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뼈를 붙이는 돌이 나던 고개, 아홉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1일 전
  •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뼈를 붙이는 돌이 나던 고개, 아홉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9필지국유지 전체

47,094㎡총면적 · 약 1.4만 평

3종지목 구성

66.0%임야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는 국유지 9필지, 총 47,094㎡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2필지 31,084㎡, 밭 5필지 15,328㎡, 대지 2필지 680㎡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66.0%가 임야, 32.6%가 밭으로, 논이 한 필지도 없는 고갯마을 특유의 산밭 중심 구성을 보여 줍니다.

이 고개의 돌은 부러진 뼈를 붙인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약이 되는 돌이 나던 고개가 있었습니다.

은평구 녹번동의 산골고개입니다.

산골이라 불린 이 광물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자연동으로, 뼈가 부러진 사람에게 갈아 먹이면 뼈가 잘 붙는다고 알려진 전통 약재였습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이 돌을 구하러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녹번이라는 동네 이름 자체가 이 푸른 광물의 빛깔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바로 그 고개 아래 마을의 1912년 국유지 대장을 오늘 펼칩니다.

아홉 필지, 47,094㎡.

그런데 이 대장에는 묘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논이 단 한 배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밭이 다섯 필지나 됩니다.

물 대신 돌과 흙에 기대어 살던 고갯마을의 사정이, 아홉 줄의 숫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목차

  1. 한눈에 보는 녹번동 국유지 핵심 요약

  2. 1912년 녹번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3. 녹번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4. 임야 2필지 31,084㎡, 산골고개의 산자락

  5. 밭 5필지 15,328㎡, 논 없는 마을의 살림 밑천

  6. 대지 2필지 680㎡, 고갯길 곁 두 집터

  7. 시리즈 속 녹번동 — 신길동 임야와 비교하면?

  8. 숫자로 다시 보는 녹번동 — 표와 그래프

  9.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10.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 한눈에 보는 녹번동 국유지 핵심 요약

바쁜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정리합니다.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국유지는 총 9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7,094㎡, 평수로 환산하면 약 1만 4천 평입니다.

지목은 세 종류입니다.

임야 2필지 31,084㎡, 밭 5필지 15,328㎡, 대지 2필지 680㎡입니다.

면적 비율로는 임야 66.0%, 밭 32.6%, 대지 1.4%입니다.

논과 잡종지가 전혀 없는, 산과 밭의 마을이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밭 5필지 15,328㎡, 면적 비율 32.6%. 지금까지 이번 연작에서 다룬 동네들 가운데 밭의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지는 기록입니다. 신정동은 밭이 3.1%, 신길동은 5.8%에 그쳤습니다. 또한 논 0필지는 도동2가 후암동에 이어 연속 두 번째로, 서울 외곽 구릉지와 도성 인접지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하게 해 주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2. 1912년 녹번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녹번동의 이름 유래에는 두 갈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나는 광물 이야기입니다.

고개 바위틈에서 나던 푸른빛 광물, 곧 산골의 빛깔에서 녹번이라는 이름이 왔다는 설입니다.

다른 하나는 녹봉 이야기입니다.

벼슬아치들이 나라에서 받은 녹봉의 일부를 이 고개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여, 녹을 나눈 고개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는 설입니다.

돌이 약이 되고, 녹이 나눔이 되는 고개.

어느 쪽 유래를 따르든 녹번은 베푸는 고개였던 셈입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한양에서 북서쪽으로 나가는 큰길, 의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 행렬과 장사꾼, 파발마가 이 고개를 넘었습니다.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군 관할이었습니다.

북한산 자락이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며 만든 구릉과 골짜기에, 밭을 일구며 사는 고갯마을이 앉아 있었습니다.



3. 녹번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녹번동의 국유지는 총 9필지, 47,094㎡입니다.

축구장 6개 반에 해당하는 크기입니다.

한 필지의 평균은 5,233㎡, 약 1,580평입니다.

시리즈의 앞선 기록들과 견주면 중간 규모입니다.

신정동의 45만 ㎡보다는 훨씬 작지만, 신길동의 1만 4천 ㎡보다는 세 배 이상 넓고, 후암동의 4천 5백 ㎡보다는 열 배 이상 큽니다.

아홉 필지의 구성은 단정합니다.

산 두 자락, 밭 다섯 뙈기, 집터 둘.

고갯마을 하나의 뼈대가 그대로 대장에 옮겨 적힌 모양새입니다.


4. 임야 2필지 31,084㎡, 산골고개의 산자락

면적의 3분의 2는 임야입니다.

2필지 31,084㎡, 전체의 66.0%입니다.

한 필지 평균이 15,542㎡, 4,700평에 이르는 큰 산자락입니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이 구릉들은 마을의 지붕이자 곳간이었습니다.

땔감과 솔가리, 산나물이 여기서 났고, 조상의 묘가 여기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녹번동의 산에는 다른 마을에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산골, 뼈에 좋다는 그 광물입니다.

바위틈에서 캐낸 푸른 돌을 얻으러 먼 데서도 사람들이 찾아왔으니, 이 산자락은 마을의 약방 노릇까지 한 셈입니다.

조선의 산림 관행에서 이런 산은 온 마을이 함께 쓰는 공유의 공간이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과 뒤이은 임야 정리를 거치며, 소유 문서가 없던 마을 산들은 대거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녹번동의 임야 두 필지 역시 그 흐름 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약을 내어주고 땔감을 내어주던 산이, 장부 위에서는 국가의 산이 된 것입니다.



5. 밭 5필지 15,328㎡, 논 없는 마을의 살림 밑천

이번 기록의 진짜 주인공은 밭일지도 모릅니다.

5필지 15,328㎡, 전체 면적의 32.6%입니다.

필지 수로는 아홉 필지 중 다섯, 절반을 넘습니다.

한 필지 평균은 3,066㎡, 약 930평입니다.

주목할 점은 논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갯마을의 지형에서는 물을 가두어 둘 너른 저지대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농사는 밭농사였습니다.

비탈을 일구어 보리를 심고, 조와 콩을 갈고, 감자와 채소를 거두는 살림.

다섯 뙈기의 국유 밭은 그 산밭 농사의 무대였습니다.

국유지가 된 뒤에도 경작은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소작으로 밭을 부치던 농민들은 봄이면 고랑을 타고, 가을이면 고개 너머 저자로 곡식을 내다 팔았을 것입니다.

시리즈 전체로 보아도 밭이 이만한 비중을 차지한 동네는 드뭅니다.

물의 마을에는 논이, 언덕의 마을에는 산이 대장을 채웠다면, 고개의 마을 녹번동에서는 밭이 대장의 절반을 채웠습니다.


6. 대지 2필지 680㎡, 고갯길 곁 두 집터

마지막 줄은 대지입니다.

2필지 680㎡, 한 필지 평균 340㎡, 약 103평씩입니다.

전체 면적의 1.4%에 불과하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가장 높은 땅입니다.

큰길이 지나는 고갯마을의 국유 집터라면, 길과 관련된 쓰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행인이 쉬어 가던 주막 자리였을 수도, 관에서 쓰던 작은 시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장은 용도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흥미로운 비교 하나는 남겨 둘 만합니다.

앞선 세 마을의 국유 대지가 각각 한 필지였던 것과 달리, 녹번동은 두 필지입니다.

그리고 103평이라는 크기는 후암동의 78평보다는 넉넉하고, 신정동과 신길동의 200평급보다는 아담합니다.

고갯마을의 집터는 도시와 농촌의 중간쯤 되는 몸집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7. 시리즈 속 녹번동 — 신길동 임야와 비교하면?

같은 임야 중심 마을인 영등포구 신길동과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신길동은 임야 2필지 10,297㎡로 비율 69.8%, 녹번동은 임야 2필지 31,084㎡로 비율 66.0%입니다.

비율은 엇비슷하지만 몸집은 세 배 차이입니다.

한강 가의 나지막한 언덕과 북한산 자락의 산줄기, 그 체급 차이가 숫자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경작지의 성격도 갈립니다.

신길동은 논 한 배미와 밭 한 뙈기가 균형을 이뤘지만, 녹번동은 논 없이 밭 다섯 뙈기로만 살림을 꾸렸습니다.

같은 산 아래 마을이라도, 물이 있는 언덕과 물이 귀한 고개는 이렇게 다른 대장을 남겼습니다.

백 년 전 측량 숫자들이 서울 외곽의 지형과 물길까지 복원해 주는 순간입니다.




8. 숫자로 다시 보는 녹번동 — 표와 그래프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장의 표로 정리합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임야

2필지

31,084

66.0%

15,542

5필지

15,328

32.6%

3,066

대지

2필지

680

1.4%

340

합계

9필지

47,094

100%

5,233

※ 면적 비율은 소수점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값입니다. 지목별 면적의 단순 합은 47,092㎡로, 제시된 총면적 47,094㎡와 2㎡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세 내용은 아래 검증 노트를 참고해 주세요.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관할이었으며, 현재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에 해당합니다.

면적 비율을 그래프로 보면 임야와 밭의 이인삼각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임야

66.0%

32.6%

대지

1.4%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 9필지 47,094㎡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것으로, 임야 2필지 31,084㎡, 밭 5필지 15,328㎡, 대지 2필지 680㎡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9.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검증 노트

본 시리즈는 모든 수치를 프로그램으로 교차 검산한 뒤 공개합니다.

첫째, 필지 수 검증입니다. 임야 2필지, 밭 5필지, 대지 2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9필지로, 제시된 전체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둘째, 면적 검증입니다. 지목별 면적을 모두 더하면 31,084 + 15,328 + 680 = 47,092㎡입니다. 제시된 총면적 47,094㎡와 2㎡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원자료 작성 당시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필지별 반올림 값이 누적되며 흔히 생기는 오차로 판단됩니다.

본 시리즈는 이런 차이를 임의로 맞추어 지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기초조사 자료의 생명은 정확성과 투명성이기 때문입니다.

10.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고갯마을의 아홉 필지 기록은 문화유산 조사의 눈으로 보면 단서의 보고입니다.

큰길이 지나던 고개는 예로부터 주막과 서낭당, 돌무더기 제사터가 자리 잡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 모든 단계의 출발점이 기초조사, 곧 옛 기록의 검토입니다.

1912년 대장 속 녹번동의 아홉 줄은 조사자에게 지도를 그려 줍니다.

임야 두 자락에는 옛 묘역과 채석의 흔적이, 밭 다섯 뙈기 아래에는 오랜 경작의 층위가, 고갯길 곁 집터 둘에는 길손을 맞던 건물의 주춧돌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은평구 일대는 뉴타운 개발 과정의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수천 기의 조선시대 분묘가 확인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서울 서북부의 산자락이 얼마나 두터운 역사의 층을 품고 있는지 이미 증명된 셈입니다.


기초조사가 만들어 낸 실제 성공 사례들

기록에서 출발한 조사가 실제로 무엇을 찾아냈는지, 세 장면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동대문운동장입니다.

운동장 철거에 앞서 옛 문헌과 지적 기록을 토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조선시대 군영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 이간수문이 땅속에서 온전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핵심 유적 전시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풍납토성입니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의 조사가 한성백제 왕성의 실체를 밝혀내며 한국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기록 검토와 시굴조사가 없었다면 2천 년 왕성은 지금도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 2021년 인사동입니다.

재개발 부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에 담긴 채 출토되었습니다.

정식 조사 절차가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실물을 서울 한복판에서 되찾아 낸 순간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 흙을 파기 전에 기록을 먼저 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정리한 녹번동의 아홉 줄도, 언젠가 이 고개 아래에서 시작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첫 페이지가 되기 위해 여기 남겨 둡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총 9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7,094㎡로, 약 1만 4천 평에 해당합니다.

Q2. 1912년 녹번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임야입니다. 2필지 31,084㎡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66.0%를 차지했습니다. 북한산 자락의 마을 산이 국유지로 편입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Q3. 1912년 녹번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밭은 5필지 15,328㎡로 전체 면적의 32.6%였습니다. 논이 전혀 없는 대신 밭이 필지 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갯마을 특유의 산밭 중심 구성입니다.

Q4. 녹번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고개 바위틈에서 나던 푸른빛 약용 광물 산골의 빛깔에서 왔다는 설과, 벼슬아치들이 녹봉을 나누어 준 고개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되는 기초조사의 핵심 문헌 자료입니다. 옛 산림, 경작지, 집터의 위치를 필지 단위로 파악해 조사 범위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활용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 총 9필지 47,094㎡였으며,


임야 2필지 · 밭 5필지 · 대지 2필지로 구성되어


논 없이 산과 밭으로 살림을 꾸린 고갯마을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개발 예정 부지의 문화유산 조사가 필요하신가요?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백 년의 기록을 읽는 것에서 시작하는 정확한 기초조사를 제공합니다.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현재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녹번동#은평구녹번동#녹번동국유지#산골고개#토지조사사업#문화재발굴#문화재발굴기관#문화재지표조사#문화유산지표조사#발굴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매장유산#은평구역사#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이 고개의 돌은 뼈를 붙였다.


그리고 이 대장의 숫자는


끊어진 시간을 붙인다.



산 두 자락, 밭 다섯 뙈기, 집터 둘.


아홉 줄로 남은 고갯마을 하나.



녹을 나누던 고개에서


오늘 우리는 기억을 나눈다.



부러진 것을 잇는 일이라면


이 마을은 이미 백 년 전부터


잘하던 일이었으니.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