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성동구 기초조사 | 문화유산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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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성동구 기초조사 | 문화유산 발굴
이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상왕십리 국유지 688필지의 비밀
1912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부 기록 — 213,600㎡ 국유지의 지목별 완전 분석
지금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 어딘가, 당신이 걷는 그 길 아래에 110년 전 국유지 기록이 존재한다. 건물이 들어서기 전, 사람이 살기 전, 이 땅은 대지였고 밭이었고 임야였고 묘지였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 기록에서 시작된다. 과거를 알아야 땅속을 읽을 수 있다.
688
총 필지 수
213,600
총 면적(㎡)
4
지목 종류
1912
조사 기준 연도
목차
01 1912년, 상왕십리 땅이 기록된 날
02 688필지 213,600㎡ — 지목별 완전 분석
03 대지 630필지 — 이 넓은 땅에 무슨 건물이 있었나
04 분묘지·임야·밭 — 잊혀진 생활의 흔적들
05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는 왜 이 기록에서 시작하나
06 상왕십리 발굴조사의 가능성과 의미

01
1912년, 상왕십리 땅이 기록된 날
1912년은 특별한 해였다. 조선이 일제강점기로 넘어간 직후, 새 통치자들이 가장 먼저 손댄 것 중 하나가 바로 토지였다. 일제는 전국의 땅을 지목별로 분류하고 면적을 측량해 토지조사부에 기록했다. 이 거대한 관료적 작업이 남긴 흔적이 지금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이 자료다.
서울시 성동구 상왕십리. 지금은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이 됐지만, 1912년 이 지역에는 국유지만 무려 688필지, 213,600㎡가 존재했다. 단순 계산으로 여의도 면적(약 290만㎡)의 약 7.4%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그 땅이 대지였고, 밭이었고, 임야였고, 분묘였다는 기록이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이 기록이 왜 중요한가. 문화재 발굴조사, 시굴조사, 지표조사는 모두 이런 과거 기록에서 출발한다. 땅이 언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알아야, 그 지층 아래 무엇이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12년 이 토지조사부는 문화유산 기초조사의 첫 번째 열쇠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록만이 땅의 진실을 말하게 한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원칙 (seoulheritage.org)
02
688필지 213,600㎡ — 지목별 완전 분석
전체 688필지 213,600㎡를 지목별로 나눠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나온다. 숫자로만 보면 밋밋하지만, 비율로 보면 1912년 상왕십리가 어떤 공간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목별 면적 비율 (총 213,600㎡ 기준)
대지 (61.9%)밭 (20.0%)임야 (17.0%)분묘지 (1.0%)
대지
132,433㎡
630필 · 61.9%
밭
42,750㎡
51필 · 20.0%
임야
36,324㎡
4필 · 17.0%
분묘지
3필 · 1.0%
지목별 상세 데이터 — 1912년 성동구 상왕십리 국유지
대지
630 필지
132,433 ㎡
면적 비율 61.9%
밭
51 필지
42,750 ㎡
면적 비율 20.0%
임야
4 필지
36,324 ㎡
면적 비율 17.0%
분묘지
3 필지
2,092 ㎡
면적 비율 1.0%
전체 면적의 약 62%가 대지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이는 1912년 시점에 이미 상왕십리가 상당히 도시화된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임야 4필지가 36,324㎡로 면적은 크지만 필지 수는 적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형 임야 지목이 소수 집중된 구조다.

03
대지 630필지 — 이 넓은 땅에 무슨 건물이 있었나
대지 630필지, 132,433㎡.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상상해보자. 630개의 필지에 국유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뜻이다. 1912년 상왕십리의 국유 대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관청이었을 수도 있고, 군사 시설이었을 수도 있으며, 학교나 공공 기관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일제가 국유지로 접수한 대지 중 상당수는 조선시대 관청 터이거나 왕실 소유의 궁방전(宮房田)이었다. 한성부 외곽이었던 상왕십리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도성민의 주거지가 확장되던 곳이다. 대지 130,000㎡가 넘는 국유지가 이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이 땅에 어떤 공공적 기능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보면, 국유 대지 구역은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관청 터나 공공 시설 자리에는 기단석, 건물지, 담장 유구 같은 건축 관련 문화재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표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땅속에 조선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유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지 필지 당 평균 면적은 약 210㎡(약 63평)다. 단순 주거용 소형 필지보다 훨씬 큰 규모다. 이는 공공 건물이나 복합 시설이 들어서 있던 대형 필지가 상당수 포함됐음을 의미한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 이 구역의 필지별 용도 추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04
분묘지·임야·밭 — 잊혀진 생활의 흔적들
필지 수로는 적지만, 분묘지 3필지 2,092㎡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기록이다. 2,092㎡면 약 630평. 지금으로 치면 작은 공원 하나 크기의 묘지가 국유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국유 분묘지란 무엇인가.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가 관리하던 묘역, 또는 무연고 묘지를 국가가 접수한 경우일 수 있다.
분묘지는 문화재 조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매장문화재로서 유골과 부장품이 남아 있을 수 있고, 묘지의 형태와 조성 방식만으로도 당시의 신분 구조와 매장 문화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굴조사 단계에서 이 구역은 반드시 정밀 확인이 필요한 지점이다.
임야 4필지 36,324㎡는 면적이 크다. 필지당 평균 9,081㎡, 즉 약 2,748평의 거대한 산림 구역이다. 상왕십리 외곽의 야산 지대로 추정되는 이 임야는 조선시대 벌채 금지 구역이나 왕실 소유 산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임야 지목 토지는 개발이 늦게 이뤄진 경우가 많아, 지표 아래 오래된 문화층이 비교적 잘 보존된 경향이 있다.
밭 51필지 42,750㎡는 당시 이 지역의 농업 생산 기반을 보여준다. 필지당 평균 838㎡(약 253평)의 규모로, 조선 후기 도성 외곽의 소규모 경작지 패턴과 일치한다. 국유 밭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은, 이 토지들이 조선시대에도 국가 또는 왕실 소속의 경작지였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역둔토(驛屯土), 즉 역(驛)이나 군사 시설에 딸린 경작지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목별 필지 당 평균 면적 비교
임야
9,081㎡/필
4필지
분묘지
697㎡/필
3필지
밭
838㎡/필
51필지
대지
210㎡/필
630필지

05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는 왜 이 기록에서 시작하나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땅을 파기 전에 먼저 기록과 현장 답사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 해당 부지에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사전 평가하는 단계로, 국가유산청의 지침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에는 의무적으로 시행된다.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은 이 지표조사의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 중 하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목이 바뀐 역사를 알면, 그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역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1912년에는 국유 대지였고, 그 이전에는 관청이었다면? 그 관청 아래 조선 초기의 건물지가 남아 있을 수 있다.
시굴조사(試掘調査)는 지표조사보다 한 단계 깊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실제로 일정 간격으로 좁은 트렌치(도랑)를 파서 지층을 확인하고, 유구나 유물이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는 과정이다. 이때 1912년 토지조사부에서 확인된 분묘지 구역, 임야 구역, 국유 대지 구역은 특히 주의 깊게 시굴해야 할 지점으로 표시된다.
표본조사는 시굴조사 이후 단계로, 유구나 유물이 확인된 구역에 대해 선택적으로 정밀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충분한 근거를 확인한 이후에야 비로소 정식 발굴조사(본조사)로 이어진다. 기초조사 없이 삽을 들이댔다가 중요한 문화층을 훼손하는 일을 막기 위한 체계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자치구 전체를 대상으로 1912년 토지조사부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이번 성동구 상왕십리 자료 역시 그 일환으로 조사·정리된 기록이다.

06
상왕십리 발굴조사의 가능성과 의미
1912년 기록을 바탕으로 상왕십리 국유지 688필지의 성격을 정리해 보면, 이 지역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면적의 62%가 대지였다는 것, 국유 분묘지가 3필지나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거대한 임야 4필지가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 어떤 형태로든 공공적이고 역사적인 기능을 담당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실제로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문화재 기초조사를 진행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사에서는 1912년 국유지 기록을 토대로 지표조사를 실시해 조선시대 관청 건물지를 확인했다. 은평구 구산동 사례에서는 국유 임야 구역에서 고려시대 도요지(陶窯址)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록이 곧 발굴의 길잡이가 됐다.
상왕십리 역시 같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110년 전 기록이 남긴 이 데이터가 언젠가 이 땅 아래 잠든 이야기를 꺼내는 첫 번째 열쇠가 될 수 있다. 역사는 땅속에 있고, 그 역사를 여는 것은 숫자와 기록으로 이뤄진 이런 조사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단이 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루하고 방대한 자료 정리 작업이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 한 조각이 기다리고 있다. 상왕십리 688필지도 그 기다림의 대열에 당당히 올랐다.

110년 전 누군가가 꼼꼼하게 적어 내려간 그 숫자들이 오늘 이 글이 됐다. 688필지, 213,600㎡. 단순한 행정 수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터, 묻혔던 땅, 일군 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기록을 읽는 당신이, 그 땅의 이야기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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