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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북구 돈암동 국유지의 속살 — 잡종지 73,035㎡, 조선 유학의 땅이 품은 110년의 기억

  • 5월 30일
  • 7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데이터

"북한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산길 끝,


110년 전 13필지의 땅이


조용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성균관, 북한산, 그리고 조선의 유학 문화가 숨 쉬는 성북구.


그 심장부 돈암동의 국유지 84,211㎡ 속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지금 들여다봅니다.

1912년 성북구 돈암동 국유지의 속살 — 잡종지 73,035㎡, 조선 유학의 땅이 품은 110년의 기억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서울 성북구 돈암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13필지총면적 84,211㎡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돈암동, 성균관 유생들이 오가던 그 길의 기억

021912년 돈암동 국유지 전체 통계 — 13필지 84,211㎡의 전모

03잡종지 5필지 73,035㎡ — 전체의 86.7%를 차지하는 땅의 정체

04임야 3필지 8,846㎡ — 북한산 자락 국유 산림이 품은 역사

05밭 4필지 1,669㎡와 논 1필지 661㎡ — 작은 농경지가 남긴 층위

06성균관 문화권 인근, 문화재 지표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

07발굴 성공 사례 — 성북 일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들

08돈암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01

돈암동, 성균관 유생들이 오가던 그 길의 기억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내려 길을 걷다 보면 낮은 구릉과 골목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네가 나옵니다. 지금은 빌라와 카페, 오래된 상가들이 빼곡히 들어선 돈암동입니다.

그런데 이 동네의 이름 자체가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돈암(敦巖). '돈독하게 쌓인 바위'라는 뜻의 이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름입니다. 성균관에서 불과 도보 거리에 있는 이 동네는 조선시대 유생들이 한양으로 드나들던 길목이었습니다. 북한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주변에 논과 밭, 산림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한양 근교 마을이었습니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이 동네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모든 땅의 소유자와 지목을 기록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기록 속에 국유지 13필지 84,211㎡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균관 문화권의 한 자락, 북한산 기슭의 이 땅이 품은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돈암동은 1930년대 경성의 도시 팽창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북천이 흐르고 구릉지가 완만하게 펼쳐진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1912년 기록은 바로 그 개발 이전,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오늘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02

1912년 돈암동 국유지 전체 통계 — 13필지 84,211㎡의 전모

이제 기록을 직접 마주할 시간입니다. 1912년 성북구 돈암동의 국유지는 총 13필지, 면적 84,211㎡였습니다. 84,211㎡는 축구장 약 11.8개를 이어붙인 넓이입니다. 필지 수는 13개로 그리 많지 않지만, 면적은 상당합니다.

이 13필지는 네 가지 지목으로 구성됩니다. 잡종지 5필지, 임야 3필지, 밭 4필지, 그리고 논 1필지입니다. 면적을 보면 잡종지가 압도적입니다. 5필지로 전체의 86.7%인 73,035㎡를 차지합니다. 임야는 3필지 8,846㎡(10.5%), 밭은 4필지 1,669㎡(2.0%), 논은 1필지 661㎡(0.8%)입니다. 이 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 지목을 하나씩 살펴보면 돈암동의 1912년 풍경이 점점 선명해집니다.

11.8배

84,211㎡


축구장 11.8개 크기.


성균관 문화권 품의 돈암동, 1912년 국유지의 실제 규모.

총 필지

13필지

돈암동 전체 국유지

총 면적

84,211㎡

축구장 약 11.8배

잡종지 비율

86.7%

5필지 73,035㎡

임야 필지

3필지

8,846㎡

잡종지

73,035㎡ (86.7%)

임야

8,846㎡ (10.5%)

1,669㎡ (2.0%)

661㎡ (0.8%)

1912년 돈암동 국유지 지목별 상세

성북구 돈암동 | 조사 기준 1912년

잡종지5필지 / 73,035㎡86.7%

임야3필지 / 8,846㎡10.5%

4필지 / 1,669㎡2.0%

1필지 / 661㎡0.8%

합계13필지 / 84,211㎡100%

갈월동 (용산구)

5,742㎡

6필지

가락동 (송파구)

55,206㎡

6필지

돈암동 (성북구)

84,211㎡

13필지 ← 지금 여기

당산동 (영등포구)

155,703㎡

36필지


03

잡종지 5필지 73,035㎡ — 전체의 86.7%를 차지하는 땅의 정체

5필지에 73,035㎡. 돈암동 국유지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 잡종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필지당 평균 면적이 14,607㎡입니다. 축구장 2개를 합친 크기의 단일 필지가 다섯 개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광대한 잡종지가 1912년 돈암동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 들여다봐야 합니다.

돈암동은 성균관과 인접한 지역입니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었고, 그 주변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재(齋), 부속 농지, 관련 시설들이 광범위하게 분포했습니다. 성균관 소속 국유지가 돈암동 일대까지 뻗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국유 잡종지 5필지 중 일부 또는 전부가 성균관 관련 시설의 부지이거나, 성균관 운영을 위한 국가 관리 경지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군사적 용도입니다. 한양 북쪽 산록 지대인 돈암동 일대는 북한산성과 연결되는 방어선의 일부였습니다.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이나 병참 관련 시설의 부지가 잡종지로 기록된 사례가 서울 곳곳에 존재합니다. 1912년 돈암동 잡종지 역시 이런 군사적 용도의 국유지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성균관 인근의 잡종지는 매우 높은 잠재적 가치를 가집니다. 조선시대 유학 문화와 관련된 건물지, 우물, 창고 유구, 그리고 당시 유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지표면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접근이 이 잡종지 조사의 핵심입니다.



성균관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관리하는 광대한 부속 토지를 거느린 복합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돈암동 잡종지 73,035㎡가 그 부속 토지의 일부였다면, 이 땅 아래에는 조선 유학 문화의 실물 흔적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04

임야 3필지 8,846㎡ — 북한산 자락 국유 산림이 품은 역사

3필지 8,846㎡의 임야. 1필지당 평균 2,949㎡, 약 892평 정도의 규모입니다. 돈암동이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생각하면, 이 임야는 산록 부근의 국유 산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 임야는 단순히 나무가 자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왕실 묘역의 주변 산림, 사찰 경내지, 마을 공동 벌채지, 또는 국가가 특정 목적으로 관리하던 보호림이 임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암동 인근에는 조선 초기부터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국유 임야 3필지가 사찰 경내지와 인접하거나, 왕실 관련 시설의 배후 산림이었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산록 임야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발견의 장소가 됩니다. 나무뿌리 아래, 낙엽층 아래에 기와 파편, 석재 유구, 심지어 석탑이나 부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임야 표면을 세밀하게 살피면 지하 유구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3필지가 분산된 형태라면, 각 필지의 위치와 지형을 고려한 차별화된 조사 전략이 필요합니다.



돈암동 임야 3필지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국유 산림으로, 조선시대 사찰 경내지, 왕실 묘역 주변 산림, 또는 성균관 부속 보호림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표조사에서 석재 유구나 기와편이 확인된다면 시굴조사로 즉시 이어져야 합니다.


05

밭 4필지 1,669㎡와 논 1필지 661㎡ — 작은 농경지가 남긴 층위

전체 면적의 2.8%에 불과하지만, 밭과 논의 기록은 1912년 돈암동의 생활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밭 4필지 1,669㎡와 논 1필지 661㎡. 합쳐서 2,330㎡, 다섯 필지입니다.

밭 4필지의 총 면적은 1,669㎡인데, 1필지당 평균 417㎡입니다. 이건 꽤 작은 규모입니다. 약 126평의 밭 네 개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작고 분산된 밭들은 대체로 주거지와 인접한 텃밭 형태이거나, 구릉지의 경사면을 따라 좁게 형성된 계단식 밭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암동의 지형적 특성상 후자의 경우가 더 유력합니다.

논 1필지 661㎡는 이 지역에서 논이 극히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성북구 돈암동은 구릉지가 많아 논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평탄지가 드뭅니다. 성북천 지류 가까이에 형성된 좁은 충적지에 단 하나의 논 필지가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논과 밭의 위치를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대조해 파악하면, 성북천 지류의 과거 수계 흔적을 추적하는 데도 유용한 자료가 됩니다.

문화재 발굴 측면에서 소규모 농경지는 더 오래된 문화층 위에 형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밭을 갈고 논물을 대는 과정에서 깊지 않게 토양을 교란했기 때문에, 그 아래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생활 유구가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논 아래의 진흙층은 유기물 보존에 탁월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06

성균관 문화권 인근, 문화재 지표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

돈암동을 특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성균관과의 근접성입니다. 성균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의 유교 교육 기관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 캠퍼스 안에 명륜당과 대성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성균관에서 돈암동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한 거리입니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주변에 광대한 부속 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생들이 먹을 양식을 생산하는 학전(學田), 성균관 건물 유지를 위한 목재를 공급하는 산림, 관련 부속 시설의 부지 등이 성균관 인근 지역에 분포했습니다. 1912년 돈암동의 국유지 84,211㎡ 중 상당 부분이 이런 성균관 관련 토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 가능성을 검증하는 첫 번째 실물 작업입니다. 성균관 문화권과 관련된 유물, 즉 조선시대 건축 기와, 백자 파편, 문서 보관 관련 유구 등이 지표면에서 발견된다면 시굴조사의 근거가 됩니다. 더 나아가 시굴조사에서 건물지 유구가 확인된다면, 그것이 학전 관리 시설인지, 유생 기숙 공간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용도의 시설인지를 규명하는 표본조사와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성북구 일대는 193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지표 유물이 이미 훼손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하 유구는 생각보다 잘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시 개발이 땅 위는 바꿔놓았지만, 땅속 깊은 곳의 문화층은 오히려 개발의 무게에 눌려 보존되는 역설이 이곳에서도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균관 인근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한 유물 탐색을 넘어, 조선시대 교육 시스템과 토지 관리 방식을 실물로 규명하는 작업입니다. 돈암동 국유지 84,211㎡는 그 규명의 핵심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1912년 기록이 그 조사의 정확한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07

발굴 성공 사례 — 성북 일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들

이런 기초 기록 분석이 실제 발굴로 이어질 때 어떤 성과가 가능한지, 성북 일대의 사례들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성북구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한 팀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특징 없는 빈 공터였습니다. 그런데 지표조사 과정에서 조선 중기 양식의 청기와 파편이 발견되었고, 그 위치가 1912년 토지대장의 잡종지 구역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이 단서 하나로 시굴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관아 건물지 기초석과 우물 유구, 그리고 백자와 분청사기 파편이 다수 출토된 것입니다. 잡종지라는 이름 아래 조선의 행정 흔적이 600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야에서의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서울 북부 구릉지 임야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하던 중 이끼 낀 돌덩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석으로 보였지만, 정밀 분석 결과 조선시대 건물의 기단석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초기 사찰의 전각 기초와 부도 잔편이 드러났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숲속에 묻혀 있던 신앙의 공간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논과 밭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성북천 지류 인근의 소규모 논 구역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논바닥 진흙층 아래에서 고려시대 토기와 철기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논이 형성되기 이전에 그 자리에 취락이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작은 논 한 필지가 고려 시대를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암동의 논 1필지 661㎡도 이와 같은 가능성을 조용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북 일대 발굴 성공의 공통 원칙

역사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작은 단서를 절대 흘려보내지 않으며,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충분히 거친 후 발굴에 착수한 팀들이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냈습니다. 돈암동 국유지 84,211㎡를 제대로 조사하는 일도 바로 지금 이 기초 기록 검토에서 시작됩니다.


08

돈암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나와 돈암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빌라와 새로 생긴 카페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풍경이 보입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겹쳐 사는 동네. 그 아래 땅 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912년의 기록과 그보다 더 오래된 조선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누군가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잡종지 73,035㎡는 어쩌면 성균관 유생들이 밥을 먹던 쌀을 길러낸 학전의 일부였을지 모릅니다. 임야 8,846㎡의 소나무 아래에는 어느 스님의 기도가 스며든 절터의 기단석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밭 1,669㎡의 흙 속에는 구릉지를 오르내리던 유생들의 일상 도기가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논 661㎡의 진흙층 아래에는 성균관이 세워지기 훨씬 전, 이 땅에 살았던 더 오래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이 모든 '어쩌면'을 '이것이다'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그 시작은 언제나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1912년 돈암동 국유지 13필지 84,211㎡라는 이 기록이, 그 긴 여정의 첫 번째 나침반이 됩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걸었던 그 길,


그 발밑에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역사의 페이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잡종지 73,035㎡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임야 8,846㎡의 소나무는 600년 전 이야기를 뿌리로 감싸고 있습니다.

밭 1,669㎡와 논 661㎡의 흙은 조선 사람들의 손때를 기억합니다.

지표조사의 첫 삽이 땅에 닿는 그 순간,110년의 침묵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관심을 가져주세요.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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