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논·밭·대지·잡종지 면적 완전 정리
최종 수정일: 7월 6일
📜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
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논·밭·대지·잡종지 면적 완전 정리
문화유산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토지 기초자료 분석
36필지
총 국유지 필지 수
76,321㎡
총 면적
61.9%
논 비율
4종
지목 유형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는 국유지 36필지, 총 76,321㎡가 존재했습니다.
이 가운데 논은 14필지 47,236㎡(61.9%)로 가장 넓었고, 밭은 17필지 19,917㎡(26.1%), 대지 4필지 5,775㎡(7.6%), 잡종지 1필지 3,391㎡(4.4%)였습니다.
즉 내발산동 국유지의 88%가 농경지(논+밭)였으며, 이 기록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 목차
100년 전, 내발산동 땅 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전체 현황 — 숫자로 본 진실
논 14필지 47,236㎡ — 이 땅은 누가 갈았을까
밭 17필지 19,917㎡ — 필지 수는 많아도 면적은 왜 작았나
대지와 잡종지 — 국가 시설의 흔적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
발굴 성공 사례 — 땅 아래 역사가 살아있다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어떻게 진행되나
자주 묻는 질문 (Q&A)
한 줄 결론 및 자료 출처
1
100년 전, 내발산동 땅 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당신이 발산역 1번 출구를 나서는 순간, 발 아래 땅은 100년 전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아파트 단지와 카페 거리로 가득한 내발산동의 현재 모습은, 1912년의 기록과 나란히 놓아보는 순간 낯설게 느껴진다. 그 시절 이곳에는 논물이 하늘을 비추었고, 밭이랑 사이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흙을 두드렸다. 국가가 소유한 땅, 즉 국유지가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이었다.

1912년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시기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권을 기재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토지대장이다. 이 기록은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다. 한 마을이 어떤 땅으로 이루어졌는지, 그 땅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11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역사의 지문(指紋)이다.
내발산동(內鉢山洞)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야기다. 수명산의 모습이 밥주발을 엎어놓은 것 같다 하여 발산(鉢山)이라 불렸고, 그 산의 안쪽 마을이 내발산동이었다. 수명 장수를 빌던 산 아래, 사람들은 대대로 논을 갈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1912년의 기록은 바로 그 삶의 흔적을 숫자로 담아놓았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스마트폰 지도 앱이 보여주는 내발산동의 지번들 아래에는 그때 그 논물이, 그때 그 밭이랑이, 그리고 국가가 관리하던 땅의 기억이 아직도 잠들어 있다.
2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전체 현황 — 숫자로 본 진실
1912년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에는 총 36필지, 76,321㎡의 국유지가 존재했다. 이를 지목별로 나누면 논·밭·대지·잡종지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각 지목이 가진 면적과 필지 수를 보면, 이 마을의 토지 이용 패턴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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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36㎡
논 (14필지)
전체의 61.9%
🌿
19,917㎡
밭 (17필지)
전체의 26.1%
🏛️
5,775㎡
대지 (4필지)
전체의 7.6%
⬜
3,391㎡
잡종지 (1필지)
전체의 4.4%
지목 | 필지 수 | 면적 (㎡) | 비율 (%) | 비고 |
논 (田) | 14필지 | 47,236㎡ | 61.9% | 면적 최대 지목 |
밭 (畓) | 17필지 | 19,917㎡ | 26.1% | 필지 수 최대 |
대지 (垈地) | 4필지 | 5,775㎡ | 7.6% | 국가 시설 추정 |
잡종지 | 1필지 | 3,391㎡ | 4.4% | 복합 용도 |
합계 | 36필지 | 76,321㎡ | 100% |
논
47,236㎡
61.9%
밭
19,917㎡
26.1%
대지
5,775㎡
7.6%
잡종지
3,391㎡
4.4%
이 숫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1912년 내발산동의 국유지 성격이 선명하게 읽힌다. 전체 면적의 88%에 달하는 67,153㎡가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농경지였다. 이는 당시 내발산동이 전형적인 농업 중심 마을이었음을 방증한다. 국가가 소유한 땅의 절반 이상이 벼를 심는 논이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물 관리 기반이 그만큼 탄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논 14필지 47,236㎡ — 이 땅은 누가 갈았을까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단연 논이다. 14필지에 달하는 논의 총면적은 47,236㎡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무려 61.9%를 차지했다. 면적으로 환산하면 축구장 약 6.6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규모다.
흥미로운 점은 필지당 평균 면적이다. 14필지로 47,236㎡를 나누면 필지당 평균 약 3,374㎡에 달한다. 이는 상당히 넓은 단위의 논이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작은 논배미 여러 개가 아니라, 대규모 경작지가 국가 소유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 논에서 누가 경작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지만, 국가 소유의 토지를 소작으로 경작하던 농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논은 14필지 47,236㎡로, 전체 국유지의 61.9%를 차지하며 단일 지목 중 가장 넓었습니다.
수명산 아래 펼쳐진 논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공간이었고, 계절마다 반복되는 모내기와 추수의 리듬이 마을의 시간을 결정짓는 심장이었다. 그 논이 국가의 땅이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 이래로 국가와 깊이 연결된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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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17필지 19,917㎡ — 필지 수는 많아도 면적은 왜 작았나
논에 이어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지목은 밭이다. 필지 수로만 보면 밭이 17필지로 논(14필지)보다 오히려 많다. 그런데 면적을 비교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힌다. 밭의 총면적은 19,917㎡로, 논(47,23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필지 수는 더 많은데 면적은 훨씬 적다는 것은, 밭 각각의 크기가 논에 비해 상당히 작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밭의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1,172㎡로 논(3,374㎡)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 패턴은 농업 지리학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논은 물 공급이 안정적인 평지나 하천 인근에 대규모로 조성되는 반면, 밭은 지형에 따라 크고 작은 필지가 산재하는 경향이 있다. 내발산동의 경우도 수명산 아래 평지에는 넓은 논이, 경사가 있는 지역에는 작은 밭이 여럿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밭에서는 논보다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었을 것이다. 조, 콩, 팥, 참깨, 면화 등 다양한 밭작물이 이 17필지의 땅에서 자라났을 테고, 그것이 마을 사람들의 식탁을 채웠을 것이다. 작은 필지들이 모여 이루는 밭의 풍경은, 큰 들판의 논과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진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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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잡종지 — 국가 시설의 흔적
국유지 가운데 농경지가 아닌 토지도 존재했다. 대지 4필지 5,775㎡와 잡종지 1필지 3,391㎡가 그것이다. 합산하면 9,166㎡로, 전체 국유지의 12%에 해당한다.
대지는 건물이 들어선 토지를 의미한다. 국유지로 등록된 대지라면 관청이나 창고, 군사 시설, 교통 관련 시설 같은 국가 기능의 건축물이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4필지라는 것은 단일 건물이 아니라 여러 동의 건물이 분산 배치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총 5,775㎡라는 면적은 상당한 규모의 시설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잡종지 1필지 3,391㎡는 특히 흥미롭다. 잡종지란 논·밭·대지 등 명확한 지목으로 분류되지 않는 토지를 가리키는 항목으로, 당시 용도가 복합적이거나 전환 중인 토지에 부여되는 경우가 많았다. 단 1필지이지만 3,391㎡라는 적지 않은 면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 토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도로, 군사용 공터, 물자 보관 장소 등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6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110년 전의 토지 기록이 오늘날의 문화유산 조사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문화유산은 땅속에 있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조선시대 건물터까지, 우리가 발굴하는 모든 문화재는 결국 흙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그 땅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 왔는지를 알면, 어느 지점에 어떤 종류의 유적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를 예측할 수 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은 바로 그 예측의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오래된 대지(垈地)가 기록된 지역은 건물터나 생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랜 기간 농경지로 유지된 논밭 지역은 토층 교란이 적어 선사시대 유물이 원래 자리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잡종지나 도로 주변은 인간의 활동이 밀집된 지점으로, 다양한 생활 유물이 혼재할 수 있다.
내발산동의 경우 전체 국유지의 88%가 농경지였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오랜 기간 대규모 개발 없이 농업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토층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아파트 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된 현재에도, 이 기록을 바탕으로 개발 예정 지역의 문화재 매장 가능성을 사전에 평가하는 것이 바로 지표조사의 핵심이다.
1912년 토지 기록은 단순한 행정 자료가 아니다. 땅 아래 역사를 찾아가는 지도(地圖)다.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는 모두 이 지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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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성공 사례 — 땅 아래 역사가 살아있다
🏛️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 600년의 침묵을 깬 발굴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현장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는 한국 문화재 조사의 역사를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터 아래에서 조선시대 이간수문(二間水門), 훈련도감 건물터, 그리고 조선 전기 군사시설의 흔적이 연이어 출토되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발견이 쏟아지면서 서울시는 당초 계획을 바꿔 유적을 보존한 채 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주변에 조성된 역사문화공원은 그 결과물이다. 발굴 전 진행된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이 귀중한 유적은 콘크리트 아래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 풍납토성 — 백제 왕성의 부활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유물이 계기가 되어 전면 발굴조사로 이어진 사례다. 발굴 결과 이곳이 백제 초기 왕성(王城), 즉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임이 밝혀졌다. 이후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백제 왕궁 건물터, 대형 저장 구덩이, 제의(祭儀) 관련 유물 등 놀라운 발견이 계속되고 있다. 이 사례는 도시 개발 전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해야 하는 이유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 사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같다. 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그 위를 아무리 두껍게 포장하고 개발해도, 흙 아래에는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이 그대로 쌓여 있다. 내발산동의 땅 역시 예외가 아니다. 1912년 기록이 보여주는 광활한 논밭의 역사가 있었다면, 그 아래에는 더 오래된 시간의 층위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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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어떻게 진행되나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 건축이나 개발 공사를 진행할 때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문화유산 조사를 선행해야 한다. 이 조사는 4단계의 체계적인 절차로 이루어진다.
1
지표조사
현장 지표면 답사를 통해 유물 산포지, 유적 가능성을 사전 확인. 모든 조사의 출발점.
2
시굴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적 가능성이 있는 지점에 소규모 트렌치를 파 매장 유적 존재를 확인하는 탐색 조사.
3
표본조사
대규모 개발 사업 전 일정 비율의 면적을 표본 굴착하여 유적 분포 범위와 성격을 파악.
4
본발굴조사
시굴·표본 조사로 유적이 확인된 지역을 전면 조사하는 최종 단계. 문화재의 기록과 보존 조치가 이루어짐.
이 네 단계의 조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지표조사다. 지표조사 결과에 따라 이후 단계의 조사 범위와 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 중 하나가 바로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이다. 어느 지역이 오래된 취락지였는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파악하는 출발점이 이 기록에서 시작된다.
건설 공사를 앞둔 토지 소유자나 개발 사업자라면 반드시 이 절차를 이해하고 준수해야 한다. 문화재 조사 없이 공사를 강행할 경우 매장문화재 보호법 위반으로 공사 중지 명령은 물론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조사를 통해 문화재가 발견되더라도, 전문 기관과 함께 체계적인 절차를 밟으면 공사 지연을 최소화하면서도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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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A)
📌 내발산동 국유지 관련 핵심 Q&A
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국유지는 총 36필지였습니다.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의 총 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면적은 76,321㎡였습니다.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중 논은 몇 필지, 면적은 얼마였나요?
논은 14필지, 47,236㎡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61.9%로 가장 넓은 지목이었습니다.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중 밭은 몇 필지, 면적은 얼마였나요?
밭은 17필지, 19,917㎡였습니다. 필지 수는 가장 많았으나 면적은 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2년 내발산동 국유지 중 대지와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4필지 5,775㎡(7.6%), 잡종지는 1필지 3,391㎡(4.4%)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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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결론 및 자료 출처
📌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국유지는 총 36필지 76,321㎡로, 논 14필지(61.9%)·밭 17필지(26.1%)·대지 4필지(7.6%)·잡종지 1필지(4.4%)로 구성된 농업 중심 토지였으며, 이는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자료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지목별 비율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 국가유산청 규정
참고 기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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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순간,
당신의 발아래 36필지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논물에 하늘을 담던 14개의 논,
계절마다 새 작물을 피워내던 17개의 밭,
그리고 나라가 지키던 땅 위에 선 건물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교과서도 있고, 박물관도 있고, 유물도 있다.
하지만 가장 진실된 기록은 언제나 땅 속에 있다.
그 땅을 파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과거에 드리는 가장 진심 어린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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