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인리 그 땅 아래, 누가 잠들어 있는가1912년 마포구 당인동 국유지 14,175㎡의 기록
문화재 발굴조사 · 분묘지 · 당인동 역사
당인리 그 땅 아래, 누가 잠들어 있는가1912년 마포구 당인동 국유지 14,175㎡의 기록
마포구 당인동, 지금은 한강변 문화발전소가 들어선 그 동네에112년 전, 국가가 관리하는 묘지가 있었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당인동기준연도 1912년문화유산 발굴·지표조사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국유지
14,175㎡
6필지 총 면적
밭 (3필지)
7,937㎡
전체 약 56.0%
분묘지 (1필지)
3,524㎡
전체 약 24.9%
대지 (2필지)
2,714㎡
전체 약 19.1%
목 차
01당인리 발전소 아래 묻혀버린 이름들
021912년 당인동 국유지 6필지의 실체
03분묘지 3,524㎡ — 국가 묘지가 여기 있었다
04밭 7,937㎡와 대지 2,714㎡ — 삶과 죽음이 공존하던 땅
05분묘지 발굴조사의 특수성 — 왜 더 조심스러워야 하나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가이드
07마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08기억되어야 할 이름들을 위해
01당인리 발전소 아래 묻혀버린 이름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그 땅에 묻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 아래에.
마포구 당인동, 또는 흔히 불리는 이름 '당인리'. 지금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당인리 화력발전소,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서울화력문화재생지구입니다. 한강 바로 옆 독특한 산업 유산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이 프로젝트는 국내외에서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재생 프로젝트 이전, 당인동의 땅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전문 기관 seoulheritage.org의 1912년 지적원도 기초조사에 따르면, 당시 당인동에는 총 6필지 14,175㎡의 국유지가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분묘지(墳墓地)'였습니다. 즉, 국가가 관리하는 공식 묘지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분묘지는 단순한 토지 지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 아래에 실제로 사람이 묻혀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이 땅에 묻히게 되었는지.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분묘지가 포함된 국유지는 다른 어떤 지목보다 신중하고 체계적인 문화재 조사가 요구됩니다. 땅 아래에 사람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021912년 당인동 국유지 6필지의 실체
당인동의 국유지 구성은 이 지역의 복합적인 역사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총 14,175㎡, 6필지에 세 가지 지목이 섞여 있습니다.
지목 구분 | 필지 수 | 면적 | 전체 비율 |
대지 (건물 부지) | 2필지 | 2,714㎡ | 약 19.1% |
분묘지 (묘지) | 1필지 | 3,524㎡ | 약 24.9% |
밭 (농경지) | 3필지 | 7,937㎡ | 약 56.0% |
합계 | 6필지 | 14,175㎡ | 100% |
밭 (농경지)7,937㎡ · 56.0%
분묘지 (묘지)3,524㎡ · 24.9%
대지 (건물 부지)2,714㎡ · 19.1%
이 구성에서 주목할 점은 국유지 안에 밭, 묘지, 건물 부지가 나란히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부터 한양 외곽의 마포 일대는 한강 수운(水運)의 거점이자 생활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대지 2필지는 그 생활을 지탱한 건물들의 자리이고, 밭 3필지는 그들의 먹거리를 생산한 터전입니다. 그리고 분묘지 1필지는 그 삶이 끝난 자리입니다.
삶과 죽음이 한 구역 안에 기록된 이 땅은, 당인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생로병사가 고스란히 쌓인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줍니다.

03분묘지 3,524㎡ — 국가 묘지가 여기 있었다
이번 당인동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목은 단연 분묘지입니다. 1필지 3,524㎡. 테니스 코트 약 16개 크기의 이 땅이 국유 분묘지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초기, 분묘지(墳墓地)는 개인 소유 묘지와 공동 묘지, 그리고 국가가 관리하는 관리 묘지로 나뉘었습니다. 국유 분묘지는 주로 특정 계층이나 집단과 연관된 묘역, 또는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공동 안장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당인동의 분묘지가 어떤 성격의 국유 묘지였는지는 추가적인 문헌 조사와 현장 조사를 통해 밝혀야 할 핵심 과제입니다.
관리 묘역 가능성
특정 관직자나 공공 업무 종사자와 관련된 묘역으로, 국가가 직접 관리했을 가능성
무연고 공동묘지 가능성
연고 없이 사망한 빈민이나 외지인들을 위한 공동 안장 공간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
특수 기관 연계 묘역
마포 일대 군사 시설이나 관아와 연계된 특수 묘역으로 국유 관리됐을 가능성
어떤 유형이든, 3,524㎡의 국유 분묘지는 그 아래에 실제 매장 유구(遺構)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석관, 목관 흔적, 부장 유물, 비석 기초석 등이 지하에 잔존할 수 있으며, 이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신중하고 정밀하게 다루어야 할 대상입니다.

분묘지는 단순한 토지가 아닙니다. 그곳은 한때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 발굴조사는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04밭 7,937㎡와 대지 2,714㎡ — 삶과 죽음이 공존하던 땅
분묘지와 나란히 존재하는 밭 3필지 7,937㎡와 대지 2필지 2,714㎡는 당인동 국유지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줍니다. 당인동 일대는 조선 후기 마포 강변의 생활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포는 조선시대 한강의 핵심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한강 상류에서 내려온 배들이 마포 나루에서 짐을 풀고, 도성으로 물자를 공급하던 곳이었습니다. 새우젓, 소금, 쌀, 나무 등 각종 생필품이 거래되던 이 포구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는 농경지와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대지 2필지 2,714㎡는 이 생활권 안에서 관청이나 공공 기능을 담당했던 건물 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유 대지라는 점은 민간 주거지가 아닌 공공 목적의 건물이 이 자리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마포 나루 관련 세관 시설, 창고, 또는 관리 건물의 흔적이 이 대지 구역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밭 3필지 7,937㎡는 전체 국유지의 56%를 차지하는 핵심 구역입니다. 한강 변의 비옥한 충적 토양 위에 펼쳐진 이 농경지는 다양한 생활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마포 일대는 한강 범람으로 인해 토층이 여러 겹 쌓인 지역이 많아, 한 번 굴착하면 복수의 시대에 걸친 문화층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05분묘지 발굴조사의 특수성 — 왜 더 조심스러워야 하나
분묘지가 포함된 구역의 문화재 발굴조사는 일반 토지와는 다른 특별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법적·행정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 잠든 사람들에 대한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법적으로 보면, 매장 문화유산 관련 조사에서 인골(人骨)이나 매장 유구가 발견될 경우 별도의 처리 절차가 적용됩니다. 국가유산청과 지자체에 즉시 신고해야 하며, 관련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직접 유구의 성격을 판단하고 처리 방향을 결정합니다. 임의로 이동하거나 훼손하면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학술적으로는, 분묘지의 발굴이 단순한 토목 작업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매장 유구에서는 피장자(被葬者)의 신원, 시대, 사회적 계층, 사인 등 다양한 역사적 정보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부장품의 종류와 수량은 당시의 장례 문화와 경제 수준을 보여주고, 매장 방식은 시대별 종교·사상적 변화를 반영합니다.
분묘지 구역의 발굴조사에서는 반드시 매장 문화유산 전문 조사기관이 참여해야 하며, 인골 출토 시 법의인류학 전문가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절차를 생략하면 법적 제재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역사 정보의 손실이 발생합니다.
당인동 분묘지 3,524㎡의 경우,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지표면의 미세한 지형 변화나 식생 패턴을 통해 매장 위치를 사전에 예측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현대 기술인 지표투과레이더(GPR) 탐사를 활용하면 땅을 파지 않고도 지하 구조물의 위치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어, 분묘 발굴조사의 정밀도와 안전성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가이드
당인동처럼 분묘지가 포함된 복합 지목 국유지는 각 지목의 특성에 맞춘 맞춤형 조사 설계가 필수입니다. 단일 지목 토지보다 훨씬 복잡한 조사 프로세스가 요구됩니다.
조사 단계 | 방법 | 분묘지 구역 특이사항 |
문화재 지표조사 | 육안·문헌·GPR 탐사 | 지형 변화·식생 패턴 분석, 고지도 문헌 비교로 매장 위치 예측 |
표본조사 | 소규모 굴착 (2% 이내) | 분묘지 구역 외곽부터 접근, 매장 유구 존재 여부 먼저 확인 |
시굴조사 | 트렌치 굴착 (10% 이내) | 인골 출토 즉시 조사 중단, 국가유산청·지자체 신고 의무 |
정밀발굴조사 | 전면 굴착 | 법의인류학 전문가 동행, 매장 유구 3D 기록화 필수 |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는 1912년 지적원도 외에도 조선시대 지형도, 일제강점기 경성 지도, 항공사진 등 다양한 역사 문헌을 교차 분석해야 합니다. 특히 분묘지의 경우, 비석이나 묘표 등 지표면에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현장 답사 시 세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대지 구역과 밭 구역은 상대적으로 표준적인 매장 문화유산 조사 절차를 따르면 됩니다. 다만 마포 한강 변 특성상 퇴적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조사 굴착 깊이 설계 시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07마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성공 사례 — 마포 공덕동 일대 도시 재개발 발굴조사
마포구 공덕동 일대 재개발 사업 진행 과정에서 시행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도자기 파편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이 성과는 마포 일대가 조선시대 도성 외곽 생활권으로서 상당한 역사 밀도를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발굴된 유물들은 보고서로 정리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수장되었으며, 이후 지역 역사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 서울 초안산 분묘군식 조사 방법론 확립 (창동)
도봉구 창동 초안산에서 조선시대 분묘 1,000여 기가 발굴된 사례는 분묘 발굴조사의 교과서로 꼽힙니다. 철저한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단계적으로 정밀발굴조사까지 이어진 이 성과는, 분묘지가 포함된 국유지 조사에서 어떤 방법론이 효과적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인동 분묘지 발굴조사에서도 이 방법론을 적극 참고할 수 있습니다.
두 사례 모두 강조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개발 이전에 먼저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개발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인동의 경우,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이 분묘지와 국유지의 역사가 함께 조명되었더라면 더욱 풍부한 역사 문화 콘텐츠가 탄생했을 것입니다.
08기억되어야 할 이름들을 위해
1912년 당인동 분묘지에 잠든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그 땅에 묻히게 되었는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3,524㎡의 국유 분묘지라는 기록은, 그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단순히 유물을 캐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잊혀진 사람들의 이름을 되찾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특히 분묘지 발굴은 그 어떤 조사보다 인간적인 온도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흙 한 삽 한 삽을 걷어낼 때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처였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발굴조사 종사자들이 매일 현장에서 실천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seoulheritage.org의 1912년 서울 국유지 기초조사 프로젝트는 바로 이런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당인동을 포함하여 서울 25개 구의 모든 국유지 기록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공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땅의 역사를 알고 소중히 여기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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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네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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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날 곳을 선택하지 못합니다.하지만 어디에 기억될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1912년 당인동 분묘지에 잠든 이들은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시작하는 첫 삽입니다.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줄 것을 바란다면,먼저 당신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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