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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휘경동 역사, 논 여덟 배미와 너른 밭 세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30일
9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휘경동 역사, 논 여덟 배미와 너른 밭 세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3국유지 필지

56,906㎡국유지 총면적

8논 필지 (61.5%)

6,168㎡밭 1필지 평균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

경동에는 국유지 13필지, 총 56,906㎡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8필지 26,462㎡, 밭 3필지 18,505㎡, 임야 2필지 11,937㎡였습니다.

국유지는 모두 경작지와 산지였고 대지는 한 필지도 없었으며,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4,377㎡에 이르는 큰 땅들이었습니다.

왕의 어머니가 잠들었던 산 아래, 나라 땅 13필지에 집은 단 한 채도 없었습니다.

회기역에서 한 정거장. 외대앞역으로 가는 길목.

새로 올라간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나지막한 산 하나가 보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한 바퀴씩 걷는 배봉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놀라실 겁니다.

한때 이 산자락에는 조선 왕실의 무덤이 두 번이나 들어섰습니다. 한 번은 사도세자. 또 한 번은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할아버지와 손자의 어머니. 한 집안의 두 사람이 같은 산을 거쳐 갔다는 사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무덤 이름이 오늘의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

1912년, 일제가 서울 땅을 한 필지씩 재던 해. 휘경동 국유지 장부에는 이상할 만큼 단출한 숫자가 적혔습니다. 13필지. 그런데 면적은 56,906㎡.

필지는 적은데 땅은 넓다. 집터는 하나도 없고 논과 밭과 숲뿐이다.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끝까지 읽으시면, 다음에 배봉산 둘레길을 걸을 때 발밑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목차

  1. 1912년 휘경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2. 휘경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 배봉산, 두 왕실 무덤이 거쳐 간 산

  4. 논 8필지 26,462㎡, 휘경동의 젖줄

  5. 밭은 3필지인데 왜 논보다 한 필지가 더 넓었을까요?

  6. 임야 2필지, 배봉산 자락의 숲

  7. 집터가 한 곳도 없는 국유지, 무엇을 뜻할까요?

  8. 한눈에 보는 휘경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9.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0. 땅의 이력을 알고 시작해 빛난 성공 사례

  11. 오늘의 휘경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011912년 휘경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답부터 드리겠습니다.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는 국유지가 13필지, 총 56,906㎡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7,214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여덟 개를 깔아 놓은 넓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비교 하나 해볼까요. 바로 옆 동네 회기동은 같은 해 국유지가 54필지, 42,707㎡였습니다.

휘경동은 필지 수로는 회기동의 4분의 1이 채 안 됩니다. 그런데 면적은 오히려 1.3배 넓습니다.

한 필지 평균을 내보면 차이가 더 선명해집니다. 회기동은 약 791㎡. 휘경동은 약 4,377㎡. 다섯 배가 넘습니다.

잘게 쪼개진 땅이 아니라, 큼직큼직하게 이어진 땅. 1912년 휘경동 국유지의 첫인상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성도 단순했습니다. 논 8필지, 밭 3필지, 임야 2필지. 단 세 가지 지목뿐이었습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휘경동 국유지는 13필지 56,906㎡였고, 논 8필지·밭 3필지·임야 2필지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02휘경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정조의 후궁,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

휘경동이라는 이름은 한 무덤에서 왔습니다. 조선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원소, 휘경원(徽慶園)입니다.

수빈 박씨는 정조 때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한 간택에서 뽑혀 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790년 창덕궁에서 원자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훗날 열한 살에 왕위에 오른 순조입니다.

오래 기다린 왕자의 탄생이었으니 궁중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수빈 박씨는 1822년, 순조 2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순조는 어머니의 무덤 자리를 고르고 골라, 이듬해 배봉산 아래에 원을 조성했습니다.

원은 떠나고, 이름은 남고

무덤 하나가 생기자 조용하던 산골 마을이 갑자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대를 휘경원, 혹은 휘경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휘경원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철종 때 몇 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1863년 무렵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진접 쪽으로 이장되었다고 전합니다.

무덤은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남았습니다. 묘하지 않나요? 지금 매일 이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한성부에서 고양군으로, 다시 서울로

행정구역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1911년 무렵에는 경성부 인창면 휘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가 되었습니다.

1936년 경성부로 다시 편입되며 휘경정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었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지금의 휘경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12년 토지조사 당시의 휘경동은 도성 밖 동쪽 교외, 아직 서울이라기보다 시골에 가까운 땅이었던 셈입니다.


03배봉산, 두 왕실 무덤이 거쳐 간 산

휘경동 이야기를 하면서 배봉산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배봉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작은 산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산이 조선 왕실의 큰 슬픔을 두 번이나 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세자입니다. 뒤주 속에서 생을 마친 사도세자의 무덤은 처음 이 배봉산 자락에 자리 잡았습니다. 영우원이라고 불렸지요.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성으로 옮겼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융릉입니다. 배봉산이라는 이름도 정조가 아버지 무덤을 향해 절을 올리던 봉우리라는 데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두 번째가 바로 수빈 박씨의 휘경원입니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이니, 사도세자에게는 며느리가 됩니다.

한 산에 시아버지가 머물다 떠나고, 수십 년 뒤 며느리가 들어왔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산은 그대로인데 무덤만 오고 갔습니다.

1912년 국유지 기록에 임야 2필지가 올라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이 숲이 배봉산과 어떤 관계였을지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04논 8필지 26,462㎡, 휘경동의 젖줄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논은 8필지, 26,462㎡였습니다.

필지로는 13필지 중 61.5%. 면적으로는 전체의 46.5%입니다. 휘경동 국유지의 절반 가까이가 논이었다는 뜻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3,308㎡, 1,000평이 넘습니다. 넓은 논배미 여덟 개가 이어진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중랑천이 만든 평지

휘경동은 동쪽으로 중랑천과 가깝습니다. 하천 가까이 낮고 평평한 땅이 펼쳐지고, 그 위로 물을 대기 좋은 논이 자리 잡는 풍경. 한양 동쪽 교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봄이면 물을 가득 채운 논에 하늘이 비쳤을 겁니다. 여름이면 짙은 초록이, 가을이면 누런 벼 이삭이 물결쳤겠지요.

지금 그 자리 어딘가에는 아파트 단지와 학교, 상가가 들어서 있습니다. 하지만 땅은 기억합니다. 오랜 세월 물과 흙이 차곡차곡 쌓인 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충적층은 그 아래 더 오래된 흔적을 덮어 지켜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넓은 논이 있던 자리는 조사하는 사람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땅입니다.

한 줄 정리: 휘경동 국유지 중 논은 8필지 26,462㎡로, 필지의 61.5%·면적의 46.5%를 차지한 가장 큰 지목이었습니다.


05밭은 3필지인데 왜 논보다 한 필지가 더 넓었을까요?

이번 휘경동 기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밭입니다.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밭은 3필지, 18,505㎡였습니다. 면적으로는 전체의 32.5%입니다.

그런데 한 필지 평균을 내면 약 6,168㎡가 나옵니다. 1,866평 남짓. 세 지목 가운데 가장 큽니다. 논 한 필지 평균의 거의 두 배입니다.

보통 서울 근교 마을의 밭은 집 옆 텃밭처럼 작게 쪼개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옆 회기동만 해도 국유 밭 한 필지 평균이 약 545㎡였지요. 휘경동 밭은 그보다 열 배 이상 큽니다.

큰 밭이 말해주는 것

밭이 이렇게 크다는 건, 집에 딸린 텃밭이 아니라 독립된 넓은 경작지였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밭은 논과 달리 물을 많이 대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완만한 경사지나 산기슭에 일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휘경동이라면 배봉산 아래 비탈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한 가지 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왕실 무덤이 떠난 뒤 남은 원 주변의 땅이 경작지로 바뀌어 국유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입니다.

물론 이것은 장부만으로 확정할 수 없는 추정입니다. 지번과 옛 지적도를 맞춰보는 작업이 뒤따라야 하죠. 하지만 이런 질문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기초조사의 진짜 역할입니다.


06임야 2필지, 배봉산 자락의 숲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임야는 2필지, 11,937㎡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21.0%, 한 필지 평균은 약 5,969㎡입니다. 회기동 국유 임야가 2필지 1,566㎡였던 것과 비교하면 일곱 배가 넘는 넓이입니다.

휘경동에서 국유 임야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역시 배봉산 자락입니다. 두 왕실 무덤이 차례로 머물렀던 산이니까요.

조선 시대 왕실 무덤 주변의 숲은 함부로 나무를 베거나 땅을 일구지 못하도록 엄하게 관리되었습니다. 무덤이 옮겨간 뒤에도 그 숲이 나라 땅으로 남았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이 역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자료는 국유지만을 다룹니다. 옛 원소 자리 전체가 어떤 소유와 지목으로 정리되었는지는 휘경동 전체 토지 기록을 함께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한 건 하나입니다. 무덤이 있던 산은 땅을 파지 않아도 이미 이야기가 많은 땅이라는 것. 원을 조성하며 다진 흙, 석물을 세운 자리, 제사를 지내던 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07집터가 한 곳도 없는 국유지, 무엇을 뜻할까요?

휘경동 국유지 13필지에는 대지가 한 필지도 없습니다.

바로 옆 회기동은 국유지 54필지 중 절반인 27필지가 대지였습니다. 같은 동대문구, 같은 해,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이렇게 다릅니다.

이 차이가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던 집터는 개인 소유로 정리되었고, 나라 땅으로 남은 것은 논과 밭과 숲뿐이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휘경동 국유지의 성격이 또렷해집니다.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생산과 보존의 공간. 먹을거리를 길러내던 땅과, 왕실의 기억을 지키던 숲.

문화유산 조사의 눈으로 보면, 이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흔적을 예고합니다. 경작지 아래 쌓인 오래된 층위, 그리고 산자락에 남았을지 모를 왕실 원소의 자취입니다.


08한눈에 보는 휘경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지금까지 살펴본 숫자를 표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필지 비율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논

8

26,462

61.5%

46.5%

3,308

밭

3

18,505

23.1%

32.5%

6,168

임야

2

11,937

15.4%

21.0%

5,969

합계

13

56,906

100%

100%

4,377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지목별 면적 합은 56,904㎡로 총계와 2㎡ 차이가 있습니다(검증 노트 참조).

지목별 면적 비율

논

46.5%

밭

32.5%

임야

21.0%

지목별 필지당 평균 면적

밭

6,168㎡

임야

5,969㎡

논

3,308㎡

이미지 설명: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를 정리한 표와 막대그래프로, 논 8필지 26,462㎡, 밭 3필지 18,505㎡, 임야 2필지 11,937㎡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 줄 정리: 휘경동 국유지는 면적으로는 논이 46.5%로 가장 컸지만, 한 필지 크기로는 밭이 약 6,168㎡로 가장 넓었습니다.


09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10년도 더 된 땅 장부가 지금 무슨 쓸모가 있지?"

당연히 드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부는 지금 서울에서 땅을 파기 전, 아주 실제적인 일을 합니다.

문화유산 조사의 네 단계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공사 전에 땅속 문화유산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 절차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핍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가장 먼저 쓰이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가능성이 보이는 지점에 작은 구덩이를 몇 곳 파서 땅속 층위를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길쭉한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성격을 가늠합니다.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적으로 파서 기록하고 보존 방안을 정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법이 정한 요건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수행합니다.

휘경동 기록에서 뽑아낸 조사 포인트

첫째, 배봉산 자락의 국유 임야 2필지입니다. 사도세자의 영우원과 수빈 박씨의 휘경원이 차례로 머문 산입니다. 원을 조성하며 다진 흔적이나 부속 시설의 자리가 남아 있을 수 있어, 지표조사 단계에서 꼼꼼한 문헌 검토와 현장 확인이 필요합니다.

둘째, 중랑천 쪽 평지의 논 8필지입니다. 오랫동안 물과 흙이 쌓인 저지대는 그 아래 더 이른 시기의 흔적을 덮고 있을 수 있습니다. 표본조사나 시굴조사로 층위를 확인할 가치가 있는 땅입니다.

셋째, 필지당 6,000㎡가 넘는 큰 밭 3필지입니다. 산기슭과 평지가 만나는 경계에 있었다면, 사람들이 오래 오가던 길목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1912년 장부 한 장은 어디를, 왜, 얼마나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가 됩니다. 조사 범위를 좁히고 공사 일정을 지키는 데에도 큰 힘이 되지요.


10땅의 이력을 알고 시작해 빛난 성공 사례

"그래서 정말 뭐가 나오긴 해요?"

네. 서울은 이미 여러 번 그 답을 보여주었습니다.

뉴타운 부지에서 조선 사람들의 삶이 쏟아지다, 은평 진관동

2000년대 은평뉴타운 사업 부지에서는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조선 시대 무덤과 생활 유적이 넓은 범위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도심 주변의 논밭과 산자락이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휘경동처럼 경작지와 임야가 대부분인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원 공사가 되살린 도성의 물길, 청계천 오간수문

청계천 복원 공사 때는 한양도성의 물길이 성벽을 지나던 오간수문 터가 확인되었습니다.

옛 기록과 지도를 바탕으로 위치를 짚고 조사한 덕분에, 이 흔적은 기록으로 남고 지금은 시민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두 사례가 말하는 건 하나입니다. 땅의 이력을 먼저 알고 접근하면, 유적은 공사의 걸림돌이 아니라 도시의 자산이 된다는 것. 휘경동의 1912년 기록도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1오늘의 휘경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오늘의 휘경동은 바쁜 동네입니다.

외대앞역과 회기역 사이로 학생들이 오가고, 새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가족들이 들어와 삽니다. 저녁이면 배봉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로 산자락이 북적입니다.

그 발밑에 논 여덟 배미가 있었습니다. 너른 밭 세 자락이 있었고, 산자락의 숲 두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숲 위로, 아들을 왕으로 길러낸 한 어머니가 잠시 머물다 떠났습니다. 남은 건 이름 하나. 휘경.

다음에 배봉산을 오르실 때, 잠깐 이 숫자를 떠올려 보세요. 13필지, 56,906㎡.

그건 그냥 면적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벼를 심고, 밭을 갈고, 숲을 지키던 사람들이 남긴 하루하루의 크기입니다.


검증 노트

  • 필지 수 검증: 논 8 + 임야 2 + 밭 3 = 13필지로, 제시된 총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 면적 검증: 26,462 + 11,937 + 18,505 = 56,904㎡로, 제시된 총면적 56,906㎡와 2㎡ 차이가 있습니다.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의 반올림 차이로 보이며, 본문은 원자료 총계 56,906㎡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 비율과 평균은 지목별 합계 56,904㎡ 기준으로 계산해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습니다. 총계 기준으로 계산해도 소수점 첫째 자리 값은 같습니다.

  • 원자료 2번 답변의 "동대문구휘경동" 띄어쓰기는 "동대문구 휘경동"으로 바로잡았습니다.

  • 관할 변천: 휘경동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 1911년 무렵 경성부 인창면,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 1936년 경성부 휘경정, 1946년 휘경동으로 바뀐 것으로 전합니다. 본 글은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 휘경원의 이장 시기와 경로는 자료에 따라 표현이 조금씩 달라, 본문에서는 철종 대에 옮겨져 1863년 무렵 남양주 진접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적었습니다. 배봉산 지명 유래는 전해지는 이야기로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휘경동은 동대문구 편에서 국유지에 대지가 한 필지도 없이 논·밭·임야 세 지목으로만 구성된 동네로 기록합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 약 4,377㎡는 이웃 회기동(약 791㎡)의 5.5배이며, 밭 1필지 평균 약 6,168㎡가 논 1필지 평균보다 큰, 이례적인 구성을 보입니다.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3필지, 면적은 56,906㎡였습니다.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휘경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휘경동 국유지에 대지는 있었나요?


휘경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국유지는 13필지 56,906㎡였으며, 논 8필지 26,462㎡, 밭 3필지 18,505㎡, 임야 2필지 11,937㎡로 구성된, 배봉산 휘경원 자리와 중랑천 평야의 흔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개발 예정지의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출발하는 기초조사가 첫걸음입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중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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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왕으로 길러낸 어머니가배봉산 아래 잠시 머물렀다

원은 떠나고석물도 떠나고이름만 남아 동네가 되었다

논 여덟 배미밭 세 자락숲 두 곳

오늘 둘레길을 걷는 너의 발끝에백 년 전 누군가 심은 벼의 뿌리가 있다

기억하는 것그것이 땅이 우리에게 바라는 전부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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