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국유지 2필지 기초조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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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토지조사사업 · 국유지 기초조사 · 송파구 문정동
국가가 가진 땅,14,657㎡가 품은 역사
1912년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국유지 2필지 기초조사 보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목을 축인 우물이 있던 그 땅.110년 전, 국가는 이 땅에 무엇을 남겼을까.그리고 땅 아래에는, 우리가 아직 꺼내지 못한역사가 잠들어 있지 않을까.
2국유지 필지 수
14,657총 면적 (㎡)
7,213논 면적 (㎡)
7,444지소 면적 (㎡)
1912토지조사 연도

목 차
문정동, 그 이름이 시작된 곳
1912년 토지조사사업과 문정동 국유지
국유지 통계 — 2필지 14,657㎡의 해부
논 1필지 7,213㎡ — 국가가 경작한 물의 땅
지소(池沼) 1필지 7,444㎡ — 연못이 숨긴 이야기
문정동의 지층 — 백제에서 조선, 조선에서 일제까지
왜 지금 이 땅을 조사해야 하는가
문화재 조사 4단계 — 지표에서 발굴까지
문정동 국유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물음
01
문정동, 그 이름이 시작된 곳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겨울, 청나라 군대에 쫓기던 인조는 남한산성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피란길에 잠시 멈춰 목을 축인 우물이 있던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물맛이 유독 좋았고, 마을에는 남평 문씨들이 오래도록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왕이 남긴 인상과 마을 사람들의 성씨가 합쳐져 '문정(文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내내 이 땅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해 있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훨씬 이전, 문정동은 한강 남쪽의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문정골과 헤경머리라는 자연 부락이 있었고, 논과 밭 사이로 농로가 이어졌으며, 마을 어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느티나무는 남아 있다고 한다. 옆에는 문정마을의 유래를 적은 비석도 세워져 있다.
1912년이라는 시점은 이 마을이 처음으로 제국의 시선 아래 낱낱이 기록된 해다. 일제가 조선 전역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며 모든 필지의 지목과 면적, 소유자를 장부에 새겨 넣었다. 그 거대한 행정의 빗살 아래, 문정동의 국유지도 공식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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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912년 토지조사사업과 문정동 국유지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조선 전역에서 진행한 대규모 지적 조사 작업이다. 표면상으로는 '근대적 토지 등록 제도의 정착'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를 위한 세금 기반 확보와 토지 수탈의 기초 작업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조선의 모든 토지가 처음으로 필지 단위로 구획되고, 지목이 부여되고, 소유자가 등록되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문정리에 해당하는 이 땅에서 국유지로 등록된 필지는 총 2필지였다. 총 면적은 14,657㎡. 약 4,434평에 해당하는 이 두 필지가 국가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다. 당시 국유지는 조선 왕조로부터 이어진 역둔토(驛屯土), 궁방전(宮房田), 둔전(屯田) 등 다양한 계통의 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정동의 이 두 필지가 정확히 어떤 계통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추가 고문서 조사가 필요하지만, 국유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중요한 단서다.
주목할 것은 지목의 구성이다. 논(畓) 1필지와 지소(池沼) 1필지 — 물과 관련된 두 가지 지목이 국유지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 이 조합은 문정동 일대가 수리(水利)와 깊이 연관된 땅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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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국유지 통계 — 2필지 14,657㎡의 해부
지목 | 필지 수 | 면적 (㎡) | 비율 (%) | 비고 |
논 (畓) | 1필지 | 7,213 | 49.2% | 수전, 벼농사 |
지소 (池沼) | 1필지 | 7,444 | 50.8% | 연못·늪, 수리시설 추정 |
합계 | 2필지 | 14,657 | 100% | 전량 국유지 |
국유지 면적 구성 비교
논 (畓)
49.2%
7,213 ㎡
지소 (池沼)
50.8%
7,444 ㎡
두 필지의 면적 차이는 231㎡에 불과하다. 거의 절반씩 나뉜 이 구성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논과 지소가 나란히 국유지로 등록된 것은, 두 땅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소(연못·늪)는 논의 관개(灌漑)를 위한 수리 시설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이 두 필지는 하나의 농업 단위로 묶여 있었을 공산이 크다.
국유지 두 필지의 총 면적 14,657㎡는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다. 1912년의 문정리 전체 규모에서 이 국유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이 두 필지가 농업 생산과 수리(水利) 양면에서 상당한 기능을 담당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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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논 1필지 7,213㎡ — 국가가 경작한 물의 땅

논(畓)은 조선 농업 경제의 핵심 지목이다. 물을 가두고 벼를 심는 이 땅은 조선 왕조 내내 가장 생산성이 높고, 그만큼 가장 치열하게 다퉈지던 땅이었다. 그런 논이 국가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필지가 단순한 민간 농지가 아니라, 국가 재정이나 군수물자 조달과 연결된 특수한 성격의 토지였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7,213㎡, 약 2,182평의 이 논배미가 1912년 당시 어떤 방식으로 경작되고 있었는지는 지적원도(地籍原圖)와 토지조사부를 함께 검토해야 정확히 알 수 있다. 다만 1963년 문정동이 서울시에 편입된 이후로도 한동안 대부분이 논이었고 비닐하우스 농업이 이어졌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땅의 농업적 성격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논이 수전(水田), 즉 물을 상시 담고 있는 형태였다는 점이다. 혐기성(嫌氣性) 환경이 형성되는 수전 아래에는 유기물이 분해되지 않고 축적되는 특성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목재 유구(遺構)나 씨앗, 식물 섬유 등 다른 환경에서라면 이미 사라져버렸을 유기물이 이 혐기성 토층 안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담긴 논 아래, 산소가 차단된 토층 속에서
천 년의 씨앗도 썩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
— 혐기성 환경의 유기물 보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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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지소(池沼) 1필지 7,444㎡ — 연못이 숨긴 이야기
지소(池沼)는 연못이나 늪을 가리키는 지목이다. 1912년 당시 토지조사에서 지소로 기록된 필지는 드물지 않았지만, 국유지로 등록된 지소는 훨씬 적다. 7,444㎡ — 약 2,252평에 이르는 이 연못 혹은 늪지대가 국가 소유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능성을 시사한다.
첫째, 이 지소가 인근 논(7,213㎡)의 관개를 위한 수리 시설로 기능했을 가능성이다. 조선시대 국가는 농업 생산력 유지를 위해 관개시설을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둔전(屯田)이나 역둔토 주변에 관개 연못을 두고 그 물을 활용했다면, 이 지소는 논과 한 쌍을 이루는 국가 농업 인프라였을 것이다.
둘째, 이 연못이 더 오랜 역사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다. 문정동 일대는 백제 한성기의 영역권 안에 있다. 백제인들이 이 지역에서 수리 활동을 했다면, 연못의 바닥 퇴적층 안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연못 퇴적물은 시간 순서대로 층위를 형성하며 쌓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시굴조사를 통해 이 지소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낼 수 있다.
실제로 지소 지목의 토지는 매장문화재 조사에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유형이다. 수분이 풍부한 퇴적 환경이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고, 오랜 기간 인위적 교란 없이 층위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소(池沼)와 매장문화재의 관계
연못과 늪지대는 자연적으로 유기물이 축적되는 환경이다. 과거의 목재 구조물, 씨앗, 화분(花粉), 나무 그릇 등이 퇴적층 안에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연못 주변은 선사 및 역사시대에 걸쳐 취락과 의례 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아, 주변 지역과 함께 종합적 지표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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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문정동의 지층 — 백제에서 조선, 조선에서 일제까지

문정동이 위치한 송파구 일대는 한반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바로 이웃한 풍납동에는 풍납토성이 있고, 석촌동에는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적석총이 줄지어 있으며, 몽촌토성은 백제 한성기의 왕성이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이 주목한다. 이 일대 전체가 사실상 한성백제의 심장부였다.
문정동은 그 심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1998년 구리시 아차산에서 고구려 요새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연구자들은 한강 이남 지역의 고대 유적 분포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문정동 주변에서 직접적인 백제 유구가 확인된 사례는 아직 많지 않지만, 지형과 지리적 맥락을 보면 이 지역이 역사적 공백지대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더 최근의 사례로는 2022년 보도된 내용이 있다. 문정동의 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 대해 송파구청이 매장문화재 표본조사가 필요하다는 검토 의견을 통보한 것이다. 이는 문정동 일대가 개발 전 반드시 매장문화재 조사를 거쳐야 하는 잠재적 유적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한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는 실제로 삼국시대 문화재가 대거 출토되어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1912년의 국유지 기록은 그런 맥락에서 더욱 값지다. 그 국유지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진 땅인지, 그 아래 어떤 지층이 잠들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지금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역할이다.
참고 성공 사례
풍납토성 발굴 — 아파트 재건축이 숨긴 한성백제의 왕성
1997년 송파구 풍납동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옛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발견으로 풍납동 일대가 문화재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한성백제의 왕성 구조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문정동 국유지 역시 같은 생활권에 있던 토지로, 사전 지표조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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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왜 지금 이 땅을 조사해야 하는가

문정동은 지금 거대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1970년대까지도 논밭이 이어지던 이 동네는 지금 법조단지와 대형 쇼핑몰, 고층 주거 단지가 들어선 서울 동남부의 핵심 개발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인 곳들이 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단지들, 신규 개발이 검토 중인 부지들 — 이 땅들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1912년의 국유지 기록은 그 확인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어떤 성격의 땅이었는지(논, 지소), 국가가 왜 이 필지를 직접 관리했는지,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 땅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 이런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본질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 공사를 시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이 조사를 통해 해당 지역의 문화재 분포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로 단계적으로 진행하여 지하 유산을 보호하게 된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은 이 사전 조사 단계에서 핵심적인 기초 자료가 된다.
매장문화재와 사전 조사의 법적 근거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토지에 건설 공사를 시행하는 자는 착공 전에 해당 지역의 매장문화재 유존 여부를 확인하는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동법 제6조). 국유지는 특히 역사적 맥락이 분명한 경우가 많아,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과 지목 분석이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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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문화재 조사 4단계 — 지표에서 발굴까지
문정동 국유지처럼 역사적 배경이 있는 땅에 대한 문화재 조사는 크게 네 단계로 진행된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조사 범위와 깊이를 결정하며, 불필요한 굴착을 최소화하면서도 유적을 빠짐없이 확인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01
문화재 지표조사
땅 위를 걷고 살피며 지형·지물·고문헌을 종합 분석. 유적 분포 가능성과 범위를 파악하는 첫 번째 눈.
02
시굴조사
좁은 구덩이(트렌치)를 파서 지하 문화층의 존재 여부를 확인. 유적 분포 범위와 성격을 개략적으로 파악.
03
표본조사
시굴 결과를 바탕으로 면적의 일부를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유적의 성격·규모·중요도를 구체화.
04
본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 발굴. 유구·유물의 기록·수습·보존 처리까지 포함한 완전 조사.
문정동 국유지의 경우, 지목 구성(논 + 지소)과 위치적 특성(한성백제 문화권 인근), 그리고 국유지라는 특수성을 종합하면 지표조사 단계에서부터 수리시설 관련 유구와 백제~조선시대 생활 유구를 염두에 두고 조사 설계를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지소 필지는 퇴적 환경 특성상 유기물 보존 가능성이 있어, 시굴조사 과정에서 퇴적층 샘플링과 화분 분석을 병행하는 것이 권장된다.
성공 사례
2021년 인사동 금속활자 발굴 — 땅 아래 조선의 활자가 있었다
2021년 서울 인사동 건물 신축 현장에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던 중, 조선 초기 금속활자와 동종 등 1,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상지로 알려진 조선의 인쇄 문화가 땅 아래에서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체계적인 문화재 사전 조사가 없었다면 이 귀한 유물들은 공사 과정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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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문정동 국유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물음

1912년 문정동 국유지 2필지, 14,657㎡. 숫자로만 보면 그냥 기록이다. 그런데 이 두 줄의 기록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국가의 논에서 일했을 소작농들, 연못가에서 물을 길었을 마을 사람들, 그 땅을 측량하며 장부에 이름을 새긴 이름 모를 관리들. 그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문정동은 눈부시게 달라졌다. 논이 있던 자리에는 사무용 빌딩이 들어섰고, 연못이 있던 곳에는 도로가 놓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땅 위의 이야기라면, 땅 아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제 사람들이 이 연못가에서 물을 퍼 올리던 기억이, 조선의 농부가 이 논두렁을 걷던 발자국이 — 아직 흙 속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1912년의 토지조사부는 그 기다림의 단서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단서를 따라가는 첫걸음이다. 이 조사가 지금 왜 필요한지, 이제 조금은 느껴지는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발밑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아래에
백제가 있고, 조선이 있고, 1912년이 있다.
조사는 그 층위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다.
문정동 국유지 문화재 조사, 함께 시작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을 기초 자료로 삼아 서울 25개 자치구의 역사 지층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에 관한 전문 상담은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연못은 메워지고
논은 아스팔트가 되었다.
하지만 흙은 기억한다.
그 위에 살다 간 모든 사람을,
그 위에서 피어났다 진 모든 생을.
우리는 다만 그 기억을
다시 물어볼 뿐이다.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문정동 기초조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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