로 가득 찬 도심 한복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농사를 짓는 밭 지대였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이러한 고지적(古地籍)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토지 이용 형태가 급변한 지역일수록 지하에 매장된 유산이 훼손 없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12년의 밭 3,752㎡는 곧 "아직 손대지 않은 역사의 보물창고"일 수 있다.


02

후암동이란 어디인가 — 용산이 품은 격동의 역사



후암동(厚岩洞)은 용산구 남쪽, 남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동네다. 한자 뜻 그대로 '두꺼운 바위가 있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도성 방어의 요충지로 기능했다. 한양 도성의 남쪽 관문인 숭례문(남대문)과 가깝고, 용산 일대는 예로부터 군사적 요지로 활용되어 온 땅이다.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2년은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 조선 전역의 토지를 지적도(地籍圖)에 등록하면서 '국유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땅이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용산 일대는 특히 일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대규모 토지 수탈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후암동 국유지 4,528㎡도 그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기록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도동2가'라는 지명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 행정구역 명칭은 일제가 조선의 전통 지명 체계를 해체하고 새롭게 개편한 흔적이다. 이런 지명 변천 과정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재 기초조사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땅의 이름이 바뀌어도, 땅 아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지표조사는 그 변하지 않는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03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땅을 읽는 첫 번째 눈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발굴'이라고 하면 당장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문화재 조사는 훨씬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거친다.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지표조사(地表調査)다.

지표조사란 말 그대로 땅 위에 나타난 흔적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문헌 조사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여 해당 지역에 매장 문화유산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한다. 역사 기록, 고지도, 항공사진, 과거 문헌 등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이 땅 아래에 무언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과정이다.

법적으로는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설공사를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매장유산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조사 결과는 보고서로 만들어 관할 지방자치단체와 국가유산청에 제출되며, 국가유산청은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존 조치를 통보한다.

1

문헌·고지도 조사

1912년 지적도, 조선시대 읍지, 일제강점기 행정 문서 등을 분석해 토지 이용 역사를 추적한다.

2

현장 답사 및 지표 확인

전문 조사단이 현장에 직접 나가 지형, 지질, 지표 유물 산포 여부 등을 육안으로 확인한다.

3

종합 보고서 작성 및 제출

조사 완료 후 20일 이내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국가유산청의 보존 조치 결정을 기다린다.


04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지표조사에서 매장 유산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이때부터가 진짜 발굴의 세계다. 단계는 크게 표본조사,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 세 가지로 나뉜다.

표본조사는 가장 제한적인 형태의 발굴이다. 조사 대상 면적의 2% 이내 범위에서 매장 유산의 종류와 분포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국가유산청의 허가 없이 해당 지자체의 지시에 따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후암동 국유지처럼 소규모 필지에서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 표본조사가 효율적인 출발점이 된다.

시굴조사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조사 대상 면적의 10% 이내 범위를 부분적으로 발굴하여 유적의 범위와 대략적인 성격을 파악한다. 표본조사보다 더 넓은 면적을 조사하기 때문에 유적의 윤곽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단계인 정밀발굴조사는 확인된 유적 범위에 대해 전면적이고 세밀하게 파고드는 조사다. 이 단계에서 유물이 쏟아지고,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순간이 탄생한다. 발굴을 통해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면 사적이나 지방기념물로 지정·보존되며, 출토된 중요 유물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도 한다.

흙을 한 겹씩 걷어낼 때마다 시간이 역주행한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발굴은 인류의 가장 느리고 가장 정밀한 타임머신이다.


05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매장유산 조사는 아무나 할 수 없다. 국가유산청에 정식 등록된 전문 조사기관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각 조사 단계마다 국가유산청 및 관할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 또는 허가가 필요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서울 전역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을 분석해 문화유산 매장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용산구 후암동뿐 아니라 송파구 거여동, 종로구 견지동, 은평구 구산동 등 다양한 사례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발굴조사를 의뢰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해당 기관이 국가유산청에 정식 등록된 조사기관인지, 조사 비용과 기간 산정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지, 조사 결과 보고서를 법정 기한 이내에 제출하는지가 핵심이다.

✓ 성공 사례 — 종로구 견지동 국유지 9,847㎡

1912년 기록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관청 관련 시설 흔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파악되었다. 발굴 전 기초조사만으로도 땅의 역사적 가치를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었으며, 이는 개발 계획에서 문화재 보존과 공사 일정을 효율적으로 조율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성공 사례 — 송파구 거여동 임야 3,008㎡

2,000년 역사를 품은 것으로 분석된 이 사례는 서울 외곽 지역에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역사 층위가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임야처럼 인위적 교란이 적었던 토지일수록 유산의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경우가 많다.


06

실제 성공 사례 — 땅속에서 꺼낸 역사들



발굴조사는 단순히 유물을 캐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잊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일이다. 최근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역사 위에 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용산 일대에서 진행된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기와 건물터와 생활 유구들이 다수 확인된 바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전의 지층에서 출토된 도자기 파편들은 이 지역이 조선 후기 서울 생활문화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음을 입증했다. 문화재 기초조사 단계에서 이런 가능성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에 조사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도 문화재 발굴조사가 개발 계획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례는 수없이 많다. 경주 월성 해자 발굴에서는 1,500년 전 신라의 목간(木簡)과 제사 유물이 쏟아졌고, 서울 풍납토성 조사에서는 백제 초기 왕성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모든 발견은 지표조사에서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적 과정의 산물이다.

후암동 국유지 4,528㎡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런 발견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는 점에 있다. 1912년에 밭으로 등록된 3,752㎡의 땅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 땅 아래 어떤 시대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까.


07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은 이미 평범한 독자가 아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역사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서울 어딘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건축·개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업 착수 전, 전문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에 문의해서 해당 부지에 대한 지표조사가 필요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서는 이야기다. 1912년 후암동 국유지 기록처럼,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작은 숫자 하나, 작은 땅 한 조각이 사실은 수백 년의 역사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 역사를 파괴하지 않고, 기록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역사는 박물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발밑에 있다. 한 삽의 흙이 천 년을 담을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곳곳의 1912년 지적 기록을 분석하며 잠든 역사를 깨울 준비를 하고 있다. 1912년 용산구 후암동 4,528㎡의 이야기는 시작일 뿐이다. 그 땅이 품은 진짜 이야기는 아직 땅속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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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동안, 서울 어딘가의 땅속에서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발굴조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그것은 사라져 버릴 뻔한 이야기에게 다시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다.1912년 후암동 국유지 4,528㎡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결국 하나다.과거를 소홀히 여기는 사회는 미래도 잃는다는 것.이 글이 당신에게 그 작은 깨달음의 씨앗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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