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역말의 집터 열아홉 자리와 산 세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역말의 집터 열아홉 자리와 산 세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37필지국유지 전체
59,405㎡국유지 총면적
19필지대지 (51.4%)
44.1%임야 면적 비중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는 국유지 37필지, 총 59,405㎡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대지 19필지 17,771㎡, 임야 3필지 26,205㎡, 밭 14필지 15,352㎡, 잡종지 1필지 76㎡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대지가 절반을 넘었고, 면적으로는 임야가 약 44%를 차지해 가장 넓었습니다.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역촌동 골목 아래,114년 전 열아홉 채의 집터가 나라의 땅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집터에는 누가 살았을까요.
왜 하필 나라의 땅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기록이, 지금 이 동네에서 땅을 파려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오늘 이야기는 단순한 숫자 정리가 아닙니다.
말발굽 소리가 끊이지 않던 옛 역마을, 그 마을이 남긴 마지막 장부를 펼쳐보는 일입니다.
끝까지 읽고 나면, 연서로를 걷는 발걸음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 거예요.

목차
1912년 역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역촌동 역사, '역말'이라는 이름에 숨은 길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왜 역마을의 국유지에는 집터가 많았을까?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이 기록이 쓰이는 순서
땅속 기억이 박물관이 된 성공 사례
오늘의 역촌동 위에 1912년을 겹쳐 보면
01
1912년 역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의 국유지는 37필지, 총 59,405㎡였습니다.
59,405㎡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죠.
평으로 바꾸면 약 17,970평입니다.
표준 축구장으로 치면 여덟 개를 조금 넘는 넓이예요.
동네 하나 안에 이만한 나라 땅이 37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1912년은 일제가 한반도 전체의 땅을 한 필지씩 측량하고 장부에 올리던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누구의 땅인지, 어떤 용도인지, 넓이는 얼마인지가 이때 처음으로 근대식 숫자로 고정됐어요.
그래서 이 시기 기록은 지금도 특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규모 개발로 지형이 바뀌기 전, 마을의 마지막 원래 모습을 담은 사진 같은 자료이기 때문이죠.
역촌동 37필지의 구성을 먼저 한눈에 보겠습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중 | 필지당 평균(㎡) |
임야 | 3 | 26,205 | 44.1% | 8,735 |
대지 | 19 | 17,771 | 29.9% | 935 |
밭 | 14 | 15,352 | 25.8% | 1,097 |
잡종지 | 1 | 76 | 0.1% | 76 |
합계 | 37 | 59,405 | 100% | 1,606 |
표 설명: 1912년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지목별 현황. 지목별 면적을 더하면 59,404㎡로, 원자료 총계 59,405㎡와 1㎡ 차이가 있습니다(검증 노트 참고).
면적 비중
임야
26,205㎡
대지
17,771㎡
밭
15,352㎡
잡종지
76㎡
필지 수 비중
대지
19필지
밭
14필지
임야
3필지
잡종지
1필지
두 막대를 나란히 놓으면 재미있는 엇갈림이 보입니다.
면적으로는 산이 1등인데, 필지 수로는 집터가 1등이에요.
넓은 산 세 덩어리, 그리고 작고 촘촘한 집터 열아홉 조각. 이 대비가 오늘 이야기의 핵심 단서입니다.
02
역촌동 역사, '역말'이라는 이름에 숨은 길
역촌동이라는 이름, 한자로 풀면 그대로 '역이 있던 마을'입니다.
여기서 역은 기차역이 아니에요. 조선시대 나랏일로 오가는 관리와 문서를 위해 말을 갈아 태우던 역참을 말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오래도록 '역말'이라고 불렀습니다. 관리들이 먼 길을 갈 때 말이 쉬어 가던 역이 있었다는 데서 동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지죠.
은평 일대는 한양 도성을 빠져나와 서북쪽, 개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로 이어지는 큰길의 초입이었습니다. 이 길목의 역참으로 연서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 역촌동을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 '연서로'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새벽마다 마구간에서 말 울음이 들리고, 마패를 내민 관리가 지친 말을 새 말로 바꿔 탑니다.
역에 딸린 사람들은 말을 먹이고, 길손을 재우고, 다음 역까지 문서를 실어 보냈어요. 역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국가 인프라였던 셈입니다.

19세기 말 근대식 우편과 통신이 들어오면서 역참 제도는 문을 닫습니다. 말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았고, 역에 딸려 있던 땅들도 고스란히 남았어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속하게 됐고, 1949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됩니다. 그러니까 1912년 기록 속 역촌동은 엄밀히 말해 서울이 아니라 고양군 땅이었다는 점,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1970년대 구획정리사업으로 지금의 반듯한 주택가가 만들어졌고, 이후 역촌1동과 역촌2동으로 나뉘었다가 2008년 다시 역촌동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03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19필지 17,771㎡였습니다.
37필지 가운데 19필지. 절반이 넘습니다.
필지당 평균 넓이는 약 935㎡, 평으로 280평 남짓이에요. 안채와 사랑채, 마당과 헛간, 텃밭 귀퉁이까지 품을 수 있는 시골 집터 크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합니다.
보통 마을에서 대지는 개인 소유가 많아요. 사람이 사는 집이니까요. 그런데 역촌동에서는 나라 소유의 집터가 열아홉 자리나 됐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나라 땅이 줄지어 있었다는 건, 이 마을이 처음부터 나라의 필요로 만들어진 마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바로 역마을이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는 7장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이미지 설명: 마당과 흙담, 작은 텃밭을 갖춘 집터들이 마을길을 따라 늘어선 모습. 국유 대지 19필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
문화유산 조사의 눈으로 보면 집터는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는 땅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 자리에는 구들의 흔적, 아궁이 자리, 부서진 기와와 백자 조각, 우물과 담장의 기초가 켜켜이 쌓여요. 땅 위의 집은 사라져도 땅 아래 생활의 층은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지 필지가 몰려 있던 구역은 개발 전 지표조사에서 특히 꼼꼼히 들여다보는 대상이 됩니다.
04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중 임야는 3필지 26,205㎡였습니다.
단 3필지인데 전체 국유지 면적의 44.1%를 차지합니다.
필지당 평균 8,735㎡. 대지 한 필지의 아홉 배가 넘는 크기예요.
역촌동 주변에는 지금도 앵봉산과 봉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이 남아 있습니다. 1912년의 국유 임야 세 덩어리는 아마 마을 뒤를 감싸던 이런 솔숲 언덕의 일부였을 거예요.
역마을에게 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땔감을 얻고, 말을 먹일 풀을 베고, 집을 고칠 나무를 구하던 생활의 창고였죠.

그리고 산은 무덤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한양 서북쪽 구릉지는 예부터 묘역이 많이 들어선 곳이에요. 은평 지역 개발 과정에서 조선시대 무덤이 대량으로 확인된 사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9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그래서 임야 필지가 포함된 개발 부지는 시굴조사 단계에서 분묘 유구가 나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둡니다. 숲 아래가 비어 있을 거라는 생각, 현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착각이에요.
05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중 밭은 14필지 15,352㎡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두 번째, 면적으로는 세 번째입니다.
필지당 평균 약 1,097㎡, 330평 남짓. 대지 한 필지와 비슷한 크기의 밭들이 열네 조각 흩어져 있었어요.
눈여겨볼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기록에는 국유 논이 한 필지도 없어요.
물을 대야 하는 논 대신 밭만 있었다는 건, 국유지들이 물길 가까운 저지대보다는 구릉과 마을 사이 비탈이나 둔덕에 자리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역마을의 밭은 말 먹이를 기르고, 역에 딸린 사람들의 식량을 대던 땅이었을 수 있습니다. 조선의 역참은 운영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역에 땅을 붙여 주는 방식으로 돌아갔거든요.
발굴조사 현장에서 밭은 의외의 보물 창고가 되기도 합니다. 오래 갈아엎은 경작층 아래에서 더 이른 시기의 생활면이 드러나거나, 밭고랑 흔적 자체가 당시 농법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기도 하니까요.
06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중 잡종지는 1필지 76㎡였습니다.
76㎡, 23평 정도. 원룸 두 칸 크기입니다.
37필지 중 가장 작은 땅이고, 면적 비중은 0.1%에 불과해요.
잡종지는 대지, 밭, 논, 임야 같은 정해진 지목 어디에도 딱 맞지 않는 땅을 묶어 부르던 이름입니다. 공터, 작은 창고 터, 길가의 자투리, 공동으로 쓰던 마당 같은 곳이 여기 들어가곤 했어요.
역마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상상이 더 커집니다. 말을 매어 두던 자리였을까요, 우물가였을까요, 짐을 부리던 공터였을까요.
장부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 붙이기 애매한 작은 땅이야말로, 조사자가 현장에서 직접 걸어 보고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되죠.
07
왜 역마을의 국유지에는 집터가 많았을까?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역촌동 국유지 37필지 중 19필지가 집터였을까요.
가장 설득력 있는 열쇠는 역둔토라는 땅입니다.
조선의 역참에는 운영비와 인건비를 대기 위한 토지가 딸려 있었습니다. 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터와 그들이 먹고살던 밭도 이 체계 안에 있었어요.
역참이 문을 닫은 뒤 이 땅들은 갈 곳을 잃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 후반, 대한제국 황실과 관청에 딸려 있던 역둔토는 국유지로 정리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결과가 1912년 장부에 그대로 찍혀 나온 겁니다. 역에 딸린 집터와 밭이 '국유'라는 이름으로요.
물론 장부에는 "이 땅은 옛 역참 땅이었다"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건 확정이 아니라, 지명과 지목 구성이 함께 가리키는 유력한 추정이에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소름 돋는 일이죠.
마을 이름이 기억하는 역사와, 측량 기사가 무심하게 적어 넣은 숫자가 100년 넘게 지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기록은 이렇게 서로를 증언합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역촌동은 이 시리즈에서 국유지 필지의 과반(51.4%)이 대지인 동으로 기록됩니다.
면적 1위(임야)와 필지 수 1위(대지)가 서로 다른 '엇갈림형' 구성입니다.
국유지 중 논이 한 필지도 없는 '무논형' 동입니다.
잡종지 76㎡는 역촌동 국유지 중 최소 단일 필지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1912년 은평구 신사동 국유지 편.
08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이 기록이 쓰이는 순서
"그래서 이 숫자가 지금 무슨 소용인데?"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답은 생각보다 아주 실용적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를 하려면, 공사 전에 그 땅에 매장유산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근거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예요.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8-1. 문화재 지표조사
땅을 파지 않고 하는 첫 조사입니다. 문헌과 옛 지도, 토지대장 같은 기록을 먼저 뒤지고, 현장을 걸으며 땅 위에 드러난 기와 조각이나 지형의 흔적을 살펴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쓰이는 단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역촌동처럼 국유 대지가 몰린 구역이 확인되면, 조사자는 그 자리를 '사람이 오래 살았던 곳'으로 표시해 두죠.
8-2.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보이면, 땅의 일부를 작게 파서 흙의 층위와 유물 포함 여부를 확인합니다. 넓은 부지 전체를 파기 전에 '어디를 봐야 하는지' 좁혀 가는 과정이에요.
8-3. 시굴조사
유적이 있을 만한 곳에 일정 간격으로 트렌치, 즉 긴 도랑 모양의 구덩이를 넣어 유구의 범위와 성격을 파악합니다. 집터 자리에서는 건물지와 아궁이, 산자락에서는 분묘가 확인되는 경우가 많아요.
8-4. 발굴조사
시굴조사에서 유적이 확인되면 그 범위를 전면적으로 조사합니다. 층을 하나씩 걷어내며 기록하고, 유물을 수습하고, 보존 방법까지 결정하는 단계예요.

이미지 설명: 주택가 한가운데 발굴조사 현장. 조사원들이 건물지 기초와 구들 흔적을 드러내고, 한 연구자가 옛 지적도를 현장과 대조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앞 단계 기록이 탄탄할수록 뒤 단계는 짧고 정확해져요. 반대로 1912년 같은 기초자료를 놓치면, 공사 도중 뜻밖의 유구가 튀어나와 공정이 멈추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건축주에게는 일정과 비용의 문제이고, 지역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문화재 발굴 기관과 발굴조사 전문가들은 조사 대상지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옛 토지 기록부터 펼쳐 봅니다. 이 시리즈가 동 단위로 국유지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09
땅속 기억이 박물관이 된 성공 사례
기초조사가 제대로 빛난 장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은평구 안에 있어요.
9-1. 은평뉴타운 부지, 수천 기의 조선 무덤
2000년대 은평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진관동 일대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무덤이 수천 기 규모로 확인되었고, 다양한 부장품과 묘제 자료가 쏟아져 나왔어요. 한양 서북쪽 구릉이 조선 사람들의 대규모 묘역이었다는 사실이 땅속에서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성과는 그냥 보고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발굴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의 역사를 시민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공사 전 조사가 지역의 박물관이 된 셈입니다.
9-2. 종로 공평동, 빌딩 아래 살아난 한양의 골목
도심 재개발 부지에서 조선시대 건물지와 골목길이 확인된 공평동 사례도 있습니다. 개발과 보존을 맞바꾸지 않고, 빌딩 지하에 유적을 그대로 남겨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공개했어요. 지금은 누구나 유리 바닥 위를 걸으며 수백 년 전 한양의 골목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공사 전에 묻고, 기록을 읽고, 정해진 순서대로 조사했다는 것. 그 덕분에 개발은 멈추지 않았고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역촌동의 열아홉 집터도 언젠가 같은 기회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때 1912년의 이 장부가 첫 번째 지도가 되어 줄 겁니다.
10
오늘의 역촌동 위에 1912년을 겹쳐 보면
지금의 역촌동은 빌라와 아파트, 시장과 학교가 빼곡한 전형적인 서울 주택가입니다.
한때 은평구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은 초등학교가 있었을 만큼, 사람의 온기가 짙은 동네예요.
하지만 연서로를 따라 걷다 보면 이상하게 길이 곧고 길게 이어진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말이 달리던 옛길의 방향이 지금 도로의 뼈대가 된 거죠.

이미지 설명: 해 질 녘 역촌동 골목에서 한 사람이 옛 지도를 들어 비추자, 1912년의 집터와 역마길이 오늘의 건물 위에 겹쳐 보이는 장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동네에서 공사 안내판을 보면 '문화유산 조사'라는 단어가 있는지 한 번쯤 살펴보세요. 오래된 집을 허물 때 기와나 도자기 조각이 나오면 버리지 말고 관할 구청이나 관련 기관에 알리는 것, 그게 시민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글처럼 동네의 옛 기록을 한 번 찾아 읽어 보는 것. 그 작은 관심이 모여 지역의 기억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검증 노트
필지 수: 대지 19 + 임야 3 + 잡종지 1 + 밭 14 = 37필지로 원자료 총계와 일치합니다.
면적: 17,771 + 26,205 + 76 + 15,352 = 59,404㎡로, 원자료 총계 59,405㎡와 1㎡ 차이가 있습니다.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의 반올림 차이로 보이며, 본문은 원자료 총계 59,405㎡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비중은 원자료 총계 59,405㎡를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입니다.
행정구역: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고, 1914년 은평면 관할을 거쳐 1949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습니다.
역둔토와 국유 대지의 연관성은 지명과 지목 구성에 근거한 추정이며, 개별 필지의 이전 소속은 원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37필지, 59,405㎡였습니다.
1912년 역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역촌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역촌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역촌동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역촌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는 총 37필지 59,405㎡였으며, 대지 19필지 17,771㎡, 임야 3필지 26,205㎡, 밭 14필지 15,352㎡, 잡종지 1필지 76㎡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역촌동의 테마
1912년 서울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임야·밭 면적 정리
1912년 역촌동 국유지 현황: 37필지 59,405㎡, 대지 19필지
역촌동 역사, 역말의 국유지 37필지에 남은 집터 열아홉 자리
1912년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됐을까? 3필지 26,205㎡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은평구 역촌동 국유지 지목별 현황
우리 땅, 공사 전에 문화유산 조사가 필요할까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절차와 기초자료가 궁금하다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지역별 기록을 확인해 보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중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당시 경기도 고양군 관할)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역촌동역사#은평구역촌동#1912년토지조사#역촌동국유지#은평구역사#역말#연서역#문화재지표조사#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문화재발굴#매장유산#문화재발굴기관#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
말은 떠나고이름만 남았다.
역말, 역말.새벽마다 불리던 그 이름 아래열아홉 채의 집이 숨을 쉬었다.
산 세 자락은 땔감을 내주고밭 열네 조각은 밥을 내주고작은 공터 하나는누군가의 쉼을 내주었다.
백 년이 지나그 자리에 우리가 산다.
오늘 당신이 걸은 연서로 어딘가,아직 이름 없는 아궁이 하나가조용히 당신의 발소리를 듣고 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역촌동 편seoulheritage.org ·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