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금호동 국유지의 발견 — 밭 33필지가 지킨 110년의 기억, 금호산 자락의 역사를 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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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데이터
"38필지, 그 중 33개가 밭이었다.
금호산 기슭 마을에서
가장 많은 필지가 품은 이야기."
한강과 금호산이 만나는 자리, 성동구 금호동.
1912년 국유지 38필지 45,048㎡ 속에
수백 년 서울 사람들의 삶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1912년 성동구 금호동 국유지의 발견 — 밭 33필지가 지킨 110년의 기억, 금호산 자락의 역사를 캐다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서울 성동구 금호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38필지총면적 45,048㎡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금호동, 한강이 보이는 산동네의 110년 전 얼굴
021912년 금호동 국유지 전체 통계 — 38필지 45,048㎡의 구성
03밭 33필지 26,661㎡ — 필지가 가장 많은 땅이 말하는 것
04임야 1필지 15,325㎡ — 금호산 자락 국유 산림의 정체
05논 4필지 3,061㎡ — 구릉지 마을의 귀한 논이 남긴 흔적
06금호동,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이유
07발굴 성공 사례 — 밭과 임야에서 서울의 역사가 깨어난 순간
08금호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01
금호동, 한강이 보이는 산동네의 110년 전 얼굴
옥수역에서 내려 금호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면 곧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금호산 자락을 따라 형성된 이 동네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경사 지형입니다.
한때 달동네, 판자촌으로 불리기도 했던 금호동은 지금은 재개발을 거쳐 아파트 단지와 빌라촌이 공존하는 동네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파른 구릉지와 한강이 바라보이는 지리적 조건은 1912년에도,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도 사람들을 끌어당겼습니다. 좋은 전망과 물길에 가까운 위치, 그리고 비옥한 구릉지 토양이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조건이었습니다.
금호(金湖)라는 이름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금빛 호수라는 뜻인데, 실제로 금호동 일대는 금호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저지대에 고여 작은 연못과 물길을 만들었던 곳입니다. 그 물길을 따라 논이 형성되었고, 구릉지에는 밭이 펼쳐졌으며, 산록에는 임야가 이어졌습니다. 1912년 국유지 기록이 담고 있는 지목 구성이 바로 이 지형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1912년 성동구 금호동의 국유지는 총 38필지 45,048㎡였습니다. 필지 수만 보면 오늘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금호동의 지형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세 가지 지목이 펼쳐집니다.

02
1912년 금호동 국유지 전체 통계 — 38필지 45,048㎡의 구성
38필지 45,048㎡. 이 두 숫자의 조합이 흥미롭습니다. 필지 수(38)는 많은데 총 면적(45,048㎡)은 당산동(155,703㎡)이나 돈암동(84,211㎡)보다 작습니다. 즉 하나하나의 필지가 상대적으로 작고 잘게 쪼개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 자체가 금호동 국유지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필지가 잘게 쪼개진다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지형이 복잡하고 경사가 있어서 단일한 대규모 토지 이용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금호산 자락의 구릉 지형이 딱 그런 조건입니다. 둘째, 다양한 용도와 성격의 토지가 모자이크처럼 얽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밭과 논, 임야가 좁은 면적 안에서 지형을 따라 복잡하게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38필지는 세 가지 지목으로 구성됩니다. 밭 33필지 26,661㎡, 임야 1필지 15,325㎡, 그리고 논 4필지 3,061㎡입니다. 세 지목 합계가 45,047㎡로 전체 45,048㎡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 구성을 시각적으로 보면 금호동의 1912년 풍경이 한눈에 그려집니다.
38필지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필지 수.
45,048㎡ 안에 38개 필지가 빼곡히 들어찬 금호동 국유지.
잘게 쪼개진 땅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총 필지
38필지
시리즈 최다 필지
총 면적
45,048㎡
축구장 약 6.3배
밭 필지 수
33필지
전체의 86.8%
임야 면적
15,325㎡
1필지 최대 단일
밭
26,661㎡ (59.2%)
임야
15,325㎡ (34.0%)
논
3,061㎡ (6.8%)
1912년 금호동 국유지 지목별 상세
성동구 금호동 | 조사 기준 1912년
밭33필지 / 26,661㎡59.2%
임야1필지 / 15,325㎡34.0%
논4필지 / 3,061㎡6.8%
합계38필지 / 45,048㎡100%
갈월동 (용산구)
6필지
5,742㎡
돈암동 (성북구)
13필지
84,211㎡
가락동 (송파구)
6필지
55,206㎡
금호동 (성동구)
38필지
45,048㎡ ← 지금 여기
03
밭 33필지 26,661㎡ — 필지가 가장 많은 땅이 말하는 것
38필지 중 무려 33필지가 밭입니다. 전체 필지의 86.8%가 밭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역설에 주목해야 합니다. 33필지인데 면적은 26,661㎡, 1필지당 평균 808㎡(약 244평)밖에 되지 않습니다. 필지 수는 압도적으로 많은데, 각각의 면적은 매우 작습니다.
이 패턴이 금호동 밭의 성격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가파른 금호산 자락의 경사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형성된 소규모 텃밭들이 수십 개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각각의 밭은 경사면의 폭과 지형에 맞춰 좁고 길게 형성되었고, 그래서 필지 수는 많지만 개별 면적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구릉지에서 오래된 집들 사이에 간혹 좁고 긴 텃밭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912년 금호동의 밭이 딱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국유지로 등록된 밭 33필지는 그 용도가 다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아 소속 채소밭, 군영 부속 농지, 또는 인근 사찰이 경작하다가 국유지로 편입된 경작지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금호동의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 도성 내 기관들의 부속 경작지로 활용된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33필지의 소규모 밭들은 매우 흥미로운 조사 환경을 제공합니다. 계단식 밭은 경작 깊이가 얕아 그 아래 원래 지표면이 잘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 필지의 경계를 이루는 밭두렁 아래에는 더 오래된 지표 유구가 교란 없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33개라는 다수의 필지가 분산되어 있다는 점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유물 분포를 파악한 뒤 시굴조사 대상 필지를 전략적으로 선정하는 접근이 효과적임을 보여줍니다.

33필지 평균 808㎡. 좁고 작은 밭이 산비탈을 따라 계단처럼 이어진 금호동의 풍경. 그 밭두렁 하나하나 아래에 서울 사람들의 수백 년 생활사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필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도 많다는 뜻입니다.
33필지 중 어느 필지를 우선 지표조사할지 선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대조해 원형 지형이 가장 잘 보존된 구역, 즉 재개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필지를 우선 조사 대상으로 삼는 전략이 효과적입니다.
04
임야 1필지 15,325㎡ — 금호산 자락 국유 산림의 정체
단 1필지인데 면적이 15,325㎡입니다. 금호동 국유지 전체 면적의 34%를 홀로 차지하는 이 임야가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필지입니다. 1필지 15,325㎡는 축구장 2.1개 크기의 단일 산림 구역입니다.
금호동이 금호산 자락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임야 1필지는 금호산 사면의 일부가 국유지로 등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도성 주변의 산림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국가가 직접 관리했습니다. 첫째는 목재 자원 보호, 둘째는 풍수지리적 비보(裨補) 기능 유지, 셋째는 군사적 방어선 확보입니다. 금호산은 한양 도성의 남쪽 외곽을 방어하는 구릉지로서 군사적 의미를 가졌고, 그 산림이 국유지로 관리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사찰 관련입니다. 금호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여러 암자와 소규모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국유 임야의 일부가 원래 사찰 경내지였다가 폐사 이후 국유지로 편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임야 표면 아래에 폐사지 관련 석재 유구, 기와 파편, 불교 관련 유물 등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측면에서 단일 필지 15,325㎡의 임야는 집중적인 지표조사가 가능한 명확한 구역입니다. 임야 지표면을 체계적으로 걷고 관찰하면서 기와편, 석재 유구, 토기 파편 등의 분포를 기록하는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트렌치의 위치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효율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목재 보호림 가능성
도성 주변 국유 산림으로 조선 정부의 목재 자원 관리 목적
폐사지 가능성
금호동 암자·사찰 경내지가 폐사 후 국유 임야로 편입
군사적 방어지
한양 남쪽 외곽 방어 구릉지로서 군사 관련 시설 부지 가능성
05
논 4필지 3,061㎡ — 구릉지 마을의 귀한 논이 남긴 흔적
경사지가 많은 금호동에서 논 4필지 3,061㎡는 그야말로 귀한 존재였습니다. 1필지당 평균 765㎡, 약 231평의 논이 네 군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금호동의 지형 특성상 이 논들은 금호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모이는 저지대 골짜기에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구릉지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형성된 논은 독특한 생태적·역사적 특성을 가집니다. 사방이 경사지로 둘러싸인 환경이라 외부 영향을 덜 받고, 그래서 논바닥 진흙층이 오랜 시간 퇴적되며 유기물을 보존합니다. 이런 논 아래에서는 농경 도구, 씨앗, 목제 유구 등 다른 환경에서는 사라졌을 유물들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또한 논 4필지의 분산된 위치가 중요합니다. 금호동의 서로 다른 골짜기에 위치한 논들은 각각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질 수 있습니다.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비교해 각 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그 위치에서 현재 어떤 개발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지표조사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문서 조사입니다.
논 4필지 3,061㎡는 금호동 국유지 중 면적 비율이 가장 낮지만(6.8%), 고고학적 보존 잠재력은 가장 높습니다. 구릉지 골짜기의 논 환경은 유기물 보존에 탁월하며, 더 오래된 문화층이 논바닥 아래에 온전히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06
금호동,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이유
금호동 국유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각각이 독립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되지만, 세 가지가 겹칠 때 그 필요성은 몇 배로 높아집니다.
첫째, 한양 도성 인접 지역이라는 역사적 위치입니다. 금호동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동남쪽 외곽에 해당합니다. 도성 경계에서 멀지 않은 이 지역에는 도성과 관련된 군사 시설, 관아 부속지, 또는 왕실 관련 시설이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성동구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조선시대 관련 유구가 발굴된 사례가 있습니다.
둘째, 38필지라는 많은 필지 수가 보여주는 복합적인 토지 이용 역사입니다. 필지가 많다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사람과 기관이 이 땅을 사용해왔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복합적으로 쌓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복합 문화층은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해석해야 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재개발로 인해 지표 유물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재개발 과정에서 지하 유구가 보호층 아래 봉인된 경우가 있습니다. 재개발 공사는 땅을 깊이 파지 않는 경우도 많고, 기초 공사 지점을 피한 구역에는 원래 문화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표조사를 통해 이런 보존 구역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발굴조사 전략의 핵심이 됩니다.

금호동은 1980년대 이후 달동네 철거와 재개발이 반복된 지역입니다. 재개발 과정에서 지표 유물이 이미 훼손된 구역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지표조사를 통해 보존 상태를 먼저 파악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구역을 전략적으로 선정하는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07
발굴 성공 사례 — 밭과 임야에서 서울의 역사가 깨어난 순간
구릉지 밭과 산록 임야에서 시작된 발굴 조사가 어떤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유사한 환경의 사례들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서울 동부 구릉지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경사면에 형성된 소규모 밭들이 국유지 기록과 함께 조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표면에서 조선 중기 양식의 분청사기 파편이 산발적으로 발견되었고, 이것이 시굴조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밭의 경작층 아래, 원래 지표면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가옥 기초석과 온돌 구조물이 드러났습니다. 수백 년 동안 밭으로 사용되면서 그 아래 더 오래된 집터가 보호된 것입니다.
임야에서의 성과도 있었습니다. 서울 동남쪽 구릉지 국유 임야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하던 중 수풀 아래에서 정형성 있게 배열된 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자연석이 아닌 가공석이었고, 조선시대 건물 기단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전기 관아 건물지와 관련 유물 다수가 출토되었습니다. 임야라는 지목 아래 조선 행정의 흔적이 수백 년을 버텨온 것입니다.
논 관련 사례로는 성동구 인근 골짜기 논 구역 발굴이 있습니다. 논바닥 진흙층을 파내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목기 파편과 씨앗 유물이 나타났습니다. 논이라는 환경이 무산소 상태를 만들어 유기물을 완벽에 가깝게 보존했습니다. 금호동의 논 4필지도 바로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금호동 발굴의 핵심 전략 — 필지별 특성에 맞는 단계적 접근
33필지 밭은 재개발 영향을 적게 받은 필지를 우선 지표조사 대상으로 선정하고, 1필지 임야는 집중적인 지표면 관찰로 석재 유구 분포를 파악하며, 4필지 논은 골짜기 위치를 특정해 진흙층 유기물 보존 가능성을 시굴조사로 확인하는 것이 금호동 문화재 조사의 핵심 전략입니다.
08
금호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옥수역에서 금호동 고갯길을 오르다 문득 발밑을 내려다봐 보세요. 아스팔트 아래, 1980년대 재개발의 콘크리트 아래, 그리고 그 훨씬 깊은 곳에 33개의 작은 밭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으로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수확을 거두던 그 손길의 흔적이 아직 거기 있을지 모릅니다.
임야 15,325㎡의 소나무 아래에는 어쩌면 조선 시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터의 기단석이 묻혀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어느 스님의 기도 소리가 스며든 암자의 흔적이 이끼 낀 돌 아래 잠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골짜기 깊숙이 숨어 있던 논 네 필지의 진흙층에는 수백 년 전 이 마을 사람들이 손에 쥐고 다니던 그릇과 도구들이 보존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38필지라는 많은 필지 수는 금호동 국유지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필지가 많다는 것은 이야기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 하나하나를 꺼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고, 발굴조사입니다. 그 긴 여정의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지금 이 기록 검토입니다.
역사는 화려하고 거대한 유적만이 아닙니다. 금호산 비탈에 좁게 펼쳐진 작은 밭 한 필지의 기억도 역사입니다. 그 기억을 지켜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38개의 필지, 38개의 이야기.
금호산 비탈 하나하나에
서울 사람들의 삶이 새겨져 있습니다."
33개의 작은 밭은 수백 년 동안 씨앗과 손길을 기억합니다.
임야 15,325㎡의 숲은 그 아래 잠든 돌들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논 네 필지의 진흙층은 가장 오래된 기억을 가장 완전하게 간직합니다.
지표조사의 첫걸음이 금호산을 오르는 순간,110년의 침묵이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관심을 가져주세요.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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