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송파구 5,534필지 20,480,029㎡백제 왕도 위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쌓은 393필지
- 1일 전
- 7분 분량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송파구 전역 ·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
1912년 송파구 5,534필지 20,480,029㎡백제 왕도 위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쌓은 393필지
2,000년 전 백제 왕이 살던 땅. 1912년엔 김씨 1,019필지와 이씨 850필지의 밭이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393필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땅 아래에서 역사는 기다리고 있다.
5,534총 필지
20.5M총 면적(㎡)
393동척 소유 필지
50분묘지 필지
2,000+년 백제 역사
풍납토성 성벽 바로 옆 밭이 1912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다면, 그 땅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1912년, 조선 전역의 땅이 토지조사사업의 측량 기계 앞에 놓였다. 송파구는 그 기록에서 가장 풍부한 역사 서사를 가진 지역 중 하나로 남겨졌다. 총 5,534필지에 걸쳐 20,480,029㎡. 지금의 롯데월드타워, 올림픽공원, 석촌호수가 들어선 이 땅이 112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런데 이 기록에서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숫자가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393필지. 조선 농민들의 땅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국책 회사가 이미 1912년에 송파구에서만 393필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땅이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한성 백제의 심장부 위에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전 백제 왕이 살던 땅 위에서 일제의 수탈 기계가 돌아갔다. 그 이중의 역사가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목차
11912년 송파구 토지 통계 총괄
2지목별 상세 분석 — 9가지 땅의 얼굴
3동양척식주식회사 393필지 — 수탈의 지도
4성씨 분포 — 11개 성씨와 조선 사회의 단면
5소유자 구조 — 국유지·마을공유·프랑스인 1필지
62,000년 백제 왕도 — 송파가 특별한 이유
7분묘지 50필지 — 가장 중요한 고고학 단서
8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9송파구 발굴 성공 사례
10역사는 땅 위에서도, 땅 아래에서도 계속된다

1
1912년 송파구 토지 통계 총괄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기록한 송파구의 전체 현황이다. 5,534필지, 20,480,029㎡. 이 방대한 숫자 안에 어떤 구성이 담겨 있는지를 먼저 한눈에 본다.
5,534필지총 필지 수
20.5M㎡총 면적
2,906필지밭(최다)
1,576필지논
640필지대지
393필지동양척식주식회사
322필지임야
307필지국유지
65필지마을 공유지
50필지분묘지
38필지잡종지
1필지프랑스인 소유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율 | 비율 시각화 |
밭(田) | 2,906 | 11,204,057 | 54.7% | |
논(畓) | 1,576 | 5,645,390 | 27.6% | |
임야(林野) | 322 | 2,648,861 | 12.9% | |
대지(垈) | 640 | 554,561 | 2.7% | |
잡종지 | 38 | 324,239 | 1.6% | |
분묘지 | 50 | 95,025 | 0.46% | |
지소(池沼/연못) | 1 | 7,444 | 0.036% | |
사사지(寺社地) | 1 | 449 | 0.002% | |
합계 | 5,534 | 20,480,026 | ≈100% |
밭 54.7%, 논 27.6%, 임야 12.9%. 이 세 지목이 전체 면적의 95.2%를 차지한다. 나머지 4.8% 안에 640필지의 대지(마을과 집들), 50필지의 분묘지, 38필지의 잡종지, 1필지의 연못, 1필지의 사사지가 담겨 있다. 1912년 송파구는 한강 유역의 드넓은 농경 평야 지대였다. 그리고 그 농경지 위에 2,000년의 백제 역사가 묻혀 있었다.
특히 임야 322필지 2,648,861㎡는 주목할 만하다. 지금의 올림픽공원 남단 구릉, 남한산 자락, 한강변 구릉지에 해당하는 이 임야들은 백제와 조선 시대의 성곽, 봉수대, 산성 관련 유구가 분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 ✦ ✦
2
동양척식주식회사 393필지 — 수탈의 지도를 펼친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
393필지 — 1912년 송파구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조선 최대의 식민지 지주가 백제 왕도 위에 세운 것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4년까지 전국에 70,143정보를 보유한 조선총독부 다음의 최대 지주였다. 그 중 송파구에서만 393필지를 장악했다. 이것은 일제가 한성 백제의 심장부 땅을 얼마나 조직적으로 수탈했는지를 보여주는 냉혹한 숫자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는 1908년 일제가 설립한 식민지 수탈 전담 국책 회사다. 표면적 목적은 조선 척식 사업이었지만 실체는 토지를 강제 취득해 일본 농민을 이주시키고 조선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구조적 수탈 기제였다. 동척에 소작을 내는 농민들은 50%가 넘는 고율 소작료를 감당해야 했다.
1912년 송파구의 동척 393필지는 전체 필지의 약 7.1%에 해당한다. 숫자로만 보면 작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동척이 송파구에서 어떤 땅을 골랐는지를 보면 다르다. 한강변의 비옥한 논과 밭, 교통 요지의 대지가 우선 타깃이었다. 농업 생산성이 높은 땅부터 잠식해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동척 393필지와 고고학의 교차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취득한 토지는 대개 비옥한 농경지나 교통 요지였다. 이런 땅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집중적으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즉 동척 소유 토지 구역은 매장문화재 분포 가능성이 높은 지역과 상당 부분 겹칠 수 있다. 1912년 동척 소유 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적도와 대조하여 조사 우선 구역을 설정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다.

3
성씨 분포 — 11개 성씨가 그린 1912년 송파의 사회 지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성씨 분포는 1912년 송파구 사회의 살아 있는 지도다. 영등포의 이씨 최다와 달리 송파는 김씨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려 11개 성씨가 100필지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송파구의 인구 밀도와 씨족 마을 다양성을 보여준다.
김씨1,019필지1위 · 최다
이씨850필지2위
윤씨183필지3위
전씨179필지4위
박씨154필지5위
최씨128필지6위
임씨121필지7위
한씨117필지8위
민씨114필지9위
문씨109필지10위
조씨100필지11위
김씨 1,019필지와 이씨 850필지가 1·2위를 나란히 차지한다. 이 두 성씨만 합쳐도 1,869필지다. 하지만 이번 데이터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윤씨 183필지와 민씨 114필지의 존재다. 조선 시대 한강 유역의 사대부 가문 중 윤씨와 민씨는 경기 일대에 넓은 토지를 소유했던 상층 양반 가문이다. 이 두 성씨의 토지가 100필지를 넘는다는 것은 송파구 일대에 조선 후기 양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대부 집성촌의 흔적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양반 가문의 분묘는 일반 농민의 묘보다 훨씬 정교하며, 묘지석(墓誌石), 회곽(灰槨), 목관에 부장된 도자기류, 금속 유물 등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분묘지 50필지의 상당수가 이 가문들의 묘역일 가능성이 있다.
전씨 179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지역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전씨 가문의 토지가 이 정도 규모라면, 지금의 송파구 어딘가에 전씨 집성촌의 마을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씨족 마을 위치는 1912년 대지 640필지의 분포 패턴을 분석해 추정할 수 있으며, 이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문헌 분석 과제가 된다.
✦ ✦ ✦
4
소유자 구조 — 국유지·마을공유·그리고 프랑스인 1필지
1912년 송파구 토지를 소유자 유형별로 분류하면 다층적인 식민지 사회의 단면이 드러난다.
조선인(성씨)
약 4,759필지 (86.0%)
86.0%
동양척식(주)
393필지 (7.1%)
7.1%
국유지
307필지 (5.6%)
5.6%
마을 공유지
65필지 (1.2%)
1.2%
일본인
9필지
프랑스인
1필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 공유지 65필지다. 영등포의 10필지, 성북동의 사례와 비교해 송파구의 마을 공유지는 압도적으로 많다. 65필지의 마을 공유지는 송파구 일대에 공동체 문화가 얼마나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마을 공유지에는 마을 제당(祭堂), 공동 우물, 씨족 회의 공간, 장터 등이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공간들은 수백 년간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으며, 그 아래에는 생활 유구가 풍부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프랑스인 소유 1필지. 이 단 하나의 기록이 놀랍다. 1912년 송파구에 프랑스인이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이 교회 부지나 묘지 용도로 토지를 취득한 사례가 있었다. 만약 이 1필지가 프랑스 선교사와 관련된 토지라면, 조선 말기 천주교 역사와 연결되는 근대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국유지 307필지의 고고학적 의미
송파구의 국유지 307필지는 조선 왕실 또는 중앙 관청이 직접 관리하던 땅이다. 한성 백제의 풍납토성·몽촌토성 일대는 조선 시대에도 수전(水田) 경작과 함께 역사 유적 보호 차원에서 국가 관리 대상이었다. 국유지 307필지 중 상당수가 이 유적 주변에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백제 유적층과 직접 연결되는 문화재 조사 대상지가 된다.
5
2,000년 백제 왕도 — 송파가 한국 고고학의 최전선인 이유

송파구는 한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곳이 백제의 첫 번째 수도,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둘레 3.5km에 달하는 백제 최대의 평지 토성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서 3중 환호(環壕)가 발견되어 백제 왕성의 출발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 남쪽에 위치한 또 하나의 백제 성곽으로, 두 성이 함께 한성 백제의 이중 도성 체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은 백제 초기 왕과 귀족의 무덤으로,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 함께 발견되어 백제 건국 집단의 기원을 추적하는 핵심 단서가 됐다.
1912년 기록에서 송파구의 분묘지 50필지는 이 백제 유적들과 지리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조선 시대 농민들이 밭으로 이용하던 땅 아래에 백제의 무덤이 잠들어 있는 경우가 실제로 발굴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다. 1912년의 토지조사부 기록은 그 땅들의 초기 지표 상태를 문서로 남긴 소중한 자료다.
6
분묘지 50필지 95,025㎡ — 가장 중요한 고고학 단서
1912년 송파구의 분묘지는 50필지 95,025㎡다. 영등포의 13필지 46,899㎡와 비교하면 필지 수는 4배, 면적은 2배가 넘는다. 그리고 성북동의 분묘지가 전혀 없었던 것과 대조하면 송파구의 분묘지 밀도는 서울에서도 특별히 높은 수준이다.
이 차이는 지형과 역사에서 온다. 한강 유역의 충적 평야에 위치한 송파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집중적으로 살던 땅이었다. 그 오랜 역사만큼 죽은 자를 묻는 공간도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조선 시대에 이미 문헌에 등장하는 씨족 마을들의 선산이 이 50필지 안에 담겨 있다.
분묘지 50필지 95,025㎡ 중 일부는 백제 고분군과 지리적으로 겹칠 수 있다. 석촌동 고분군이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 이 일대에는 조선 시대 무덤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백제 고분 위에 조선 후기 분묘가, 그 위에 일제강점기 묘지가 중층으로 형성된 복합 유적 가능성이 있다. 이런 복합 유적지에서는 시굴조사의 트렌치 설계가 특히 중요하다. 층위를 무너뜨리지 않고 각 시대의 유구를 분리 기록하는 기술이 요구된다.

✦ ✦ ✦
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 송파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이유
2,000년 백제 왕도의 유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393필지 수탈 역사, 50필지의 분묘지, 11개 성씨의 씨족 마을, 프랑스 선교사와 연결될 수 있는 1필지. 이 모든 것이 20,480,029㎡의 땅 위에, 그리고 그 땅 아래에 존재한다.
송파구에서 어떤 개발 행위가 이루어지든,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다. 특히 풍납토성·몽촌토성·석촌동 고분군의 보호구역과 그 주변은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조사 단계 | 송파구 핵심 적용 지점 | 기대 성과 |
문화재 지표조사 | 동척 393필지 위치 현장 확인·분묘지 50필지 현황·백제 유적 인접 여부·마을 공유지 65필지 성격 파악 | 조사 우선 구역 선정 |
시굴조사 | 분묘지 트렌치로 복합 문화층 확인·논 지역 백제~조선 유구 층위 파악·임야 구릉 산성 관련 석축 확인 | 유구 성격·층위 확인 |
표본조사 | 씨족 집성촌 주거 유구 선택 발굴·마을 공유지 제당·우물 유구 확인·프랑스인 필지 근대 유물 조사 | 유적 범위·성격 파악 |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기록·보고서·국가유산청 보고·보존 결정·한성백제박물관 연계 전시 계획 | 역사 복원 완성 |
8
송파구 발굴 성공 사례 — 역사는 이미 쏟아지고 있다
송파구는 한국 고고학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발굴 성과들을 낸 지역이다.
성공 사례 01
풍납토성 발굴 —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드러난 백제 왕성
1997년 풍납동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대규모 백제 유물층이 발견됐다.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한성 백제의 핵심 증거였다. 이후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기원전 2세기부터의 문화층, 백제 왕성 건물지, 대형 창고지 등이 확인됐다. 이 발굴이 서울이 2,000년 역사 도시임을 입증했다.
성공 사례 02
석촌동 고분군 추가 발굴 — 돌무지무덤 20기의 새로운 발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에서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새로운 돌무지무덤 20여 기가 추가로 발견됐다. 무덤 안에서는 백제 초기 역사를 알려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성과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1912년 분묘지 기록과 현재 지적도를 대조해 조사 구역을 설정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성공 사례 03
몽촌토성 올림픽 전 발굴 — 3중 환호와 백제 출발점의 확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올림픽공원 안의 몽촌토성 발굴이 진행됐다. 이 발굴에서 토성 내부에 세 겹의 환호(環壕)가 발견됐고, 4~5세기 백제 토기류가 대거 출토됐다. 대규모 개발 전에 실시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 귀중한 유적을 지켜냈다. 지금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내에 보존되어 시민들이 즐기는 역사 공간이 됐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백제 왕도 송파 20,480,029㎡,
2,000년의 역사를 전문가와 함께 발굴하세요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 분석부터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까지. 서울 25개 구 매장문화재 조사 전문 기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9
역사는 땅 위에서도, 땅 아래에서도 계속된다
1912년 송파구 토지조사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5,534필지, 20,480,029㎡. 김씨 1,019필지, 이씨 85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393필지. 분묘지 50필지. 프랑스인 1필지.
이 숫자들 하나하나가 사람의 이야기다. 김씨 집안의 논에서 자라난 벼가 밥상에 오르고, 이씨 집안의 밭에서 할머니가 고구마를 캐던 그 일상이 있었다. 동척의 측량 기사가 들어왔을 때 그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 아래에는 2,000년 전 백제 왕의 궁전이 있었고, 왕족의 무덤이 있었으며, 한강을 오가던 상인들의 생활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지금도 땅 속에 있다. 풍납토성의 성벽 흙 속에, 석촌동 고분의 돌무더기 아래에, 조선 농민들의 분묘 속에. 그것들을 꺼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발굴조사이며, 그것이 바로 역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다.
김씨 1,019필지, 이씨 850필지,
동척 393필지, 분묘 50필지.
백제 왕이 살던 땅 위에서
조선 농민이 벼를 심고
일제의 장부가 그 이름을 지웠다.
그러나 땅은 기억한다.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다.
— 송파구 5,534필지의 2,000년 이야기를 위해
오늘도 송파구 어딘가에서는 땅이 열린다. 백제의 토기 파편이, 조선 사대부의 묘지석이, 이름 없는 농민의 호미가 햇빛을 처음으로 만나는 그 순간.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송파구1912#동양척식주식회사#풍납토성#몽촌토성#석촌동고분군#문화재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문화재발굴기관#매장문화재#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한성백제#백제왕도#seoulheritag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