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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 대추나무골 땅 4만 5천 평에숨겨진 식민지 수탈의 기록

  • 1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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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토지조사사업국유지 기초조사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

대추나무골 땅 4만 5천 평에숨겨진 식민지 수탈의 기록

1912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땅을 측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조동의 땅 45,864㎡가 국유지로 편입되었어요. 이 숫자 뒤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지금부터 함께 파헤쳐 봅니다.


국유지 합계

18

필지

총 면적 45,864㎡

대지

6

필지 / 5,904㎡

전체의 12.9%

임야

6

필지 / 35,352㎡

전체의 77.1%

6

필지 / 4,608㎡

전체의 10.0%

지목별 면적 비율 (%)

임야 77.1%

대지

임야 35,352㎡ (77.1%)

대지 5,904㎡ (12.9%)

밭 4,608㎡ (10.0%)


목차 · Contents

01당신이 아는 대조동, 1912년엔 전혀 다른 땅이었다

02토지조사사업이 뭔데? — 측량봉 뒤에 숨겨진 수탈의 기술

03지목별 데이터 심층 분석 — 임야 77%, 이것이 의미하는 것

04대조동의 땅속엔 무엇이 있을까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이야기

05지금 이 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문화유산 조사의 현재와 미래


01

Introduction · 도입

당신이 아는 대조동, 1912년엔 전혀 다른 땅이었다



서울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연신내역 주변, 카페와 음식점이 빼곡히 들어선 대조시장 골목. 오늘의 은평구 대조동은 누가 봐도 서울의 평범한 도심 동네입니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 이 땅의 풍경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대조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조(大棗)'는 한자로 '큰 대추나무'를 뜻합니다. 대조동이라는 명칭은 옛날 '큰 대추나무골'에서 구전되어 오다 '대추나무 조(棗)'를 한역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이 마을에 부잣집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대촌(大村)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해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대조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던 대조동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대조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즉,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의 경계 바로 바깥,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도성 안은 아니지만, 임금이 사는 한성에서 불과 십 리(약 4km) 이내의 권역에 속했어요.

역사 맥락 · Context

성저십리(城底十里)란 한양 도성 사대문 밖 10리 이내의 지역을 말합니다. 이 지역은 도성민의 생활권이자 왕실 직속 관할 구역으로, 일반 사유지보다 국유지와 왕실 토지가 많았습니다. 대조동이 1912년에 대량의 국유지를 보유하게 된 역사적 맥락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 땅에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들이닥쳤을 때, 대조동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4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저좌현(불광리고개), 박석고개, 갈고개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숲고개를 이루었던 흔적이 있었던 대추나무골은 그야말로 구릉지와 숲, 그리고 소규모 농지가 어우러진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그 고요한 풍경 위에 일제의 측량봉이 꽂혔고, 그 결과 18필지 45,864㎡가 '국유지'라는 이름 아래 묶이게 됩니다.


02

Historical Background · 역사적 배경

토지조사사업이 뭔데? — 측량봉 뒤에 숨겨진 수탈의 기술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2년 뒤인 1912년부터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합니다. 표면적인 명분은 '근대적 토지 제도의 확립'이었습니다. 정확한 측량을 통해 토지의 소유자를 확인하고, 세금 부과의 기준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실제 목적은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국가 소유의 토지, 즉 역둔토(驛屯土), 관유지, 왕실 토지 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습니다. 수백 년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산림과 초지, 관청에 딸린 전답들이 그것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이런 땅들을 일본 제국의 국유지로 재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예로부터 사용하던 마을의 땅, 공동 경작지, 입증 서류가 없는 산림이 모조리 '주인 없는 땅'으로 선언되고 조선총독부에 귀속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 토지의 약 40%에 해당하는 면적을 국유지로 편입했습니다. 이 땅들은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로 이관되거나, 일본인 이주자와 농업회사에 헐값으로 매각되었습니다. 한국인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연구 자료 재구성

대조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912년, 일제는 이 마을의 18필지 45,864㎡를 국유지로 등록합니다. 이 땅이 원래 누구의 소유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국유지가 되었는지는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총 45,864㎡ 중 77.1%인 35,352㎡가 임야였다는 사실은, 이 땅의 상당 부분이 마을 공동 산림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모으고 산나물을 채취하던 뒷산이,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제국의 땅이 된 것입니다.



03

Data Analysis · 데이터 분석

지목별 데이터 심층 분석 — 임야 77%, 이것이 의미하는 것

이제 데이터를 꼼꼼히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1912년 대조동 국유지 18필지의 지목별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비율

비율 시각화

임야(林野)

6필지

35,352㎡

77.1%

77.1%

대지(垈地)

6필지

5,904㎡

12.9%

12.9%

밭(田)

6필지

4,608㎡

10.0%

10.0%

합계

18필지

45,864㎡

100%


이 데이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목별 필지 수는 동일한데 면적 차이가 극명하다는 점입니다. 임야·대지·밭이 각각 6필지씩 균등하게 나뉘어 있지만, 실제 면적은 임야가 35,352㎡로 압도적으로 큽니다. 이는 조선시대 연은방 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불광산, 갈고개 등 구릉지가 많은 이 지역의 산림 필지 하나하나가 평지의 대지나 밭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었던 것이에요.

대지 6필지(5,904㎡)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1912년 당시 대조동에 관청 건물, 역참 시설, 혹은 왕실 관련 시설 등이 있었다면 그 부지가 대지로 등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 연서역은 경기 5도의 하나인 영서도(迎曙道) 찰방(察坊)이 있던 곳으로 영서역이던 것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역참 관련 국유 건물지가 대지 필지의 일부를 구성했을 수 있습니다. 조선의 역참 제도가 남긴 흔적이 1912년 지적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죠.

밭 6필지(4,608㎡)는 역둔토(驛屯土)의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인 역둔토는, 역참 주변에 농지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가 관리하던 이 밭들이 1912년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면서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지로 재편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04

Archaeological Survey · 문화재 조사

대조동의 땅속엔 무엇이 있을까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이야기

역사적 기록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땅 위의 기록이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역사는 종종 땅 아래에 있습니다. 1912년 기록상 국유지였던 이 18필지 45,864㎡의 땅속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 문화재 조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조동의 지목 구성은 문화재 조사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대지 6필지(5,904㎡)는 조선시대 역참, 관아, 혹은 양반 가옥의 건물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건물지에는 기와, 초석, 온돌 시설, 생활 유물 등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임야 6필지(35,352㎡)는 분묘지(墳墓地), 즉 조선 시대 묘역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합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선산과 집안 묘역은 보통 마을 뒷산 야산에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1

지표조사 — 첫 번째 눈, 현장을 읽다

대조동 국유지 대상지를 직접 걸어 다니며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과 유구(遺構)의 흔적을 조사합니다. 깨진 기와 조각(와편), 토기, 자기류, 건물 기단의 흔적, 지형의 이상 같은 단서들이 이 단계에서 포착됩니다. 특히 임야 구역의 지형 관찰을 통해 고분(古墳)이나 분묘의 존재 여부를 1차로 판단합니다.

2

시굴조사 — 땅을 조심스럽게 열다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된 구역에 좁은 트렌치(시굴갱)를 파서 지하 유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합니다. 대조동 대지 구역의 경우, 조선시대 건물지의 적심석(積心石), 초석(礎石), 굴립주 흔적 등이 검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야 구역에서는 분묘의 봉분 아래 석곽(石槨)이나 토광(土壙)이 나타날 수 있어요.

3

표본조사 — 범위와 성격을 가늠하다

시굴조사를 통해 유적이 확인되면, 그 성격과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합니다. 이 단계에서 유적의 시대, 종류, 중요도가 대략적으로 파악되며, 본발굴조사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됩니다. 국유지 45,864㎡라는 넓은 면적은 이 단계에서 면밀한 격자형 트렌치 배치가 필요한 규모입니다.

4

본발굴조사 — 역사를 온전히 드러내다

유적의 전체 범위와 층위가 파악되면 본격적인 발굴을 수행합니다. 유구(건물지, 분묘, 우물, 도랑 등)를 기록하고 출토 유물을 수습하는 이 과정에서, 1912년 지적도에 담긴 역사적 사실들이 물질로 증명되거나 새롭게 해석됩니다. 연은방 시절의 역참 관련 유물이 나온다면, 조선의 교통·통신 체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대조동은 서울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 본격적인 문화재 발굴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입니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성저십리와 연담된 곳이어서 이미 주택지로 자리잡은 곳도 있었고,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많은 역사 흔적이 지하에 묻혔습니다. 지금 연신내역 주변 아파트와 상업시설 아래에 조선의 역참 관련 유적이나 성저십리 시대의 민가 터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특히 1912년 국유지로 기록된 이 18필지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관청의 직접 관리 하에 있었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적 개발로 훼손되지 않은 채 지하에 보존된 유구들이 상대적으로 많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에요. 이것이 이 기초조사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먼저 수행하지 않고 이 땅에 삽을 꽂는다면, 우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손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05

Conclusion · 결론

지금 이 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문화유산 조사의 현재와 미래



이제 우리는 숫자들이 단순한 면적 수치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18필지 45,864㎡. 이 데이터는 1912년 일제가 대조동의 땅을 어떻게 분류하고 수탈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스냅샷입니다. 동시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대조동의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조선의 역참 유적일 수도 있고, 오래된 분묘일 수도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의 유물이 나올 수도 있어요.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땅을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 사례 · Success Case

서울 은평구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은평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대규모 문화재 발굴이 이루어진 선례가 있습니다. 고려 시대 무덤 수백 기와 조선시대 건물지 등이 발굴되었으며, 이 성과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철저한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던 결과입니다. 대조동 국유지의 기초조사 역시 이러한 선례를 따라야 합니다.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1912년 토지조사사업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0년 전의 지적 기록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살아 있는 자료입니다. 어떤 땅에 국유지가 많았는지, 그 지목이 무엇이었는지, 면적은 얼마였는지 — 이 모든 정보가 '어디를 먼저 조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연신내역 출구를 나서 대조시장 골목을 걷고 있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래에 조선의 대추나무 숲이 있었고, 역참의 말들이 달렸으며, 이름 없는 사람들이 생을 이어갔습니다. 1912년 일제의 측량봉이 이 땅을 가르고 지나갔지만, 땅속의 기억은 그 측량봉을 피해 오늘까지 살아있습니다. 그 기억을 꺼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조사의 일입니다.


🌿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역사는 스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1912년 서울 은평구 대조동 국유지 18필지 45,864㎡. 이 숫자가 언젠가 땅속에서 꺼내질 유물들과 만나는 날, 대조동의 진짜 역사가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서울문화유산은 기록하고 조사하고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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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Heritage · 서울문화유산

서울의 땅 아래 잠든 역사를 발굴합니다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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