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광진구 3,195필지 9,901,674㎡국유지 35.3%, 창덕궁 30필지, 고구려 보루의 땅
- 6월 1일
- 7분 분량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광진구 전역 ·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
1912년 광진구 3,195필지 9,901,674㎡국유지 35.3%, 창덕궁 30필지, 고구려 보루의 땅
아차산에 고구려 군사들이 진을 치고, 한강변에서 조선 왕실이 말을 키우던 땅. 1912년 이 땅의 35.3%가 국유지였고, 창덕궁이 30필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다. 순명황후의 무덤이 있던 능동(陵洞)도 이 땅 위에 있었다.
3,195총 필지
1,129국유지(35.3%)
30창덕궁 소유 필지
2,390,506잡종지 면적(㎡)
18고구려 보루 수
광진구 잡종지 22필지의 면적이 2,390,506㎡라는 숫자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가.
잡종지 22필지. 필지 수는 적다. 그런데 면적이 무려 2,390,506㎡다. 밭 1,743필지의 면적(3,756,740㎡)의 63.6%에 해당하는 넓이가 고작 22필지에 압축되어 있다. 1필지 평균 108,659㎡. 이건 보통 잡종지가 아니다.
이 숫자의 정체는 조선 왕실의 역사에 있다. 광진구는 조선시대 왕실 직속 말 목장인 낙천정 목장이 있던 곳이다. 아차산 자락부터 한강변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왕실 목장 부지가 1912년에는 잡종지로 분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목장 땅을 관리하던 창덕궁이 1912년에도 30필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다 전체 필지의 35.3%인 1,129필지가 국유지다. 이것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높은 국유지 비율이다(성동구 27.7% 다음). 왕실 목장, 창덕궁 소유지, 대규모 국유지.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1912년 광진구는 조선 왕실이 가장 오래, 가장 넓게 직접 지배한 땅이었다.
목차
11912년 광진구 토지 통계 총괄
2잡종지 22필지 2,390,506㎡의 정체
3창덕궁 30필지 — 이 시리즈 최대 왕실 소유지
4국유지 1,129필지 35.3% — 왕실의 땅이 국유지가 된 경위
5능동(陵洞)의 비밀 — 순명황후와 사라진 왕릉
6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 1,500년 전의 군사 유적
7성씨 4종과 광진구 조선 마을 사람들
8소유자 구조 — 동척·일본인·마을공유지
9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10성공 사례와 감동으로 닫는 이야기

1
1912년 광진구 토지 통계 총괄 — 숫자 안에 숨은 왕실의 흔적
1912년 광진구의 토지 현황이다. 3,195필지 9,901,674㎡. 필지 수 대비 면적이 크다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다. 1필지 평균 면적이 약 3,099㎡로 이 시리즈 다른 구들보다 훨씬 크다. 이것은 광진구의 땅이 잘게 나뉘지 않은 대규모 필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1,129국유지 필지
전체의 35.3%
30창덕궁 소유 필지
이 시리즈 최대
2.4M잡종지 면적(㎡)
22필지에 집중
1,743필지밭
1,129필지국유지(35.3%)
728필지논
571필지대지
136필지동양척식(주)
93필지임야
36필지분묘지
30필지창덕궁 소유
22필지잡종지(대면적)
13필지일본인
9필지마을 공유지
1필지사사지·지소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율 | 비율 시각화 |
밭(田) | 1,743 | 3,756,740 | 37.9% | |
잡종지 | 22 | 2,390,506 | 24.1% | |
논(畓) | 728 | 2,136,293 | 21.6% | |
임야(林野) | 93 | 1,177,585 | 11.9% | |
대지(垈) | 571 | 345,938 | 3.5% | |
분묘지 | 36 | 90,807 | 0.92% | |
사사지(寺社地) | 1 | 2,684 | 0.027% | |
지소(池沼) | 1 | 1,117 | 0.011% | |
합계 | 3,195 | 9,901,670 | ≈100% |
면적 비율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잡종지다. 고작 22필지인데 전체 면적의 24.1%를 차지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광대한 단일 필지들이 잡종지로 분류되었음을 뜻한다. 왕실 목장,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 또는 대규모 왕실 원유(苑囿) 중 어느 것이 이 잡종지에 포함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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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잡종지 22필지 2,390,506㎡의 정체 — 왕실 목장의 마지막 기록

광진구 공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 이 지역에는 왕실 직속 말 목장과 낙천정(樂天亭), 화양정(華陽亭) 같은 왕실 정자가 있었다. 낙천정은 세종 때 건립된 정자로 왕이 이곳에 나와 사냥과 격구를 즐기고 군사를 열병했다. 이 일대의 광활한 구릉지는 조선 초기부터 왕실 직속으로 관리됐다.
1912년 잡종지 22필지 2,390,506㎡의 상당수가 바로 이 낙천정 일대 왕실 목장 부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목장은 토지조사사업에서 경작 목적이 불분명한 광대한 국유 토지로 인식되어 잡종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잡종지라는 분류 자체가 이 땅의 특별한 성격을 오히려 가리고 있는 셈이다.
잡종지 22필지의 고고학적 잠재력은 대단하다. 조선 왕실 목장 지역에서는 말 관련 시설 유구(마구간 터, 마비석), 격구장 유구, 왕실 연회 관련 기와 건물지가 발굴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목장 운영을 위한 수리시설(수로, 연못)의 흔적이다. 지소(池沼) 1필지 1,117㎡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낙천정 일대 잡종지와 지소 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시굴조사의 최우선 대상이 된다.
3
창덕궁 30필지 — 이 시리즈 최대 왕실 직접 소유지
창덕궁 소유 30필지. 앞서 서대문구 4필지, 성동구와 마포구 등에는 창덕궁 소유 기록이 없었다. 광진구의 30필지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창덕궁 직접 소유 토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선 왕실 직접 소유 — 이 시리즈 최대
30창덕궁 소유 필지
1912년 광진구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된 이래, 조선 역대 왕들이 약 270여 년간 실질적 법궁으로 사용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이 망한 뒤에도 창덕궁은 '이왕가(李王家)'의 명의로 일부 토지를 보유했다. 광진구의 30필지는 그 마지막 흔적이다.
창덕궁 30필지의 위치가 특히 중요하다. 광진구 능동(陵洞) 일대가 창덕궁 소유지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능동이라는 지명은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첫 번째 왕비 순명황후(純明皇后)의 무덤인 유강원(裕康園)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지금의 건국대학교 캠퍼스 주변이 바로 이 왕릉 터다. 왕비의 무덤 주변 부지가 창덕궁 소유 30필지의 일부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4
능동(陵洞)의 비밀 — 순명황후와 사라진 왕릉
광진구 능동(陵洞). 이름에 '능(陵)'이 들어간 이유가 있다.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가 1904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명으로 그 무덤이 이 일대에 조성됐다. 지명 능동은 바로 이 왕릉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능동에 가보면 왕릉이 없다. 순명황후의 무덤은 1926년 경기도 양주 금곡으로 이장됐기 때문이다. 순종이 승하한 뒤 그 무덤(유릉) 옆으로 순명황후의 유강원도 옮겨진 것이다. 무덤은 사라졌지만 능동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필자가 소속돼 있는 건국대학교의 지번은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번지이다. 이 일대를 능동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이곳에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첫 번째 왕비인 순명황후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서울시 문화본부 미디어허브, '능동에 왕릉이 없는 이유'
1912년 창덕궁 소유 30필지는 이 능동 일대의 왕릉 부지와 주변 능역 토지를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릉은 1926년 이장됐지만, 능역 조성 과정에서 형성된 지하 유구와 경계 석물 일부는 여전히 이 땅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광진구 창덕궁 소유 30필지 구역의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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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 1,500년 전의 군사 유적이 임야 93필지 안에

임야 93필지 1,177,585㎡. 광진구 임야는 다른 구들과 다른 차원의 역사를 품고 있다. 아차산이 있기 때문이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峨嵯山 一帶 堡壘群)은 2004년 국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된 서울의 대표적 고구려 유적이다. 아차산 1~6보루, 용마산 1~7보루, 홍련봉 1·2보루, 시루봉보루 등 18개의 보루로 구성된 이 군사 시설망은 5~6세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축성됐다.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 군사 시스템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보루 안에서 관청용 기와(와당)가 발견될 만큼 체계화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 보루에서 쏟아진 유물들
아차산 고구려 보루 발굴에서는 철제 무기(화살촉, 도끼), 농기구(낫, 쟁기), 토기(고구려식 단경호·장군형 호), 연화문 와당이 쏟아졌다. 특히 홍련봉 2보루에서는 관청에만 사용되는 특수 와당이 확인되어 이곳이 고구려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음이 입증됐다. 1912년 광진구 임야 93필지 구역은 이 고구려 보루들의 능선 사면부와 겹치는 지역이 있어, 임야 지표조사에서 보루 관련 유구와 유물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차산의 전략적 가치가 시대를 초월한다는 점이다. 고구려 군사들이 진을 친 바로 그 능선에, 수천 년 후 한국군도 참호를 건설했다. 유적이 있는 줄 모르고 만든 군사 시설이 우연히 고구려 보루 위에 겹쳤던 것이다. 고대와 현대의 군사 전략이 같은 지점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아차산 일대 임야 93필지 전체가 여전히 전략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땅임을 보여준다.
6
성씨 4종과 광나루 마을 사람들의 이름
1912년 광진구는 성씨 다양성이 낮다. 김씨, 이씨, 박씨, 최씨 4종만이 기록에 남을 만큼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광진구가 넓은 국유지와 왕실 소유지 사이에서 조선인 민간 취락이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음을 반영한다.
김씨392필지1위
이씨369필지2위
박씨148필지3위
최씨111필지4위
김씨 392필지와 이씨 369필지의 차이가 23필지에 불과하다. 두 성씨가 나란히 광진구 민간 토지의 대부분을 점유했다. 이들 가문이 집중된 마을은 광나루(廣津)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광나루는 광진구의 지명 유래가 된 나루터로, 서울과 경기 동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였다. 광나루 주변의 취락에 김씨와 이씨 가문이 집거하며 나루터 운영과 농업을 함께 영위했을 것이다.
마을 공유지 9필지도 주목해야 한다. 마을 공유지 9필지는 광나루 취락의 공동 시설(우물, 마을 제당, 공동 경작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9필지의 위치를 파악하면 1912년 광진구 취락의 중심지를 추정하는 데 핵심 자료가 된다.
7
소유자 구조 — 국유지 압도, 동척·일본인의 진입
조선인(성씨)
약 1,870필지 (58.5%)
58.5%
국유지
1,129필지 (35.3%)
35.3%
동양척식(주)
136필지 (4.3%)
4.3%
창덕궁
30필지
30필지
마을 공유지
9필지
법인
8필지
일본인
13필지
이 구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유지 35.3%와 동척 4.3%의 관계다. 동척 136필지는 전체 대비 4.3%지만, 조선인 민간 소유지만 놓고 보면 그 비율은 더 올라간다. 광진구의 국유지 대부분이 왕실 목장과 능역 부지였다면, 동척은 농업 생산이 가능한 민간 경작지를 집중 취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논 728필지와 밭 1,743필지 중 동척이 차지한 136필지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토지조사 분석의 중요한 과제다.
일본인 소유 13필지는 이 시리즈 다른 구들(영등포 298필지, 마포 105필지, 서대문 140필지)과 비교해 현저히 적다. 이것은 광진구가 1912년 시점에서 일본인의 진입이 아직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대규모 국유지와 창덕궁 소유지가 민간 매매를 차단하는 장벽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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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묘지 36필지·사사지 1필지 — 광나루 사람들의 신앙과 죽음
분묘지 36필지 90,807㎡. 1필지 평균 2,523㎡로 중간 규모의 묘역들이다. 광진구의 분묘지는 한강변 취락 사람들의 선산과 아차산 산기슭에 형성된 사족 묘역으로 나뉠 가능성이 있다. 한강변 분묘지에서는 조선 후기 나루터 상인 계층의 유물이, 아차산 사면 분묘지에서는 광진구 인근 사대부 가문의 분청사기·백자 부장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사사지 1필지 2,684㎡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적은 수다(영등포·마포 5~6필지, 성동구·서대문구 8필지). 광진구의 사찰이나 신앙 시설이 극히 적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 1필지라도 그 위치가 아차산 사면이나 능동 일대와 겹친다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능역 인근의 원찰(願刹, 왕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9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조사 단계 | 광진구 핵심 적용 지점 | 기대 성과 |
문화재 지표조사 | 창덕궁 30필지·능동 능역 부지 현황·잡종지 22필지 낙천정 목장 연관성·임야 93필지 아차산 보루 능선 분포 | 조사 우선 구역 선정 |
시굴조사 | 능동 왕릉 이장 전 조성 유구 확인·잡종지 대형 필지 내 목장 관련 석축 트렌치·분묘지 36필지 묘제 형식 파악 | 유구 성격·층위 확인 |
표본조사 | 고구려 보루 인근 임야 완충 구역 발굴·왕실 목장 경계 표석 및 마구간 유구·마을 공유지 9필지 취락 중심부 확인 | 유적 범위·성격 파악 |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기록·국가유산청 보고·아차산 고구려 역사관 연계 전시 | 역사 복원 완성 |
10
성공 사례 — 광진구의 발굴이 한국 고고학을 바꾼 순간들
광진구는 한국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성과를 낸 지역 중 하나다.
성공 사례 01
아차산 4보루 발굴 — 남한에 고구려가 있었음을 증명하다
1990년대 이전까지 고구려 유적은 남한에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토기, 철제 무기, 와당이 쏟아졌다. 이 발굴을 계기로 경기도 양주, 임진강 일대, 대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추가로 확인됐다. 1912년 임야 93필지 구역에 포함된 아차산 일대의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모든 발견의 출발점이었다.
성공 사례 02
홍련봉 보루 발굴 — 관청용 와당으로 밝혀진 고구려 행정 중심
광진구 홍련봉 1·2보루 발굴에서 관청에만 사용하는 특수 와당이 발견됐다. 이것은 이 보루가 단순한 군사 초소가 아니라 고구려 한강 유역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한다. 홍련봉 2보루 전체를 덮는 유적전시관 건립이 추진 중이며, 이 발굴 성과가 관람객들에게 고구려의 살아있는 역사를 전달할 것이다.
성공 사례 03
아차산성 남벽 발굴 — 연화문와당과 의례 흔적의 발견
광진구가 한국고고환경연구소에 의뢰한 아차산성 1·2차 발굴조사에서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발굴했다. 성벽 내벽 하층에서 홍련봉 1보루 출토 와당과 동일한 연화문와당이 발견됐고, 성벽 보강 의례와 관련된 동물 뼈 매납도 확인됐다. 1912년 임야 93필지 구역에 포함된 아차산성 주변의 체계적 지표조사가 이 발굴 성과를 만들어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고구려 보루, 순명황후 능역, 왕실 목장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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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 분석부터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까지. 서울 25개 구 매장문화재 조사 전문 기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아차산 능선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한강을 내려보던 그 자리에,
1912년엔 국유지 1,129필지가 펼쳐져 있었고,
창덕궁이 30필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순명황후의 무덤이 있던 능동의 흙 아래엔
왕조의 마지막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삽이 그 흙을 열면,
1,500년의 고구려와 500년의 조선이
동시에 눈앞에 살아난다.
— 광진구 3,195필지, 두 왕조의 기억을 위해
아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지금도 그 전략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고구려 군사가 느꼈을 그 감각, 조선 왕이 낙천정에서 바라봤을 그 풍경. 그 모든 것이 지금 광진구의 땅 아래에 층층이 쌓여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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