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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회기동 역사, 회묘가 지켜본 집터 스물일곱 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5시간 전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회기동 역사, 회묘가 지켜본 집터 스물일곱 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54국유지 필지

42,707㎡국유지 총면적

27대지 필지 (50%)

4,492㎡논 1필지 평균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는 국유지 54필지, 총 42,707㎡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대지 27필지 15,669㎡, 밭 22필지 11,993㎡, 논 3필지 13,477㎡, 임야 2필지 1,566㎡였습니다.

국유지 필지의 절반이 대지였으며, 논은 필지 수가 가장 적었지만 한 필지 평균 면적이 4,492㎡로 가장 넓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걷는 회기역 골목 아래, 집터 스물일곱 곳이 잠들어 있다면 믿을 수 있나요?

한 번쯤 지나쳤을 겁니다.

경희대로 가는 언덕길. 파전 냄새가 번지는 골목. 1호선과 경의중앙선이 엇갈리는 회기역.

그런데 이 동네 이름, 왜 하필 '회기'일까요?

답은 한 여인의 무덤에 있습니다. 왕의 어머니였지만 끝내 왕비로 남지 못한 사람. 그 무덤이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제가 서울의 땅을 한 필지씩 재고 적던 해. 회기동에서는 국유지 54필지가 장부에 올랐습니다.

숫자는 차갑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를 하나씩 풀어보면, 놀랍도록 따뜻한 마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회기역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조금은 달라질 겁니다.


목차

  1. 1912년 회기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2. 회기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 국유지의 절반이 대지였다고요? 집터 27필지 이야기

  4. 논은 3필지뿐인데 왜 그렇게 넓었을까요?

  5. 밭 22필지는 어떤 풍경이었을까요?

  6. 임야 2필지, 가장 작은 땅이 남긴 단서

  7. 한눈에 보는 회기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8.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9. 땅속 기록이 도시의 보물이 된 성공 사례

  10. 오늘의 회기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011912년 회기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는 국유지가 54필지, 총 42,707㎡ 있었습니다.

42,707㎡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시죠. 평으로 바꾸면 약 12,919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으로 치면 여섯 개 가까이 되는 넓이예요.

동네 하나에 나라 땅이 축구장 여섯 개만큼.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닙니다.

더 흥미로운 건 구성입니다. 이 54필지는 대지, 밭, 논, 임야라는 네 가지 지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대지가 27필지로 가장 많았습니다. 밭이 22필지로 뒤를 이었고요. 논은 3필지, 임야는 2필지에 불과했습니다.

필지 수만 보면 대지와 밭이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논 단 3필지가 13,477㎡로, 밭 22필지를 합친 것보다 넓었거든요.

숫자 하나하나가 마을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회기동 국유지는 54필지 42,707㎡였고, 대지 27필지·밭 22필지·논 3필지·임야 2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02회기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왕의 어머니, 그러나 왕비가 아니었던 사람

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윤씨. 그녀는 연산군을 낳은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궁중 갈등 끝에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1482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는 그녀를 '폐비 윤씨'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 무덤을 정성껏 다시 꾸몄습니다. 바로 오늘의 회기동 자리였습니다.

한때 이 무덤은 왕릉의 격을 받아 '회릉(懷陵)'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다시 '회묘(懷墓)'로 낮아졌습니다.

'묘'가 '기'로 바뀐 사연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회묘가 있는 동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에 무덤 '묘(墓)' 자가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겠죠. 그래서 음이 비슷하면서 뜻이 무난한 '기(基)' 자로 바꿔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회기(回基)'가 탄생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묘한 일입니다. 매일 수만 명이 오가는 역 이름 속에, 오백 년 넘은 한 어머니의 사연이 숨어 있으니까요.

회묘는 1960년대 후반 경희학원이 이 일대에 자리 잡으면서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옮겨졌습니다. 무덤은 떠났지만 이름은 남았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 당시에는 무덤이 아직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국유지 기록은, 회묘가 마을을 내려다보던 시절의 마지막 풍경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03국유지의 절반이 대지였다고요? 집터 27필지 이야기

회기동 국유지 54필지 가운데 27필지가 대지였습니다. 정확히 절반입니다.

면적은 15,669㎡. 전체 국유지의 약 36.7%로, 네 가지 지목 중 가장 넓었습니다.

한 필지 평균 약 175평의 집터

27필지를 평균 내면 한 필지당 약 580㎡가 나옵니다. 평으로는 175평 남짓입니다.

요즘 감각으로는 꽤 넉넉하죠. 하지만 당시 시골 살림집은 안채와 마당, 텃밭, 헛간을 한 울타리에 품었습니다. 이 정도 크기는 소박한 초가 한 채가 자리 잡기에 알맞은 규모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상해 보세요. 나라 소유의 집터가 스물일곱 곳이나 모여 있던 동네. 그곳에 누가 살았을까요?

무덤을 지키던 마을이었을까

조선 시대 왕실 무덤 곁에는 그 무덤을 돌보는 사람들이 모여 살곤 했습니다. 제사를 준비하고, 풀을 베고, 나무를 지키는 일을 맡았지요.

회기동의 대지 27필지가 모두 그런 사람들의 집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장부는 소유와 지목을 적을 뿐, 거기 살던 사람의 직업까지 말해주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국유 대지가 이렇게 촘촘히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 마을은 회묘와 어떤 관계였을까. 그 답은 문헌과 땅속 흔적을 함께 살펴야 풀릴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오래 산 땅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집 기둥을 세운 구멍, 부엌 아궁이, 깨진 그릇 조각 같은 것들이요. 바로 이 점이 뒤에서 이야기할 문화재 조사와 이어집니다.



04논은 3필지뿐인데 왜 그렇게 넓었을까요?

이번 기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숫자를 꼽으라면 저는 논을 고르겠습니다.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논은 단 3필지였습니다. 그런데 면적은 13,477㎡.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31.6%를 차지합니다.

필지 수로는 5.6%에 불과한데, 면적으로는 3분의 1 가까이 됩니다. 계산해 보면 논 한 필지 평균이 약 4,492㎡, 1,360평이 넘습니다.

대지 한 필지의 거의 여덟 배. 같은 동네 안에서 이 정도 차이는 흔하지 않습니다.

큰 논배미가 말해주는 땅의 성격

논이 넓게 이어졌다는 건 물을 대기 좋은 낮고 평평한 땅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회기동은 동쪽으로 중랑천 유역과 가깝습니다. 하천 가까운 평지에 큰 논배미가 펼쳐지고, 언덕 쪽으로 집과 밭이 올라가는 풍경. 조선 후기 한양 동쪽 교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입니다.

물론 1912년 장부만으로 논 3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번과 옛 지적도를 대조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하죠.

그래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넓은 논이 있던 자리는 오랜 세월 물과 흙이 쌓인 땅입니다. 이런 충적층은 과거의 흔적을 잘 덮어 보존해 주기도 합니다. 조사하는 사람 입장에선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05밭 22필지는 어떤 풍경이었을까요?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밭은 22필지, 11,993㎡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약 40.7%, 면적으로는 약 28.1%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545㎡로, 대지와 거의 비슷한 크기입니다.

이 점이 재미있습니다. 밭과 대지의 필지 크기가 닮았다는 건, 둘이 서로 붙어 있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거든요.

집 바로 옆 텃밭. 울타리 너머 고추와 배추가 자라던 작은 밭들. 서울 근교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한양 동쪽 교외는 도성 사람들에게 채소를 대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침이면 지게에 푸성귀를 지고 도성 쪽으로 걸어가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밭은 논보다 지형을 덜 가립니다. 완만한 경사지에도 일굴 수 있죠. 그래서 밭이 많은 땅은 언덕과 평지가 만나는 경계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살기 좋아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06임야 2필지, 가장 작은 땅이 남긴 단서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임야는 2필지, 1,566㎡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3.7%. 네 가지 지목 중 가장 작습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783㎡입니다.

왕실 무덤이 있던 동네인데 국유 임야가 이렇게 적다니, 의외라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습니다. 이번 자료는 '국유지'만 다룹니다. 무덤 자체나 그 주변 숲이 다른 소유나 다른 지목으로 정리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이 작은 숫자는 결론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회묘 주변의 숲은 1912년 장부에 어떤 이름으로 올라갔을까. 이 물음은 회기동 전체 토지 기록을 함께 볼 때 풀릴 것입니다.

기초조사란 원래 이런 겁니다. 답을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더 들여다봐야 하는지 목록을 만드는 일이죠.


07한눈에 보는 회기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표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필지 비율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대지

27

15,669

50.0%

36.7%

580

논

3

13,477

5.6%

31.6%

4,492

밭

22

11,993

40.7%

28.1%

545

임야

2

1,566

3.7%

3.7%

783

합계

54

42,707

100%

100%

791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지목별 면적 합은 42,705㎡로 총계와 2㎡ 차이가 있습니다(검증 노트 참조).

지목별 면적 비율

대지

36.7%

논

31.6%

밭

28.1%

임야

3.7%

지목별 필지 비율

대지

50.0%

밭

40.7%

논

5.6%

임야

3.7%

이미지 설명: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지목별 통계를 정리한 표와 막대그래프로, 대지 27필지 15,669㎡, 밭 22필지 11,993㎡, 논 3필지 13,477㎡, 임야 2필지 1,566㎡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 줄 정리: 회기동 국유지는 필지로는 대지와 밭이 90%를 넘었지만, 면적으로는 단 3필지의 논이 31.6%를 차지했습니다.


08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00년 전 땅 장부가 지금 무슨 소용이지?"

충분히 드실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장부는 오늘날 서울에서 공사를 시작하기 전, 아주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문화유산 조사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을 하려면 땅속에 문화유산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그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피는 단계죠.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가장 먼저 쓰이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유적 가능성이 있는 곳에 작은 구덩이를 몇 군데 파서 땅속 층위를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일정 간격으로 긴 도랑 모양의 구덩이를 파서 유적의 범위와 성격을 가늠합니다.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적으로 파서 기록하고, 보존 여부를 판단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법이 정한 자격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아 진행합니다.

회기동 기록에서 읽어낼 수 있는 조사 포인트

첫째, 대지 27필지가 모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오래 살았던 땅은 생활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대지들의 위치를 오늘의 지번과 맞춰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둘째, 조선 왕실 무덤인 회묘가 이 일대에 수백 년간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덤은 옮겨졌어도 묘역을 꾸미던 흔적, 제사 공간, 주변 시설의 자리가 땅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 넓은 논 3필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랜 세월 흙이 쌓인 저지대는 그 아래 더 이른 시기의 흔적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표본조사나 시굴조사로 층위를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1912년 장부 한 장은 "어디를, 왜, 얼마나 조심해서 봐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지도가 됩니다. 조사 비용과 공사 일정을 지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요.



09땅속 기록이 도시의 보물이 된 성공 사례

"그래서 실제로 뭐가 나오긴 하나요?"

네. 서울에서는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습니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가 깨어나다, 풍납토성

송파구 풍납동은 오랫동안 평범한 주거지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 시대 유물이 대량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이어진 조사로 풍납토성은 한성 백제의 왕성으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 미리 살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모두에게 각인시킨 사건이었죠.

빌딩 지하에 조선의 골목을 남기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종로 공평동에서는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건물터와 골목이 층층이 드러났습니다.

이 유적은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새 건물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시민이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되었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입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땅의 이력을 알고 접근했을 때, 유적은 공사의 걸림돌이 아니라 도시의 자랑이 된다는 것. 회기동의 1912년 기록도 언젠가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0오늘의 회기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오늘의 회기동은 젊은 동네입니다.

강의를 마친 대학생들이 골목으로 쏟아지고, 비 오는 날이면 파전집마다 자리가 찹니다. 회기역 플랫폼은 하루 종일 사람으로 붐빕니다.

그 발밑에 집터 스물일곱 곳, 밭 스물두 곳, 논 세 배미, 작은 숲 두 자락이 겹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 위로, 한 어머니의 무덤이 오백 년 가까이 조용히 앉아 있었지요.

다음에 회기역 계단을 오르실 때, 잠깐 이 숫자를 떠올려 보세요. 54필지, 42,707㎡.

그건 단순한 면적이 아닙니다. 이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삶의 크기입니다.



검증 노트

  • 필지 수 검증: 논 3 + 대지 27 + 임야 2 + 밭 22 = 54필지로, 제시된 총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 면적 검증: 13,477 + 15,669 + 1,566 + 11,993 = 42,705㎡로, 제시된 총면적 42,707㎡와 2㎡ 차이가 있습니다.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의 반올림 차이로 보이며, 본문은 원자료 총계 42,707㎡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 비율은 소수점 첫째 자리 반올림 값이라 합계가 100.1% 등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 원자료 2번 답변의 "동대문구회기동" 띄어쓰기는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바로잡았습니다.

  • 회묘의 서삼릉 이장 시기는 자료에 따라 1967년 또는 1969년으로 달리 적혀 있어 본문에서는 1960년대 후반으로 표기했습니다.

  • 회기동 일대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했다가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었습니다. 본 글은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회기동은 동대문구 편에서 국유지 중 대지 필지 비율이 정확히 50.0%로 나타난 동네입니다. 또한 논 1필지 평균 면적 4,492㎡는 같은 동네 대지 평균의 약 7.7배로, 필지 수와 면적의 비중이 크게 엇갈리는 사례로 기록합니다.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54필지, 면적은 42,707㎡였습니다.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회기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회기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국유지는 54필지 42,707㎡였으며, 대지 27필지 15,669㎡, 논 3필지 13,477㎡, 밭 22필지 11,993㎡, 임야 2필지 1,566㎡로 구성된, 회묘 곁 마을의 생활 흔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개발 예정지의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출발하는 기초조사가 첫걸음입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중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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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그리던 아들이무덤 하나를 이 언덕에 앉혔다

묘(墓)는 기(基)가 되고무덤은 떠나고이름만 남아 역을 이루었다

집터 스물일곱밭 스물둘논 세 배미, 숲 두 자락

오늘 회기역 계단을 오르는 너의 발끝에백 년 전 누군가의 마당이 있다

잊지 않는 것그것이 땅이 우리에게 바라는 전부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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