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기초조사 | 마포구 도화동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대지·분묘지·밭 면적 완전 정리
- 2일 전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기초조사 | 마포구 도화동
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대지·분묘지·밭 면적 완전 정리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이 남긴 기록으로 도화동 땅의 진짜 역사를 읽는다
12필지
전체 국유지
174,090㎡
총 면적
3종
지목 구분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는 국유지 12필지, 총 174,090㎡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5필지(102,013㎡)가 전체의 58.6%를 차지해 가장 넓었고, 대지 4필지(51,957㎡), 분묘지 3필지(20,119㎡) 순이었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역사 기초자료로 활용되며, 현재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 지금 당신이 걷는 그 도화동 길 아래에, 110년 전 국가가 소유했던 거대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SECTION 01
1. 1912년 도화동 땅, 그 기록이 왜 중요한가
도화동(桃花洞). 복숭아꽃이 피어나던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한때 이 땅은 꽤 낭만적인 풍경을 품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마포계·도화동계에 속했고, 한강 수운의 기운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1912년, 일제는 조선 전역의 토지를 낱낱이 측량하고 기록하는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지목(地目)이 무엇인지, 면적은 얼마인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낱낱이 조사한 이 사업은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행정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당시 땅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됐다.
특히 국유지(國有地) 기록은 당시 국가가 어떤 땅을 어떤 형태로 보유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재개발, 건축, 도시 개발이 반복되는 서울에서, 이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그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출발점이 바로 이 1912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마포구 도화동의 기록 역시 그 방대한 아카이브의 한 페이지다. 지금부터 그 숫자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함께 들여다보자.
SECTION 02
2.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전체 현황 — 핵심 수치부터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국유지는 총 12필지, 174,090㎡였으며, 밭(전) 5필지·대지 4필지·분묘지 3필지로 구성되었다.
숫자를 먼저 보자. 1912년 당시 마포구 도화동에 등록된 국유지는 총 12필지, 합산 면적 174,090㎡였다. 174,090㎡라는 숫자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다. 축구장 한 개가 약 7,140㎡라고 가정하면, 이는 무려 축구장 약 24개에 달하는 면적이다. 현재 마포구 도화동의 총 면적이 0.62㎢임을 감안하면, 1912년 국유지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밭(전), 대지, 분묘지. 이 세 가지 지목이 어떤 비율로 구성됐는지를 보면, 1912년 도화동이 어떤 성격의 공간이었는지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밭 (전, 田) | 5필지 | 102,013 | 58.6% |
대지 (垈地) | 4필지 | 51,957 | 29.8% |
분묘지 (墳墓地) | 3필지 | 20,119 | 11.6% |
합계 | 12필지 | 174,090 | 100% |
밭(전)
58.6%
대지
29.8%
분묘지
11.6%
표와 차트에서 한 가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밭이 전체의 58.6%로 압도적 1위다. 절반이 넘는 땅이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지금의 도화동이 고층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가득한 주거 밀집지역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SECTION 03
3. 밭 5필지 102,013㎡ — 도화동의 절반은 농경지였다
밭이라는 지목(田)은 벼를 심는 논(畓)과 달리, 고구마·콩·보리·잡곡 등을 재배하는 밭을 뜻한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중 밭은 무려 5필지, 102,013㎡에 달했다. 전체 국유지의 절반을 훌쩍 넘기는 면적이다.
국유지 밭이 이렇게 넓었다는 건, 여러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은 토지에서 나왔다. 왕실·관청이 직접 운영하는 공전(公田)이 바로 이런 밭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한성부 인근의 국가 부지로 확보해 두었다가 대규모 공공 시설이나 군사 시설 용도로 쓰려 했던 땅일 수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같은 마포구 마포동의 경우 논(畓)이 단 한 필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도화동 역시 논에 대한 국유지 기록이 없고 오직 밭만 등장한다. 이는 도화동 일대의 지형적 특성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크다. 논농사가 가능한 평야보다는 약간 경사진 구릉지에 가까운 지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도화동 밭(전) 국유지
필지 수: 5필지 | 면적: 102,013㎡ | 전체 국유지 대비 비율: 58.6%
현재 면적 환산 기준: 약 축구장 14개 규모
102,013㎡라는 밭 면적은, 당시 이 동네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농업 생산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이 땅에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수많은 농민들이 땅을 일궜을 것이다. 그 땅 아래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바로 이 물음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된다.
SECTION 04
4. 대지 4필지 51,957㎡ — 누군가의 터전, 국가의 땅
두 번째로 넓은 지목은 대지(垈地)였다. 4필지, 51,957㎡. 전체 국유지의 약 29.8%를 차지하는 면적이다. 대지는 건물이 들어서거나 건물을 지을 목적으로 조성된 땅이다. 국유지 대지라면 관청 건물, 군사 시설, 혹은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 건축물이 세워졌거나 세워질 예정이었던 부지라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51,957㎡라는 면적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단순한 관청 하나가 차지하기에는 넓고, 복수의 공공 시설이나 군용지로 활용됐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도화동 일대는 용산구와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군사·행정 관련 시설이 들어오기 유리한 환경이었다.

현재의 도화동에는 마포아파트 단지(1962년 준공, 1991년 철거)가 있었던 자리가 포함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아파트 단지로 알려진 마포아파트가 들어선 땅, 그 밑에 어떤 역사 층위가 쌓여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다. 앞으로 해당 부지에 재개발이나 신축 공사가 진행될 경우,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유 대지 4필지 중 일부는 현재의 도시 구획과 겹칠 가능성이 높다. 그 지층 안에는 조선 시대의 건물 기단, 기와 파편, 도기 등 매장문화재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삽 한 번 잘못 들어갔다가 역사의 한 조각이 영구히 사라질 수 있다.
SECTION 05
5. 분묘지 3필지 20,119㎡ — 이 땅 아래 잠든 이들
주목 포인트 분묘지(墳墓地)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드물게 등장하는 지목입니다. 도화동에 3필지 20,119㎡의 국유 분묘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문화재 조사 관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묘지(墳墓地). 무덤이 있는 땅이다. 3필지, 20,119㎡. 전체 국유지의 11.6%를 차지하는 이 면적은,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게 등장하는 지목이다.
국유 분묘지라는 건 개인 묘가 아니라는 뜻이다. 왕실의 능(陵)이나 원(園)이 아닌 이상, 국유 분묘지는 대개 공동 묘지의 성격을 띠거나, 무연고자들의 묘가 집단으로 조성된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관청 관련 인물들의 묘역이 국가 소유로 관리됐을 수도 있다.
도화동이 조선 시대부터 한성부 외곽의 자연 취락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강 뱃길을 오가던 뱃사공, 상인, 관청 소속 역인들이 이 언덕에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는 기록된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땅 속에 조용히 증거를 남겨두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문화재 발굴조사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분묘지가 있었던 자리에는 유골, 부장품, 비석 파편, 지석(誌石) 등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신분, 생활, 신앙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다.

SECTION 06
6.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서 갖는 의미
6-1.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는 개발 공사에 앞서 해당 부지에 매장문화재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첫 번째 단계다. 현행 법령인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은 일정 면적 이상의 개발 사업에 대해 이 조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쉽게 말해, 삽 들기 전에 전문 기관이 먼저 땅의 역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기록은 바로 이 지표조사의 역사 기초 자료로 직접 활용된다. 어떤 지목이 있었는지, 어느 면적에 어떤 용도의 땅이 있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발굴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사전에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6-2. 4단계 발굴조사 프로세스
문화재 조사 4단계 절차
1단계 지표조사(地表調査) — 육안 및 문헌 조사를 통해 매장문화재 존재 여부를 확인
2단계 시굴조사(試掘調査) — 트렌치를 파서 지층 구조와 유물 존재 여부를 실제로 확인
3단계 표본조사(標本調査) — 시굴 결과를 바탕으로 더 넓은 범위를 조사해 규모를 파악
4단계 발굴조사(發掘調査) —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발굴을 통해 유물을 기록·수습
도화동의 경우, 대지 51,957㎡와 분묘지 20,119㎡가 특히 주목 대상이다. 분묘지로 기록된 구역에서는 시굴조사 단계에서 인골이나 부장품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고, 대지 구역에서는 건물 기단이나 생활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밭(전) 구역에서도 농업 관련 유물이나 구(溝) 형태의 유구가 확인될 수 있다.

6-3.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이런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실제 사례가 증명한다. 서울 동대문구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건설 과정에서는 조선 시대 훈련도감 터와 성벽 유구가 발굴되어 현재 공원 내에 보존·전시되고 있다. 당초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자리에서 역사가 솟아오른 것이다.
2021년 서울 인사동에서는 조선 전기 금속 활자 1,600여 점이 발굴됐다. 건물 신축 공사 전 진행된 표본조사에서 발견된 이 활자들은, 한국 금속 인쇄술의 역사를 새로 쓰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풍납토성(백제 왕성 추정지)은 서울 송파구 아파트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사례다. 삽 한 번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고, 삽 한 번이 역사를 영영 지울 수도 있다. 그래서 조사가 먼저다.
도화동의 1912년 기록도 마찬가지다. 이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미래의 개발 과정에서 역사 유물이 파괴되는 사고를 막을 수 있다.
SECTION 07
7. 자주 묻는 질문 (Q&A)
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2필지였습니다. 밭 5필지, 대지 4필지, 분묘지 3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174,090㎡였습니다. 약 축구장 24개 크기에 해당합니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전)은 5필지, 102,013㎡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58.6%로 가장 넓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4필지, 51,957㎡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약 29.8%에 해당합니다.
1912년 도화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분묘지는 3필지, 20,119㎡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11.6%이며, 이 시리즈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지목입니다.
이 자료가 문화재 발굴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1912년 토지 기록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의 역사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분묘지·대지 구역은 유물 발굴 가능성이 높아 특히 주목 대상입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국유지는 총 12필지 174,090㎡였으며, 밭 5필지(102,013㎡)·대지 4필지(51,957㎡)·분묘지 3필지(20,119㎡)로 구성되어 있었다. 밭이 전체의 58.6%를 차지한 농경 중심의 국유지 구성은, 오늘날 도화동이 고밀도 주거지역으로 바뀌기 전 이 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복숭아꽃 이름을 가진 마을이
한때 밭이었고, 무덤이었고, 누군가의 집터였다.
174,090㎡의 침묵은
지금도 그 땅 아래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은 오늘,
그 침묵은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자료 출처 및 분석 기준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분석 항목: 지목별 필지 수, 면적(㎡), 비율
분석 기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2026.1.11. 시행)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필요하신가요?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 분석부터 현장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가 함께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바로가기
#도화동국유지#1912년마포구#문화재발굴조사#문화재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기관#매장유산#서울문화유산#토지조사사업#마포구역사#도화동역사#seoulheritage#서울역사#분묘지#문화유산기초조사#매장문화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