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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밭 스물일곱 자락과 집터 열넷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9일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대문구 편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밭 스물일곱 자락과 집터 열넷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42필지국유지 전체

111,603㎡국유지 총면적

84.1%밭이 차지한 면적 비율

14필지대지(집터)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는 국유지 42필지, 총 111,603㎡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27필지 93,808㎡, 대지 14필지 12,033㎡, 논 1필지 5,762㎡였습니다.

즉, 신촌동 국유지는 면적의 84.1%가 밭이었던 전형적인 도성 밖 농촌형 국유지였습니다.

지금 신촌에서 커피 한 잔 들고 걷는 그 길, 114년 전에는 밭고랑이었습니다.

믿기 어렵죠.

대학가의 불빛, 버스킹 소리, 새벽까지 꺼지지 않는 간판들.

그런데 1912년 토지조사 장부를 펼치면 전혀 다른 신촌이 나옵니다.

나라 땅만 42필지.

그중 27필지가 흙냄새 나는 밭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게요.

당신이 매일 밟는 그 보도블록 아래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사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숫자 몇 개로 신촌동의 잊힌 얼굴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신촌이 조금 다르게 보이실 거예요.


목차

  1. 신촌동 역사, 이름부터 '새 마을'이었다

  2. 1912년 신촌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3. 신촌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4. 신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5. 신촌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6. 한눈에 보는 지목별 비교표

  7. 숫자가 말해주는 1912년 신촌의 풍경

  8. 왜 100년 전 토지 장부가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일까?

  9.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이야기

  10. 땅 밑에서 도시를 찾아낸 성공 사례

  11. 신촌동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12. 자주 묻는 질문


1신촌동 역사, 이름부터 '새 마을'이었다

새로 생긴 마을, 신촌

신촌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새 신(新)에 마을 촌(村)을 씁니다.

말 그대로 새로 들어선 마을이라는 뜻이죠.

옛사람들은 이 일대를 새말, 새터말처럼 정겹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젊은 동네 중 하나지만, 이름이 붙던 시절에도 이곳은 '새것'이었던 셈입니다.

도성 밖, 한강으로 가는 길목

조선 시대 신촌은 한양 도성 서쪽 성문 밖에 자리한 교외였습니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나와 한강 나루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고, 낮은 구릉과 골짜기 사이로 밭과 논이 펼쳐진 농촌이었죠.

안산과 연희 언덕이 감싸 안은 지형이라 바람은 순했고, 물길도 가까웠습니다.

사람이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에 나쁘지 않은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행정구역이 여러 번 바뀐 동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1912년의 신촌은 지금처럼 서대문구 신촌동이 아니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하게 되었고, 1936년에야 경성부로 다시 편입됩니다.

서대문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보다도 뒤의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신촌동'은 오늘날 법정동 신촌동의 범위를 기준으로 1912년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그 뒤로 대학이 들어서고, 철길이 놓이고, 상가가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그 모든 변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얼굴이 바로 1912년 장부 속 신촌입니다.



21912년 신촌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였나요?

42필지, 111,603㎡라는 숫자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42필지, 면적은 111,603㎡였습니다.

감이 잘 안 오시죠.

평으로 바꾸면 약 33,760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를 약 7,140㎡로 잡으면, 축구장 15개 반이 넘는 넓이입니다.

작은 마을 하나의 나라 땅이 이 정도였다는 건 꽤 의미 있는 규모예요.

필지 하나는 평균 얼마나 컸을까

전체 면적을 필지 수로 나눠 보면 한 필지 평균은 약 2,657㎡입니다.

하지만 평균은 늘 속임수를 품고 있죠.

지목별로 쪼개 보면 밭은 넓고, 집터는 작고, 논은 단 하나지만 덩치가 큽니다.

이 차이가 바로 1912년 신촌의 생활 모습을 알려주는 단서가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신촌동 국유지는 총 42필지 111,603㎡였으며 밭·대지·논 세 가지 지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신촌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의 주인공은 단연 밭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 중 밭은 27필지, 93,808㎡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64.3%, 면적으로는 무려 84.1%입니다.

열 걸음을 걸으면 여덟 걸음 이상은 밭을 밟았다는 이야기예요.

밭 한 필지는 약 1,000평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3,474㎡, 평으로는 1,050평 남짓입니다.

집 마당에 딸린 텃밭 수준이 아니었다는 뜻이죠.

구릉 비탈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밭에서 보리와 콩, 채소가 자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성과 가까운 교외의 밭은 대개 도성 사람들의 식탁을 채우는 채소 산지 역할을 했습니다.

신촌의 밭도 그 흐름 속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밭은 27필지 93,808㎡로, 국유지 전체 면적의 84.1%를 차지했습니다.



4신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열네 개의 집터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14필지, 12,033㎡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3분의 1이나 되지만, 면적은 10.8%에 그칩니다.

작고 촘촘했던 대지

대지 한 필지 평균은 약 860㎡, 260평 정도입니다.

초가집 한 채와 마당, 장독대, 작은 헛간이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대지는 사람이 살던 자리입니다.

사람이 살던 자리에는 아궁이 흔적, 깨진 그릇 조각, 기와 파편, 기둥을 세운 구멍이 남습니다.

고고학에서는 이런 것을 생활 유구라고 부릅니다.

국유지 대지 14필지가 흩어져 있었다는 건, 신촌 땅 아래 생활의 흔적이 군데군데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14필지 12,033㎡였고, 한 필지 평균은 약 860㎡였습니다.


5신촌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단 하나의 논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 중 논은 단 1필지, 5,762㎡였습니다.

면적 비율은 5.2%로 가장 작습니다.

그런데 필지 하나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5,762㎡는 밭 한 필지 평균보다 1.6배 넓고, 대지 한 필지 평균보다 6.7배 넓습니다.

논은 물이 있다는 증거

논은 물 없이는 만들 수 없습니다.

이 한 필지의 논은 근처에 개울이나 물이 고이는 낮은 골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줍니다.

구릉 위로는 밭이, 골짜기 아래로는 논이 자리 잡은 모습.

지형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 한 필지가 지도 한 장만큼 많은 걸 말해줍니다.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논은 1필지 5,762㎡로, 단일 필지 기준으로는 가장 넓은 땅이었습니다.


6한눈에 보는 지목별 비교표

지금까지의 숫자를 표 하나로 모았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밭

27

93,808

84.06%

3,474

대지

14

12,033

10.78%

860

논

1

5,762

5.16%

5,762

합계

42

111,603

100%

2,657

표 설명: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 42필지 111,603㎡를 밭, 대지, 논으로 나눈 표입니다. 밭 27필지 93,808㎡, 대지 14필지 12,033㎡, 논 1필지 5,762㎡입니다.

지목별 면적 비율

밭

84.06%

대지

10.78%

논

5.16%

지목별 필지 수 비율

밭

27필지

대지

14필지

논

1필지



7숫자가 말해주는 1912년 신촌의 풍경

밭은 넓게, 집은 작게

숫자를 그림으로 바꿔 볼까요.

면적의 대부분은 밭이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작은 집터 열네 곳이 콕콕 박혀 있었고, 물이 고이는 낮은 자리에 논 한 배미가 누워 있었습니다.

밭 면적은 논 면적의 약 16.3배입니다.

이 비율은 신촌이 물보다는 구릉이 많은, 마른 땅 중심의 농촌이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필지 수와 면적이 어긋나는 이유

대지는 필지 수로 33.3%인데 면적은 10.8%뿐입니다.

반대로 밭은 필지 수 64.3%에 면적 84.1%죠.

작은 조각으로 쪼개진 땅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 큰 덩어리로 남은 땅은 농사를 짓던 곳.

이 단순한 공식이 신촌의 1912년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그 땅은 지금 어디에

오늘날 법정동 신촌동은 대학 캠퍼스와 그 주변 언덕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1910년대 후반 이 언덕에 근대 학교가 터를 잡으면서, 밭과 집터는 서서히 교정과 건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강의실과 잔디밭 아래에는, 1912년 누군가 호미질하던 흙층이 겹겹이 눌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소름 돋지 않나요.



8왜 100년 전 토지 장부가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일까?

땅의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판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런데 땅을 파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예전에 무엇이 있었나?"

이 질문에 가장 객관적으로 답해 주는 자료 중 하나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입니다.

필지마다 지목, 면적, 소유 관계가 적혀 있어서, 근대 도시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땅 모습을 꽤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거든요.

지목은 유적의 힌트가 된다

대지였던 곳은 주거지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논이었던 곳은 수리시설이나 경작층 흔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밭이었던 넓은 구릉은 그보다 더 오래된 시대의 유적이 상대적으로 덜 훼손된 채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목 하나하나가 조사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데 쓰이는 귀중한 단서가 됩니다.

법이 정한 조사 의무

우리나라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를 할 때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에 따라 매장유산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조사의 세부 기준과 절차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를 따릅니다.

지표조사 보고서를 쓸 때 해당 부지의 역사 환경을 정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1912년 지목 자료는 바로 그 역사 환경 정리의 뼈대가 됩니다.


9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이야기

첫걸음, 문화재 지표조사

지표조사는 땅을 파지 않고 하는 조사입니다.

문헌과 옛 지도, 토지 기록을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땅 위에 드러난 토기 조각이나 기와 편을 찾습니다.

신촌동처럼 1912년 지목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이 단계에서 정확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두 번째,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보이면 표본조사로 넘어갑니다.

부지 일부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흙층의 상태를 확인하는 단계예요.

바늘로 콕 찔러 보듯, 최소한의 굴착으로 땅속 사정을 엿봅니다.

세 번째, 시굴조사

시굴조사는 좀 더 본격적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긴 도랑, 이른바 트렌치를 파서 유구가 어디에, 얼마나 분포하는지 범위를 확인합니다.

이 결과에 따라 발굴이 필요한 구역이 확정됩니다.

마지막,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유적을 전면적으로 드러내 기록하는 단계입니다.

층을 하나씩 걷어내며 집터, 우물, 도로, 무덤 같은 흔적을 실측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유물을 수습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전문 자격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수행합니다.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이 네 단계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데 1912년 신촌동 기록 같은 기초자료가 쓰입니다.



10땅 밑에서 도시를 찾아낸 성공 사례

빌딩 아래서 되살아난 골목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재개발 공사를 앞두고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골목길과 집터가 통째로 확인되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다 허물고 끝났을 땅이었죠.

하지만 유적은 기록되고 보존되었고, 새로 지은 빌딩 지하에는 그 골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관이 생겼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나온 고대 왕성

송파구 풍납동에서는 아파트 공사 중에 백제 시대 유물이 쏟아지면서 한성백제 왕성 연구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이 일은 공사 전 사전 조사가 왜 중요한지를 우리 사회에 강하게 각인시킨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공 사례의 공통점

두 사례 모두 출발점은 같았습니다.

땅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그리고 그 관심이 늦지 않았다는 것.

공사 중간에 유적이 갑자기 드러나면 공정이 멈추고 비용은 불어납니다.

반대로 기초조사 단계에서 미리 살피면 일정과 예산을 계획 안에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신촌동 1912년 기록 같은 자료가 쓸모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1신촌동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

상상해 보세요.

설계도 끝났고, 착공식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굴착기 바가지에 기와 조각이 걸려 나옵니다.

현장은 멈추고, 매일 비용이 쌓이고, 일정표는 다시 쓰여야 합니다.

이건 겁주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미리 보면 길이 보인다

신촌동 국유지만 해도 집터 14필지, 밭 27필지, 논 1필지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내 부지가 그중 어디와 겹치는지 미리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조사 범위와 방법을 훨씬 정확하게 잡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검토하고 계시다면, 사업 초기에 문화재 발굴 기관과 상담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선택입니다.

서울 각 동의 1912년 기록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시리즈로 계속 정리하고 있습니다.



검증 노트

  • 필지 수 합계: 밭 27 + 대지 14 + 논 1 = 42필지로, 원자료 총계 42필지와 일치합니다.

  • 면적 합계: 93,808 + 12,033 + 5,762 = 111,603㎡로, 원자료 총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반올림 오차는 없습니다.

  • 비율은 총면적 111,603㎡ 기준으로 소수 둘째 자리까지 계산했습니다(밭 84.06%, 대지 10.78%, 논 5.16%).

  •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이며, 111,603㎡는 약 33,760평입니다.

  • 행정구역 안내: 1912년 당시 신촌 일대는 오늘날의 서대문구 신촌동이 아니었습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으며, 본문 수치는 현재 법정동 신촌동 범위 기준 정리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 신촌동은 밭이 국유지 면적의 84.06%를 차지해, 밭 중심 농촌형 국유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 논은 단 1필지지만 단일 필지 면적(5,762㎡)은 세 지목 가운데 가장 큽니다.

  • 대지는 필지 수 33.3%에 면적 10.8%로, 작은 집터가 촘촘히 흩어진 구조가 뚜렷합니다.



12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42필지, 면적은 111,603㎡였습니다.

Q.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27필지 93,808㎡로, 국유지 면적의 84.06%였습니다.

Q.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4필지 12,033㎡였습니다.

Q. 1912년 신촌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1필지 5,762㎡였습니다.

Q. 1912년 당시 신촌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A. 지금의 서대문구 신촌동과 달랐습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A. 필지별 지목을 통해 집터, 논, 밭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어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국유지는 총 42필지 111,603㎡였으며, 밭 27필지 93,808㎡, 대지 14필지 12,033㎡, 논 1필지 5,762㎡로 이루어진 밭 중심의 농촌 땅이었습니다.

신촌은 늘 새로웠습니다.

이름이 붙던 날에도, 학교가 들어서던 날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요.

하지만 새로움은 언제나 오래된 흙 위에 쌓입니다.

27필지의 밭을 일구던 손, 14곳의 집터에서 밥을 짓던 연기, 한 배미 논에 비친 하늘.

그 사람들은 기록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땅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신촌 골목을 걸을 때, 발밑을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그 한 번의 생각이 우리가 과거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인사니까요.

내 부지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신가요?문화재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현재와 다름)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밭고랑 스물일곱 줄,


누군가의 봄이 지나갔다.



집터 열넷,


저녁마다 연기가 피었다.



논 한 배미에 비친 하늘은


지금 강의실 창문에도 비친다.



새 마을이라 불린 땅은


사실 가장 오래 기다린 땅이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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