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궁궐 이름 아래 논 네 배미가 절반을 넘긴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시간 전
9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대문구 편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궁궐 이름 아래 논 네 배미가 절반을 넘긴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6필지국유지 전체

31,104㎡국유지 총면적

54.3%논이 차지한 면적 비율

8필지밭(필지 수 최다)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는 국유지 16필지, 총 31,104㎡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4필지 16,889㎡, 밭 8필지 11,705㎡, 대지 4필지 2,509㎡였습니다.

즉, 연희동 국유지는 필지 수로는 밭이 가장 많았지만 면적의 54.3%는 논이 차지한, 물길을 낀 논 중심의 국유지였습니다.

연희동, 이 이름은 원래 '궁궐'의 이름이었습니다.

지금 연희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골목 안 작은 카페, 담장 위로 쏟아지는 능소화, 조용한 단독주택 사이의 빵집.

주말이면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동네죠.

그런데 그 예쁜 골목의 이름이 600년 전 왕이 머물던 이궁에서 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더 놀라운 건 1912년 토지조사 장부입니다.

나라 땅은 고작 16필지.

그런데 그 절반이 넘는 면적이 논이었습니다.

서울 서쪽 언덕 동네에 웬 논이냐고요.

바로 그 질문 안에 연희동이 숨겨온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지금도 당신이 걷는 골목 아래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숫자 몇 개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읽으시면 연희동 골목이 전혀 다르게 보이실 거예요.


목차

  1. 연희동 역사, 왕의 이궁에서 이름을 얻다

  2. 1912년 연희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3. 연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4. 연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5. 연희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6. 한눈에 보는 지목별 비교표

  7. 이웃 신촌동과 무엇이 달랐을까?

  8. 숫자가 그려주는 1912년 연희동의 풍경

  9. 왜 100년 전 토지 장부가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일까?

  10.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이야기

  11. 땅 밑에서 역사를 되찾은 성공 사례

  12. 연희동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13. 자주 묻는 질문


1연희동 역사, 왕의 이궁에서 이름을 얻다

도성 서쪽의 별궁, 서이궁

조선 초, 한양 도성 서쪽 무악 남쪽 기슭에 왕실의 별궁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도성 서쪽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서이궁이라 불렀습니다.

세종 2년인 1420년, 상왕 태종을 위해 이 별궁이 다시 지어졌고, 몇 해 뒤 연희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왕과 왕비가 실제로 이곳에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도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연희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궁터는 어디에 있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연희궁 터는 오늘날 연세대학교 교정 일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대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대야평으로도 불렸다고 하죠.

조선 건국 무렵에는 이 무악 기슭이 새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산이 감싸고 물이 흐르는 좋은 터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여러 번 바뀐 마을

조선 시대 이 일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 같은 여러 마을 이름이 있었습니다.

궁동이라는 이름에는 궁궐의 기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1912년의 연희동은 지금처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가 아니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되었고,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며 연희정이 되었습니다.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이후인 1946년에 다시 붙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연희동은 오늘날 법정동 연희동 범위를 기준으로 1912년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21912년 연희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16필지, 31,104㎡라는 숫자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16필지, 면적은 31,104㎡였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9,409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를 약 7,140㎡로 잡으면 축구장 4개를 조금 넘는 넓이죠.

숫자만 보면 아담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장부 한 장에 연희동 땅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필지 하나는 평균 얼마나 컸을까

전체 면적을 필지 수로 나누면 한 필지 평균은 1,944㎡, 약 588평입니다.

그런데 평균만 보면 진짜 이야기를 놓칩니다.

논은 덩치가 크고, 밭은 중간이고, 집터는 작습니다.

이 크기 차이가 연희동의 1912년 생활 모습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연희동 국유지는 총 16필지 31,104㎡였으며 논·밭·대지 세 가지 지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연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네 필지가 절반을 넘기다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 중 논은 4필지, 16,889㎡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25%, 딱 4분의 1입니다.

그런데 면적으로는 54.3%.

네 필지가 나라 땅 절반 이상을 혼자 차지한 셈입니다.

한 배미가 1,277평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4,222㎡, 평으로 1,277평 정도입니다.

밭 한 필지 평균의 약 2.9배, 집터 한 필지 평균의 약 6.7배죠.

논은 물을 가두어야 하기 때문에 평평하고 넓은 자리를 골라 만듭니다.

이렇게 큰 논이 네 곳이나 있었다는 건, 연희동 안에 물이 넉넉히 드는 낮고 평평한 땅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홍제천이 키운 논

연희동 서쪽에는 홍제천이 흐릅니다.

북한산 자락에서 내려온 이 물길은 연희동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갑니다.

하천 가까운 낮은 땅은 예로부터 논을 만들기 좋은 자리였습니다.

안산 쪽 높은 땅에는 밭이, 홍제천 쪽 낮은 땅에는 논이 자리 잡은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1912년 연희동 국유지의 논 네 배미는 아마 그 물길의 선물이었을 겁니다.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논은 4필지 16,889㎡로, 국유지 전체 면적의 54.3%를 차지했습니다.


4연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필지 수로는 밭이 1등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 중 밭은 8필지, 11,705㎡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절반, 정확히 50%입니다.

면적으로는 37.6%로 논 다음입니다.

잘게 나뉜 비탈의 밭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1,463㎡, 443평 정도입니다.

논에 비해 한 필지가 훨씬 작죠.

이건 밭이 구릉 비탈이나 집 주변처럼 지형이 고르지 않은 곳에 작게 쪼개져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보리와 콩, 조, 그리고 도성 사람들 밥상에 오를 채소가 이 밭에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성과 가까운 교외 마을의 밭은 대개 그런 역할을 맡았으니까요.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밭은 8필지 11,705㎡로, 필지 수로는 가장 많았고 면적으로는 37.6%를 차지했습니다.


5연희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네 곳의 집터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 중 대지는 4필지, 2,509㎡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25%지만 면적은 8.1%에 불과합니다.

작지만 가장 중요한 땅

대지 한 필지 평균은 약 627㎡, 190평 정도입니다.

초가 한 채와 마당, 장독대, 작은 헛간이 들어갈 만한 크기죠.

면적은 작지만 고고학의 눈으로 보면 이 네 필지가 가장 흥미롭습니다.

사람이 살던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아궁이 자리, 깨진 그릇 조각, 기와 파편, 기둥을 세웠던 구멍.

고고학에서는 이런 것들을 생활 유구라고 부릅니다.

더구나 이곳은 왕실 별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동네입니다.

나라 땅으로 남은 집터가 어떤 내력을 가졌는지, 장부 한 줄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땅을 직접 들여다보는 조사가 필요한 겁니다.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대지는 4필지 2,509㎡였고, 한 필지 평균은 약 627㎡였습니다.


6한눈에 보는 지목별 비교표

지금까지의 숫자를 표 하나로 모았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논

4

16,889

54.30%

4,222

밭

8

11,705

37.63%

1,463

대지

4

2,509

8.07%

627

합계

16

31,104

100%

1,944

표 설명: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 16필지 31,104㎡를 논, 밭, 대지로 나눈 표입니다. 논 4필지 16,889㎡, 밭 8필지 11,705㎡, 대지 4필지 2,509㎡입니다. 지목별 합계는 31,103㎡로 원자료 총계와 1㎡ 차이가 있으며, 검증 노트에 설명했습니다.


지목별 면적 비율

논

54.30%

밭

37.63%

대지

8.07%

지목별 필지 수

논

4필지

밭

8필지

대지

4필지


7이웃 신촌동과 무엇이 달랐을까?

같은 서대문구, 정반대의 땅

이 시리즈에서 앞서 다룬 이웃 신촌동을 떠올려 보세요.

1912년 신촌동 국유지는 면적의 84.1%가 밭이었고, 논은 5.2%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고개 하나 넘은 연희동은 논이 54.3%입니다.

같은 안산 자락을 나눠 쓰는 두 동네가 거의 정반대의 땅 구성을 보인 거죠.

차이를 만든 것은 물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가장 그럴듯한 답은 물길입니다.

연희동은 서쪽으로 홍제천을 끼고 있어 하천 가의 평평한 저지대를 논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신촌동 국유지는 구릉 위 마른 땅이 중심이었습니다.

지목 비율 하나가 지형과 물길의 차이를 이렇게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게 바로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하나하나 쪼개 보는 이유입니다.


8숫자가 그려주는 1912년 연희동의 풍경

필지 수와 면적이 어긋나는 이유

숫자를 그림으로 바꿔 볼까요.

필지 수만 보면 밭이 절반, 논과 대지가 4분의 1씩입니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논이 절반을 넘고, 대지는 10분의 1도 안 됩니다.

논 면적은 밭 면적의 약 1.44배, 대지 면적의 약 6.7배입니다.

큰 덩어리로 남은 땅은 물을 다루던 논, 잘게 나뉜 땅은 사람이 모여 살던 집터와 그 주변 밭.

이 공식이 1912년 연희동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그 땅은 지금 어디에

1970년대 이후 연희동에는 넓은 단독주택 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논과 밭이던 땅은 정원 딸린 주택과 골목, 학교와 공공시설로 바뀌었습니다.

홍제천 변에는 도로가 놓였고, 물길은 도시의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연희동 카페 테라스 아래에는 1912년 누군가 모를 심던 논흙층이 겹겹이 눌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소름 돋지 않나요.


9왜 100년 전 토지 장부가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일까?

땅의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판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런데 땅을 파기 전에 꼭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예전에 무엇이 있었나?"

이 질문에 가장 객관적으로 답해 주는 자료 중 하나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입니다.

필지마다 지목과 면적, 소유 관계가 적혀 있어서 근대 도시화 직전의 땅 모습을 꽤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거든요.

지목은 유적의 힌트가 된다

대지였던 곳은 주거지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논이었던 곳은 수리시설, 둑, 경작층의 흔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밭이었던 구릉은 더 오래된 시대의 유적이 비교적 덜 훼손된 채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연희동처럼 왕실 별궁의 기억이 깃든 지역이라면, 지목 하나하나가 조사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귀중한 단서가 됩니다.

법이 정한 조사 의무

우리나라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를 할 때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에 따라 매장유산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조사의 세부 기준과 절차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를 따릅니다.

지표조사 보고서에서 해당 부지의 역사 환경을 정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1912년 지목 자료는 바로 그 역사 환경 정리의 뼈대가 됩니다.


10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이야기

첫걸음, 문화재 지표조사

지표조사는 땅을 파지 않고 하는 조사입니다.

문헌과 옛 지도, 토지 기록을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땅 위에 드러난 토기 조각이나 기와 편을 찾습니다.

연희동처럼 1912년 지목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이 단계의 정확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두 번째,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보이면 표본조사로 넘어갑니다.

부지 일부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흙층의 상태를 확인하는 단계예요.

바늘로 콕 찔러 보듯, 최소한의 굴착으로 땅속 사정을 엿봅니다.

세 번째, 시굴조사

시굴조사는 좀 더 본격적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긴 도랑, 이른바 트렌치를 파서 유구가 어디에 얼마나 분포하는지 확인합니다.

옛 논이었던 자리라면 논둑이나 물길 흔적이 이 단계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결과에 따라 발굴이 필요한 구역이 정해집니다.

마지막,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유적을 전면적으로 드러내 기록하는 단계입니다.

흙층을 하나씩 걷어내며 집터, 우물, 도로, 건물지 같은 흔적을 실측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유물을 수습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전문 자격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수행합니다.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이 네 단계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데 1912년 연희동 기록 같은 기초자료가 쓰입니다.


11땅 밑에서 역사를 되찾은 성공 사례

빌딩 아래서 되살아난 골목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재개발을 앞두고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골목길과 집터가 통째로 확인되었습니다.

보통이라면 허물고 끝났을 땅이었죠.

하지만 유적은 꼼꼼히 기록되고 보존되었고, 새 빌딩 지하에는 그 골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관이 들어섰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나온 고대 왕성

송파구 풍납동에서는 아파트 공사 중 백제 유물이 쏟아지면서 한성백제 왕성 연구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이 일은 공사 전 사전 조사가 왜 중요한지를 우리 사회에 강하게 새긴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공 사례의 공통점

두 사례의 출발점은 같았습니다.

땅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그리고 그 관심이 늦지 않았다는 것.

공사 중간에 유적이 갑자기 드러나면 공정이 멈추고 비용은 불어납니다.

반대로 기초조사 단계에서 미리 살피면 일정과 예산을 계획 안에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연희동 1912년 기록 같은 자료가 쓸모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2연희동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

상상해 보세요.

설계도 끝났고 착공 날짜도 잡혔습니다.

그런데 굴착기 바가지에 기와 조각이 걸려 나옵니다.

현장은 멈추고, 매일 비용이 쌓이고, 일정표는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합니다.

겁주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현장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미리 보면 길이 보인다

연희동 국유지만 해도 논 4필지, 밭 8필지, 집터 4필지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내 부지가 옛 논이었는지, 밭이었는지, 집터였는지 미리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조사 범위와 방법을 훨씬 정확하게 잡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검토하고 계시다면 사업 초기에 문화재 발굴 기관과 상담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선택입니다.

서울 각 동의 1912년 기록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시리즈로 계속 정리하고 있습니다.


검증 노트

  • 필지 수 합계: 논 4 + 대지 4 + 밭 8 = 16필지로, 원자료 총계 16필지와 일치합니다.

  • 면적 합계: 16,889 + 2,509 + 11,705 = 31,103㎡로, 원자료 총계 31,104㎡와 1㎡ 차이가 있습니다. 평을 ㎡로 환산하며 생긴 반올림 오차로 보이며, 본문은 원자료 총계 31,104㎡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 비율은 총면적 31,104㎡ 기준으로 소수 둘째 자리까지 계산했습니다(논 54.30%, 밭 37.63%, 대지 8.07%). 합계 기준(31,103㎡)으로 계산해도 소수 둘째 자리까지 같습니다.

  •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이며, 31,104㎡는 약 9,409평입니다.

  • 행정구역 안내: 1912년 당시 연희 일대는 오늘날의 서대문구 연희동이 아니었습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연희정으로 편입되었고, 1946년 연희동이 되었습니다. 본문 수치는 현재 법정동 연희동 범위 기준 정리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 연희동은 논이 국유지 면적의 54.30%를 차지해, 서대문구에서 앞서 다룬 신촌동(논 5.16%)과 정반대인 논 중심형 국유지입니다.

  • 필지 수 1위(밭 8필지)와 면적 1위(논 16,889㎡)가 서로 다른 지목으로 갈린 사례입니다.

  • 논과 대지가 똑같이 4필지씩이지만, 면적은 논이 대지의 약 6.7배로 필지당 규모 차이가 뚜렷합니다.


13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6필지, 면적은 31,104㎡였습니다.

Q.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4필지 16,889㎡로, 국유지 면적의 54.30%였습니다.

Q.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8필지 11,705㎡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Q. 1912년 연희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4필지 2,509㎡였습니다.

Q.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나요?

A. 조선 초 도성 서쪽에 세워진 왕실 별궁 연희궁(서이궁)에서 유래했습니다.

Q. 1912년 당시 연희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A. 지금의 서대문구와 달랐습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A. 필지별 지목으로 논, 밭, 집터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어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국유지는 총 16필지 31,104㎡였으며, 논 4필지 16,889㎡, 밭 8필지 11,705㎡, 대지 4필지 2,509㎡로 이루어진 논 중심의 땅이었습니다.

연희동은 왕의 이름을 빌린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장부 속 연희동을 채운 건 왕이 아니었습니다.

홍제천 물을 끌어 모를 심던 손, 비탈 밭에서 콩을 거두던 허리, 네 곳의 집터에서 저녁마다 피어오르던 연기.

그 사람들은 기록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땅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연희동 골목을 걸을 때, 발밑을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그 한 번의 생각이, 우리가 이 땅의 옛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인사니까요.

내 부지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신가요?문화재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현재와 다름)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논 네 배미에


홍제천이 하늘을 담았다.



밭 여덟 자락,


누군가의 봄이 지나갔다.



집터 넷,


저녁마다 연기가 피었다.



궁궐은 이름만 남기고 떠났지만


땅은 사람을 남겨 두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