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 국유지 특집
1912년 서울 강서구 등촌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0필지130,387㎡논 64.1%등마루골 옛터
제목 후보 ①1912년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 8필지의 기록 ②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③1912년 등촌동 국유지 20필지, 등마루골이었던 시절의 기록 ④산등성이 마을에서 이름을 얻은 등촌동의 국유지 현황 ⑤1912년 등촌동 국유지 논·밭·임야 현황
봉제산과 증미산이 원래 하나로 이어진 산줄기,
그 등성이를 중심으로 이 마을은 자리를 잡았다.
등촌동. 이 마을 이름은 등마루로 이루어져 '등마루골'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등촌'으로 표기된 것이다. 지금의 봉제산과 한강변의 증산(염창산)은 원래 같은 산줄기로 이어진 것으로, 공항로가 지나는 부분이 꽤 표고가 높은 산마루턱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 산마루턱을 중심으로 마을이 자리 잡았다 하여 '등마루골'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지었다가,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등촌동이다.
등마루의 서쪽 기슭은 비교적 얕은 능선으로 이루어져 가축을 방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화곡동에 있던, 서울과 인천 사이를 왕래하는 마지막 역촌(驛村)과 가까운 이 골짜기에 역마(驛馬)를 놓아 길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키우던 말은 때때로 궁중에 진상되었고, 궁중에서 키우던 말이 다시 이곳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등촌리였다. 이 궁중 역마의 마을, 1912년 국유지 토지대장을 열어보면 20필지 중 논이 8필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130,387㎡ 안에 담긴 이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본다.
핵심 요약
1912년 강서구 등촌동의 국유지는 총 20필지, 면적 130,387㎡였다.
논 8필지, 밭 11필지, 임야 1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목차
1912년 등촌동 국유지, 총 몇 필지였을까 — 면적 오차부터 짚기
논 8필지, 64.1% —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
밭 11필지, 임야 1필지
등마루골에서 등촌리, 그리고 등촌동까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1912년 등촌동 국유지, 총 몇 필지였을까 — 면적 오차부터 짚기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강서구 등촌동의 국유지는 총 20필지, 표기된 전체 면적은 130,387㎡였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논 | 8필지 | 83,560㎡ |
밭 | 11필지 | 36,274㎡ |
임야 | 1필지 | 552㎡ |
지목별 합계 | 20필지 | 120,386㎡ |
표기된 전체 | 20필지 | 130,387㎡ |
20
국유지 전체 필지 수
130,387㎡
국유지 전체 면적(표기값)
10,001㎡
지목별 합계와의 차이
⚠ 중대한 면적 불일치 안내지목별 면적 합계는 120,386㎡로, 표기된 전체 면적 130,387㎡보다 10,001㎡ 적습니다. 이는 이 시리즈에서 흔히 보이는 1~4㎡ 수준의 반올림 오차와는 전혀 다른 규모입니다. 필지 수(20필지)는 지목별 합계와 전체가 정확히 일치하여, 어느 지목에서 면적 표기 오류가 발생했는지는 이번 자료만으로 특정할 수 없습니다. 원자료 재확인을 권장하며, 이 글에서는 두 수치를 모두 투명하게 병기했습니다.
2논 8필지, 64.1% —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
국유지 20필지 중 논이 8필지, 83,560㎡로 지목별 면적 합계 기준 가장 넓은 비중(64.1%)을 차지했다.
등마루골의 옛 서쪽은 넓은 들로 되어 있었으며, 지금의 등촌3동에 위치한 경복여고와 마포중학교, 화곡로 동쪽 일대는 모두 논이었다. 국유지 중 논이 가장 넓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지역이 원래 넓은 논이었다는 기록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3밭 11필지, 임야 1필지
밭은 11필지, 36,274㎡로 확인된다. 임야도 1필지, 552㎡ 확인되어, 산등성이 지형의 흔적을 보여준다.

4등마루골에서 등촌리, 그리고 등촌동까지
조선시대
봉제산~증산(염창산)을 잇는 산줄기의 등마루를 중심으로 마을 형성, '등마루골' 명명
조선시대
서울-인천 간 마지막 역촌 인근 골짜기에서 역마 방목, 궁중 진상용 말 사육
조선 후기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등촌리로 편성
1912년
이 국유지 조사 시점 — 20필지, 논이 국유지 중 가장 넓은 비중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봉제산과 증미산을 잇던 산줄기의 등성이에서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궁중에 진상하던 말을 기르던 목가적인 역촌 인근 골짜기이기도 했다. 1912년 국유지 대장 속 20필지, 논이 가장 넓은 비중을 차지했던 이 기록은, 바로 그 등마루골이 아직 넓은 들녘으로 남아있던 시절의 스냅샷이다. 이 오래된 토지 기록이 앞으로 이 일대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도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5자주 묻는 질문
1912년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20필지였습니다.
등촌동 국유지 면적에 오차가 있나요?
네, 지목별 면적 합계(120,386㎡)와 표기된 전체 면적(130,387㎡) 사이에 10,001㎡의 큰 차이가 있어 투명하게 밝혀두었습니다.
등촌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논이 8필지, 83,560㎡로 가장 넓었습니다.
등촌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봉제산과 증산을 잇는 산줄기의 등마루(산등성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등마루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등촌'이라 표기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등촌동에 역마를 길렀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서울-인천 간 마지막 역촌 인근 골짜기에서 역마를 방목했으며, 이곳 말이 궁중에 진상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6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강서구 등촌동의 국유지는 총 20필지 130,387㎡(지목별 합계는 120,386㎡로 10,001㎡ 차이 확인)였으며, 논이 8필지로 국유지 중 가장 넓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동네는 봉제산과 증산을 잇는 산줄기의 등마루에서 이름을 얻었으며, 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목가적인 골짜기이기도 했다.
이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국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향후 지표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 발굴조사의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 중요: 지목별 면적 합계(논 83,560 + 밭 36,274 + 임야 552 = 120,386㎡)는 표기된 전체 면적 130,387㎡보다 10,001㎡ 적습니다. 필지 수(논 8 + 밭 11 + 임야 1 = 20필지)는 표기된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불일치의 정확한 원인은 이번 자료만으로 특정할 수 없어 원자료 재확인을 권장합니다.
등촌동·등마루골·역마 관련 역사 정보는 위키백과, 나무위키, 디지털구로문화대전 공개 자료를 근거로 인용했으며, 1912년 토지조사 수치와는 별개의 역사적 배경 설명임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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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 · 분석 항목: 국유지 필지 수, 지목,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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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산과 증미산이 원래 하나로 이어졌다는 그 등성이에서
말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궁중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들녘엔 벼가 자라고 능선의 밭에는 곡식이 여물었으며
그 갈래에는 오리들이 물가에 앉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등마루골이라는 이름은 이제 낯설게 들리지만
이 땅은 지금도 그 산줄기의 기억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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