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중동의 땅 이야기: 논과 밭, 그리고 문화재 발굴로 보는 삶의 흔적
- 2025년 8월 2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마포구 중동 역사
마포 중동, 98필지가 품은 1912년의 논밭전체의 70%가 논이었던 마을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마포구 중동 · 98필지 · 217,386㎡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당신이 오늘 지나치는 마포구 중동의 아파트 단지 자리에 황금빛 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마포구 중동은 아파트와 상업지구로 가득하지만, 1912년 이 땅의 70%는 논이었습니다. 98필지, 217,386㎡의 땅 위에서 김씨·조씨·홍씨 가문이 두레를 이루어 벼를 심고, 품앗이로 수확을 거두던 농촌 공동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중동의 땅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중동, 98필지의 전체 풍경
논의 풍경 — 전체 70%를 채운 51필지 149,799㎡
집터와 대지 — 단 4필지가 이룬 마을의 중심
밭에서 이어진 생활 경제 — 43필지 58,644㎡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조씨·홍씨의 이야기
논농사 공동체의 생활상 — 두레와 품앗이의 세계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중동의 과거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논밭 기억들
마포구의 문화재 발굴 가능성과 지표조사의 중요성
마무리 — 땅이 말해주는 역사와 우리의 현재

SECTION 01
1912년 중동, 98필지의 전체 풍경
마포구 중동. 지금은 한강변 아파트와 상가가 이어지는 현대적인 주거 지역이지만, 1912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중동은 총 98필지, 217,386㎡의 땅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약 6만 5천 평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여러 마을들과 비교할 때, 중동은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논의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논이 전체 면적의 70%에 달한다는 것은, 이 시리즈의 어떤 마을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입니다. 중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논농사를 중심으로 마을 전체가 돌아가던 순수한 벼농사 공동체였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논이 많다는 것은 수로와 수리 시설, 논둑 구조물, 물꼬 관련 유구가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단서는 언제나 이런 역사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98총 필지 수
217,386㎡총 면적
51논 필지 수
43밭 필지 수
4대지 필지 수
29김씨 소유 필지
SECTION 02
논의 풍경 — 전체 70%를 채운 51필지 149,799㎡
중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논입니다. 51필지, 149,799㎡. 전체 98필지 중 절반이 넘고, 전체 면적의 약 70%가 논이었습니다.
1912년 중동 논의 비중70%
51필지 · 149,799㎡
전체 217,386㎡ 중 논이 차지한 면적
이 숫자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실감하려면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 보면 됩니다. 구로동은 논이 229필지로 많았지만 밭도 그에 맞먹었습니다. 홍은동은 밭이 논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동은 논 51필지가 밭 43필지보다 많고, 면적 비중도 70%에 달합니다. 중동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순수한 논농사 중심 마을이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중동의 여름 논한강과 가까운 중동의 평야에 논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모내기철이면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이루어 일렬로 서서 모를 심습니다. 여름이 깊어지면 초록 물결이 일렁이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김씨 댁 논과 조씨 댁 논 사이 물꼬를 두고 물 관리를 의논하는 목소리, 수확을 앞두고 기도를 올리는 제사 소리. 149,799㎡의 논 위에서 이 모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벼농사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논에 물을 대는 수로를 함께 관리하고, 모내기와 수확을 함께 하고, 가뭄이 들면 함께 기우제를 지내고, 풍년이 들면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중동의 51필지 논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협력과 연대를 만들어내는 공간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논 구역은 특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논둑 구조물, 수로 흔적, 물꼬 관련 석재, 농기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한강과 가까운 중동의 지리적 특성상, 논에 물을 공급하던 수리 시설의 잔재가 발굴될 수 있습니다. 이 구역의 시굴조사는 조선 말기 마포 일대 농업 문화를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3
집터와 대지 — 단 4필지가 이룬 마을의 중심
중동 98필지 중 집터인 대지는 단 4필지, 8,942㎡였습니다. 이 숫자가 놀라운 이유는 그 적음 때문입니다. 전체 98필지 중 겨우 4%만이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비교해 보면, 원효로4가는 전체의 95%가 대지였고, 하중동은 68%, 토정동은 93%였습니다. 그런데 중동은 단 4%. 이 극명한 차이가 중동이 얼마나 순수한 농경 공간이었는지를 단번에 보여줍니다. 중동은 사람이 모여 사는 주거 마을이 아니라, 논밭을 경작하기 위해 소수의 농가가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진정한 의미의 농촌이었습니다.
4필지, 8,942㎡. 약 2,700평의 집터에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논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집들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이 농사 일정을 의논하고, 가을 수확 후 따뜻한 밥상을 차리던 풍경. 단 4필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치고는 참으로 깊고 넓습니다.
단 4필지의 대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집중적인 조사 가치를 갖습니다. 면적은 좁지만 사람의 활동이 집중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주춧돌, 우물터, 아궁이 잔재, 다양한 생활 도구들이 이 4필지 안에 밀집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논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터 유구를 발굴한다면, 당시 농가의 생활 구조와 공간 배치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SECTION 04
밭에서 이어진 생활 경제 — 43필지 58,644㎡
중동의 논 51필지 옆에는 밭 43필지, 58,644㎡가 있었습니다. 논이 주식인 쌀을 담당했다면, 밭은 부식과 잡곡을 책임지는 공간이었습니다. 보리, 콩, 조, 채소. 논에서 벼를 기르는 동안 밭에서는 이 다양한 작물들이 함께 자랐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논농사만으로는 생계를 완전히 충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밭에서 거둔 채소와 잡곡 일부를 마포나루 장터에 내다 팔아 현금을 마련했을 것이고, 그 현금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논농사와 밭농사가 하나의 순환 경제를 이루며 중동 사람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밭 구역도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밭두렁의 경계선, 농경 층위, 씨앗 잔존물 등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논 구역과 밭 구역의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중동의 옛 농경 공간 구조를 지도처럼 복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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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조씨·홍씨의 이야기
98필지의 중동 땅은 누가 소유하고 있었을까요. 1912년 기록에는 세 성씨가 두드러지게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김씨29필지전체의 약 30%
최대 보유 가문
조씨22필지전체의 약 22%
두 번째
홍씨13필지전체의 약 13%
세 번째
김씨 29필지, 조씨 22필지, 홍씨 13필지. 이 세 가문만 합쳐도 64필지로 전체 98필지의 약 65%를 차지합니다. 중동은 세 가문이 마을 대부분의 땅을 나눠 가진 비교적 단순한 소유 구조였습니다.
특히 홍씨 13필지는 흥미롭습니다. 같은 마포구 내에서 홍은동(弘恩洞)에도 홍씨가 16필지 있었는데, 마포 지역에서 홍씨 가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같은 홍씨라도 관계가 없을 수 있지만, 이런 성씨 분포의 유사성은 역사 연구에서 흥미로운 단서가 됩니다.
세 가문의 토지 분포를 추적하면 중동의 옛 마을 구조와 논밭 배치를 복원하는 가장 정밀한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김씨 가문이 어느 구역의 논을 주로 소유했는지, 조씨 가문의 밭이 어디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어느 구역을 먼저 살펴야 하는지가 결정됩니다. 토지 기록과 성씨 분포는 발굴의 정밀도를 높이는 핵심 자료입니다.

SECTION 06
논농사 공동체의 생활상 — 두레와 품앗이의 세계
논이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했던 중동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논농사는 협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농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중동 사람들의 삶은 두레와 품앗이라는 공동 노동 시스템 위에서 돌아갔습니다.
1912년 중동 논농사 공동체의 일상
봄이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수로를 함께 정비하고, 물꼬를 관리하는 차례를 정했습니다. 물은 마을 전체의 공유 자원이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라도 물을 독점하면 마을 전체가 어려워졌습니다.
모내기철에는 두레를 이루어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를 심었습니다. 오늘은 김씨 댁 논, 내일은 조씨 댁 논, 모레는 홍씨 댁 논. 이 순환 속에서 마을의 연대가 굳건해졌습니다.
가을 수확이 끝나면 풍년을 감사하는 제사를 함께 지내고, 마을 어귀에서 두레놀이를 벌였습니다. 이 문화적 전통이 중동의 토지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적 삶의 흔적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유적과 유물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공동 제사 공간의 흔적, 두레가 사용하던 농기구, 공동 수리 시설의 잔재. 이것들이 중동의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SECTION 07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중동의 과거
서울은 끊임없이 재개발되는 도시입니다. 마포구 중동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파트 재건축과 상업지구 개발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51필지의 논 아래 수리 시설 유구와 4필지의 집터 아래 생활 유구, 43필지의 밭 아래 농경 층위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1912년 중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됩니다. 땅의 분포와 성격을 알면 발굴 방향을 세울 수 있고, 유적 발견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특히 논이 70%에 달하는 중동에서는 수리 시설과 농경 관련 유구를 찾는 데 이 기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중동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논 51필지 구역의 수로와 논둑 잔재, 집터 4필지의 생활 유구를 우선 확인하는 전략이 효과적입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중동이 품고 있는 논농사 문화의 기억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습니다.
한강에 인접한 마포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수운과 물류의 거점이었습니다. 중동의 논에 물을 공급했던 수리 시설이 한강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발굴을 통해 밝혀낸다면, 조선 말기 마포 일대의 수리 농업 체계를 복원하는 귀중한 성과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8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논밭 기억들
성공 사례 01 — 종로에서 발굴된 고려 시대 유물
종로에서는 재개발 전 지표조사를 통해 고려 시대 유물이 발굴되어 당시의 도시 구조와 생활상이 복원되었습니다. 이 성과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중동처럼 오랜 농경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귀중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서울 구릉지 농경 층위 발굴
서울 서북부 구릉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논과 밭의 농경 층위가 연속으로 확인된 사례가 있습니다. 논둑 구조물, 수로 잔재, 씨앗 탄화물이 출토되어 당시 농업 방식이 구체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중동의 51필지 논은 이와 동일한 조건에서 더욱 풍부한 발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강남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유적
강남 지역 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한강 주변 지역에서 선사 시대부터 이어진 사람의 활동 흔적이 발굴된 것입니다. 한강과 가까운 중동도 이런 다층적 역사 층위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SECTION 09
마포구의 문화재 발굴 가능성과 지표조사의 중요성
마포구는 서울에서도 한강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조선 시대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한강 수운이 발달했고, 그 덕분에 중동 같은 농촌 마을도 외부 세계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중동의 땅속에 다양한 시대의 문화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지표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중동의 땅 역사적 가치를 조기에 발견한다면, 재개발 과정에서도 문화유산을 지킬 수 있습니다. 51필지의 논에서 수리 시설 유구가 발견된다면, 4필지의 집터에서 생활 유물이 출토된다면, 그것은 조선 말기 마포의 농경 공동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실물로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문화재 발굴의 시작은 언제나 기록입니다. 1912년 중동의 98필지 기록이 오늘날 지표조사의 첫 번째 나침반이 되고, 그 나침반을 따라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 중동의 황금빛 논이 품고 있던 이야기가 세상으로 나옵니다.

SECTION 10
마무리 — 땅이 말해주는 역사와 우리의 현재
1912년 마포구 중동의 217,386㎡는 단순한 면적이 아닙니다. 그 70%를 채웠던 논에서는 벼가 자랐고, 43필지의 밭에서는 콩과 보리가 영글었으며, 단 4필지의 집터에서는 김씨·조씨·홍씨 가문의 삶이 오롯이 펼쳐졌습니다. 두레를 이루어 함께 모를 심고, 수확 후 함께 제를 올리던 공동체의 기억이 이 98필지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선 그 자리에,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 통해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은 단순히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담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중동의 황금빛 논이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 땅을 기억해 달라"고.

"98필지의 논과 밭이지금 당신에게 말을 건다"
51필지 황금빛 논에서 두레를 이루던 사람들, 43필지 밭에서 보리와 콩을 거두던 손길, 단 4필지 집터에서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마을.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아스팔트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김씨 29필지, 조씨 22필지, 홍씨 13필지. 그들이 일군 땅의 기억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깨우는 첫 번째 삽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땅은 단순히 개발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를 담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중동의 98필지가 오늘도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합니다.
마포 중동의 황금빛 논은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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