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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부처의 빛이 머문 마을, 대지 열한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7월 14일
  • 6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부처의 빛이 머문 마을, 대지 열한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8필지국유지 전체

15,748㎡총면적

2종지목 구성

북한산 그림자가 내려앉는 골짜기, 절집의 등불이 마을 이름이 된 땅. 1912년의 불광동은 열여덟 장의 토지대장 위에 그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동네가 110여 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연신내역의 인파도, 불광천변의 산책로도 없던 시절. 그 시절의 불광동을 숫자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놀랍게도 그 답은 이미 존재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남긴 기록 속에 말이죠. 오늘은 그 기록을 한 장 한 장 펼쳐보겠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불광동이라는 땅의 첫 장부를 손에 쥐게 되실 겁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는 국유지 18필지, 총 15,748㎡가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11필지 9,762㎡, 밭은 7필지 5,986㎡였습니다. 즉, 불광동 국유지는 대지와 밭 두 가지 지목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지가 전체 면적의 약 62%를 차지해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대지 중심형 국유지 구조를 보여줍니다.


목차

  1. 불광동, 부처의 빛이 이름이 된 마을

  2. 1912년 불광동 국유지 전체 현황은 어땠나요?

  3. 불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4. 불광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5. 대지와 밭, 무엇이 얼마나 더 넓었을까?

  6. 데이터 검증 노트

  7. 시리즈 기록실 — 불광동이 세운 기록

  8.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9. 땅속 기록이 역사를 바꾼 실제 사례

  10. 자주 묻는 질문

  11. 한 줄 결론과 출처


1.불광동, 부처의 빛이 이름이 된 마을

불광동(佛光洞)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입니다. 부처 불(佛)에 빛 광(光). 북한산 자락에 자리했던 불광사라는 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전해집니다. 바위 벼랑 아래 등불을 밝힌 절집이 있었고, 그 불빛이 골짜기 마을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산이 깊으면 물도 맑습니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불광천이 되어 마을을 적셨고, 사람들은 그 물가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궜습니다. 산자락 마을 특유의 살림살이. 그것이 1912년의 장부에 어떻게 찍혀 있을까요.

한 가지 미리 짚어둘 점이 있습니다.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서울, 즉 경성부가 아니었습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에 속해 있었죠. 불광동이 서울에 편입된 것은 1949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읽는 기록은, 아직 '서울'이 되기 전 경기도의 산골 마을이 남긴 장부인 셈입니다.



2.1912년 불광동 국유지 전체 현황은 어땠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는 국유지 18필지, 총 15,748㎡가 있었습니다. 평수로 환산하면 약 4,760여 평. 축구장 두 개를 조금 넘는 규모의 나라 땅이 이 산골 마을에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국유지란 개인이 아닌 국가 소유로 등재된 토지를 말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소유자를 확정하는 사정(査定) 과정에서 국가 명의로 정리된 땅들이죠. 관유지였던 땅, 주인이 확인되지 않은 땅, 역둔토처럼 관청 운영에 쓰이던 땅이 여기에 포함되곤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지목 구성입니다. 불광동 국유지는 단 두 가지 지목, 대지와 밭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논도, 임야도, 잡종지도 장부에 없습니다. 산골 마을인데 논이 국유지 목록에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대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불광동 편의 핵심 관전 포인트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대지

11필지

9,762㎡

61.99%

밭(전)

7필지

5,986㎡

38.01%

전체 국유지

18필지

15,748㎡

100%

※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대지9,762㎡

61.99%

밭(전)5,986㎡

38.01%


3.불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11필지, 9,762㎡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61.99%. 필지 수로도 열여덟 필지 가운데 열한 필지, 61.11%에 해당합니다. 면적으로 보나 필지 수로 보나, 불광동 국유지의 주인공은 단연 대지였습니다.

대지란 집을 짓고 사는 땅, 즉 택지를 뜻합니다. 국유지의 절반 이상이 대지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땅 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라 소유의 집터 위에 초가를 얹고, 마당을 쓸고, 아이를 키우던 사람들. 관청 건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옛 역원이나 사찰 관련 부지가 국유로 넘어간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887.5㎡, 약 268평입니다. 시리즈에서 만나온 도심 대지들이 백 평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널찍한 편이죠. 산골 마을답게 집터 하나하나가 마당과 텃밭을 넉넉히 품고 있었다는 흔적입니다. 담장 너머로 장독대가 줄지어 있고, 마당 한쪽에 닭장과 헛간이 있는 그런 집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4.불광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 중 밭은 7필지, 5,986㎡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38.01%를 차지합니다. 대지가 삶의 공간이었다면, 밭은 그 삶을 먹여 살린 공간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논이 아니라 밭이라는 점입니다. 북한산 자락의 경사지에서는 물을 가두어야 하는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훨씬 유리했습니다. 보리와 조, 콩과 팥, 그리고 김장을 책임질 배추와 무. 산비탈을 일군 밭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가 이 마을의 한 해 살림을 지탱했을 겁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855.1㎡, 약 259평. 대지 평균과 거의 비슷한 크기입니다. 집터와 밭뙈기가 엇비슷한 규모로 나란히 장부에 오른 모습. 사는 땅과 먹는 땅이 균형을 이루던 산골 마을의 살림 구조가 숫자에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5.대지와 밭, 무엇이 얼마나 더 넓었을까?

이제 두 지목을 나란히 세워보겠습니다. 대지 9,762㎡ 대 밭 5,986㎡. 그 차이는 3,776㎡, 약 1,142평입니다. 대지가 밭보다 1.63배 넓었던 셈이죠.

이 비율이 왜 특별할까요. 시리즈에서 만나온 대부분의 동네에서 국유지의 중심은 논이나 밭 같은 농경지였습니다. 대지는 있어도 조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불광동은 정반대입니다. 대지가 62%로 주연을 차지하고, 농경지인 밭이 38%로 뒤를 받칩니다.

이는 불광동의 국유지가 '농장'이 아니라 '마을' 그 자체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국가 명의의 집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취락. 어쩌면 옛 절터나 관용 시설 주변으로 형성된 마을 부지가 통째로 국유지로 정리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장부의 숫자 하나가 마을의 성격 자체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지목별 필지 수 합계는 11 + 7 = 18필지로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 합계 역시 9,762 + 5,986 = 15,748㎡로 전체 면적과 오차 없이 일치합니다. 이번 불광동 편은 반올림 오차나 전사 오류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완전 정합 데이터입니다.


6.시리즈 기록실 — 불광동이 세운 기록

불광동 편의 기록

대지 비중 61.99% — 국유지 면적의 과반을 대지가 차지하는,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대지 중심형' 구조입니다.

지목 단 2종 — 대지와 밭만으로 구성된 단출한 지목 구성으로, 논이 국유지 목록에 전혀 없는 산골형 사례입니다.

대지 평균 887.5㎡ — 필지당 약 268평의 넉넉한 집터 규모로, 도심권 대지 평균을 크게 웃돕니다.

시리즈를 따라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종로의 붉은 기와 골목, 용산의 철길, 금천의 황금 들녘. 동네마다 장부의 표정이 달랐죠. 불광동의 표정은 '집'입니다. 나라 땅의 얼굴이 논밭이 아니라 사람 사는 집터였던 마을. 이 대목이 은평구 편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가 될지, 다음 동네들의 장부가 말해줄 것입니다.


7.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자, 여기서 질문 하나. 110년 전 토지대장이 오늘날 왜 중요할까요. 단순한 옛날이야기 소재가 아닙니다. 이 기록은 현행 문화유산 조사 제도의 출발점에 놓이는 기초자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매장유산 조사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문화재 지표조사.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과 문헌을 통해 유산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둘째, 표본조사. 대상지의 일부를 표본으로 선정해 확인하는 단계죠. 셋째, 시굴조사. 시험 삼아 좁은 면적을 파보는 단계. 넷째, 발굴조사. 본격적으로 유구와 유물을 드러내는 최종 단계입니다.

이 네 단계의 첫 관문인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검토하는 것이 바로 문헌 기록입니다. 1912년의 지목과 필지 구성은 그 땅의 옛 쓰임새를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죠. 불광동처럼 대지 비중이 압도적인 곳이라면, 옛 취락의 건물지, 담장 기초, 우물, 생활 유물이 땅속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우선 검토하게 됩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의 조사원들이 삽을 들기 전에 이런 장부를 먼저 펼치는 이유입니다.

특히 불광동 일대는 재개발과 재건축이 활발한 지역입니다. 개발 사업 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화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1912년 국유지의 위치와 지목 정보는 조사 범위와 방법을 설계하는 데 실질적인 참고자료가 됩니다. 100년 전의 숫자가 오늘의 굴착기를 멈춰 세울 수도, 새로운 역사를 캐낼 수도 있는 것이죠.



8.땅속 기록이 역사를 바꾼 실제 사례

기초조사가 실제로 어떤 기적을 만들어냈는지, 세 장면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 동대문운동장. 2008년 철거 후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야구장 아래 조선의 군영이 잠들어 있었던 겁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곁의 유구 전시장이 되어 시민을 맞이합니다.

두 번째 장면,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 중 확인된 토성 유구가 백제 한성기 왕도 논쟁을 다시 불붙였습니다. 발굴조사가 없었다면 백제 500년 왕도의 실체는 콘크리트 아래 영영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장면, 2021년 인사동. 도심 재개발 부지의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째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종 시대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들. 세계 인쇄사의 한 페이지가 서울 한복판 땅속에서 걸어 나온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발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개발 전 조사라는 절차, 그리고 그 절차의 밑바닥에 깔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불광동의 열여덟 필지 기록도 언젠가 그런 발견의 첫 단추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숫자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역사가 되어 돌아올 숫자 말입니다.



9.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8필지, 15,748㎡였습니다. 대지 11필지와 밭 7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Q2. 1912년 불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1필지, 9,762㎡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61.99%를 차지했습니다.

Q3. 1912년 불광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7필지, 5,986㎡로 전체 면적의 38.01%였습니다. 논은 국유지 목록에 없었습니다.

Q4. 1912년 당시 불광동은 서울이었나요?

A. 아닙니다.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였으며, 서울 편입은 1949년의 일입니다. 본 글은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지역을 표기했습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

A.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매장유산 조사 절차에서 옛 토지 이용을 확인하는 문헌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특히 개발 사업 전 지표조사 단계에서 조사 범위 설정의 근거가 됩니다.


10.한 줄 결론과 출처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 총 18필지 15,748㎡였으며, 대지 11필지 9,762㎡와 밭 7필지 5,986㎡로 구성된 대지 중심형 산골 마을의 기록이었습니다.

자료 및 법령 안내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국유지 현황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은평구 불광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 1. 31. 개정) ·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 1. 11. 시행)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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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벼랑에 걸린 등불 하나가골짜기의 이름이 되었다.열한 채의 집터와 일곱 뙈기의 밭.장부는 마르고 먹은 바랬어도마당을 쓸던 빗자루 소리와비탈밭의 호미질 소리는숫자의 틈새마다 아직 살아 있다.부처의 빛이 머물던 땅 위로오늘도 사람의 불빛이 켜진다.백 년 전의 등불과 오늘의 등불이같은 골짜기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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