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남구 수서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2025년 4월 1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문화재 발굴문화재 지표조사수서동 역사강남구 문화유산
지금 강남구 그 초고층 빌딩 아래, 113년 전엔 이씨 집안이 절반 가까운 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 1912년 수서동의 땅 이야기
잠깐, 이 문장 하나만 읽고 멈춰보세요.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강남, 번쩍이는 빌딩과 명품 거리의 그 강남이
113년 전에는 이씨 어르신이 논두렁을 걷고, 김씨 아낙이 밭을 매던 곳이었습니다.
이씨 집안 혼자 무려 380필지를 소유했던 이 땅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강남의 땅속에, 기록 속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목차
1.1912년 수서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2.밭 — 397필지, 수서동을 먹여 살린 가장 큰 땅
3.논 — 250필지, 물이 찰랑이던 생명의 들판
4.산과 잡종지 — 자연과 공공의 경계에 있던 땅
5.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나란히 자리한 공간
6.이씨 380필지 — 수서동을 지배하다시피 한 한 집안의 이야기
7.김씨, 박씨, 조씨 — 이씨와 함께 마을을 이룬 사람들
8.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강남 개발의 숨겨진 전제조건
9.성공 사례 — 기록이 역사를 살린 순간들
10.수서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 1912년 수서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강남구 수서동. 지금은 수서역을 중심으로 KTX와 SRT가 오가고, 고층 아파트와 업무용 빌딩이 하늘을 향해 뻗은 서울 남부의 핵심 동네입니다. 하지만 딱 113년 전, 이곳의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12년, 수서동은 705필지, 1,974,210㎡의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축구장 약 275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그 드넓은 땅의 절반 이상이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씨, 김씨, 박씨 같은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씨앗을 심고, 수확하고, 가족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무엇보다 수서동 기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씨의 압도적인 토지 소유입니다. 전체 705필지 중 이씨가 무려 380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절반이 넘는 토지가 한 성씨 집안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동네들과 확연히 다른 수서동만의 특징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기록이 주목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그 기록 속으로 걸어 들어가봅니다.
705
총 필지 수
1,974,210
총 면적 (㎡)
약 275개
축구장 환산 크기
54%
이씨 단독 소유 비율
2. 밭 — 397필지, 수서동을 먹여 살린 가장 큰 땅
1912년 수서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차지한 것은 밭이었습니다. 397필지, 1,189,377㎡. 전체 면적의 60%를 넘는 압도적인 비율입니다. 수서동은 논보다 밭이 훨씬 넓었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의 다른 동네들과 차별화됩니다. 물길보다 언덕과 구릉이 많았던 지형 특성이 이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397필지의 밭에서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자랐습니다. 봄에는 보리와 콩, 여름에는 고추와 오이, 가을이면 배추와 무가 밭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씨 아주머니가 쪼그려 앉아 김장 배추를 다듬고, 김씨 아저씨가 괭이를 들고 밭고랑을 새로 파는 풍경이 수서동의 일상이었습니다. 수확철이 되면 이웃끼리 손을 보태며 김장을 담그던 풍경도 이 밭에서 시작되었겠죠.
60%가 넘는 밭. 이 숫자는 수서동이 얼마나 다양하고 왕성한 농업을 해온 마을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밭에서 흘린 땀이 겨울을 버티는 힘이 되었고, 다음 봄을 맞을 희망이 되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번화함은 바로 이 밭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논 — 250필지, 물이 찰랑이던 생명의 들판
수서동에는 논이 250필지, 609,996㎡가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31%입니다. 밭에 비해 필지 수는 적지만, 250개의 논이 수서동 사람들의 주식인 쌀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봄이면 논에 물이 차오르고, 이씨 어르신이 허리를 굽혀 모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장마를 버티며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벼를 베고, 수확의 기쁨을 나누던 그 들판이 지금의 수서역 근처 어딘가였을 것입니다. 그 논에서 난 쌀 한 톨 한 톨이 수서동 가족들의 밥상을 채웠습니다.
수서동의 논 250필지 중 이씨 집안이 얼마나 소유했는지는 기록에서 명확히 분리되지 않지만, 전체 필지의 54%를 이씨가 소유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논 역시 상당 부분이 이씨 집안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씨 집안의 논에서 수서동 마을 전체가 먹을 쌀이 자랐을지도 모릅니다.
1912년 수서동 토지 구성 상세 요약
밭 397필지 (1,189,377㎡, 60.2%) · 논 250필지 (609,996㎡, 30.9%)
산 16필지 (74,268㎡) · 집터 37필지 (54,843㎡)
잡종지 4필지 (44,393㎡) · 무덤 1필지 (1,332㎡)
총 705필지 · 합계 1,974,210㎡ (축구장 약 275개 규모)
4. 산과 잡종지 — 자연과 공공의 경계에 있던 땅
산 — 16필지, 74,268㎡
수서동에는 16필지, 74,268㎡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 언덕과 구릉에 자리 잡은 이 산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 자원창고였습니다. 겨울 추위가 오기 전, 지게를 지고 산을 올라 땔감을 구했고, 봄이면 약초와 산나물을 뜯어 식탁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뛰어노는 놀이터였고, 마을 전체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였습니다.
잡종지 — 4필지, 44,393㎡
수서동에는 4필지, 44,393㎡의 잡종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이 땅은 도로, 수로, 혹은 마을 공용 공간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지 수는 적지만, 마을의 이동과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 시설로서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이 잡종지 아래에는 과거 수로나 도로 시설의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5. 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나란히 자리한 공간
집터 — 37필지, 54,843㎡
37필지, 54,843㎡의 집터에 수서동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있었습니다.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을 얹은 집들이 논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녁이면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이 하루의 고단함을 나누며 밥상에 둘러앉는 풍경. 37채의 집에서 그 일상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지금의 수서동 어딘가 지하에 그 집들의 기초석이 아직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무덤 — 1필지, 1,332㎡
수서동에도 단 1필지, 1,332㎡의 무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을 언덕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 무덤은 수서동에서 한평생을 살다 간 누군가의 안식처였습니다. 봄가을로 후손들이 찾아와 제사를 올리고, 조상의 이름을 불러가며 가족의 뿌리를 확인하던 공간. 그 1필지가 수서동 사람들을 과거와 이어주는 가장 직접적인 끈이었습니다.

6. 이씨 380필지 — 수서동을 지배하다시피 한 한 집안의 이야기
수서동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단연 이씨의 380필지입니다. 전체 705필지 중 무려 54%가 한 성씨 집안의 것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어느 동네와 비교해도 단연 독보적인 집중도입니다.
380필지의 이씨 집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수서동의 논과 밭 상당 부분이 이씨의 것이었다는 뜻이니, 이씨 집안은 마을의 농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수확 때면 이씨 어르신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겠죠. 이웃 성씨들은 이씨 집안의 땅을 빌려 소작을 하거나, 이씨와 협력하며 마을을 꾸려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씨 집안이 압도적이었다고 해서 다른 성씨들이 주눅 들어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을 공동체는 논과 밭의 크기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품앗이로 서로의 수확을 돕고, 경조사에 함께 손을 보태고, 아이들이 마을에서 함께 자라나는 그 일상이 수서동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이씨 집안의 넓은 땅이 수서동의 뼈대였다면, 다른 성씨들이 만들어낸 온기가 수서동의 살이었습니다.

7. 김씨, 박씨, 조씨 — 이씨와 함께 마을을 이룬 사람들
이씨가 압도적이었지만, 수서동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성씨들이 함께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김씨가 92필지로 2위를 차지했고, 박씨가 37필지, 조씨가 22필지, 원씨가 19필지, 전씨가 15필지, 한씨가 11필지로 뒤를 이었습니다.
92필지의 김씨는 이씨 다음으로 수서동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씨와 인접한 논밭에서 서로 품앗이를 하며 지냈겠죠. 박씨(37필지)는 집터와 가까운 밭을 중심으로 살림을 꾸렸을 것이고, 조씨(22필지)와 원씨(19필지)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함께 손을 보태며 공동체를 지탱했겠습니다.
전씨(15필지), 한씨(11필지). 필지 수는 적지만, 이 성씨들이 없었다면 수서동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씨의 넓은 논에서 나온 쌀이 마을 사람 모두의 밥상에 올랐듯, 모든 성씨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서동이라는 마을을 살아있게 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지금 이 기록 안에서 다시 불립니다.
8.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강남 개발의 숨겨진 전제조건
수서동 기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강남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강남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개발과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개발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서울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지하를 굴착하는 공사 전에는 법적으로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해당 부지의 지표면을 살피고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이 첫 관문이 지나면,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수서동의 1912년 기록은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나침반이 됩니다. 이씨 집안이 380필지를 소유했던 만큼, 이씨 집안의 집터와 창고, 제례 공간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위치 아래에는 조선시대 생활유물이나 건물 기초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397필지의 밭 아래에는 오랜 경작층이 두텁게 쌓여있을 수 있고, 그 아래에서 더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강남이 아무리 빠르게 개발되더라도, 이 기록과 조사 절차를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seoulheritage.org가 수서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기록을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4단계 — 강남처럼 개발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더 중요
지표조사 — 지표면에서 유물·유구 흔적 파악. 모든 조사의 시작점.
시굴조사 —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 구역별 유물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로 유적 전체를 기록하고 보존 방안 수립.
9. 성공 사례 — 기록이 역사를 살린 순간들
강남처럼 빠르게 개발되는 지역에서 기록과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사례로 확인해봅니다.
성공 사례 1 — 서교동 재개발 현장
홍대 인근 서교동 재개발 공사 전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검토해 집터와 논이 겹치는 구역을 특정했습니다.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와 전기 도자기,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되었습니다. 기록이 삽의 방향을 결정하며 귀중한 유산이 온전히 세상에 나왔습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동 공원 조성 사업
구로구 구로동 공원 조성 과정에서 1912년과 1920년대 토지 기록을 비교해 과거 연못과 창고 자리임을 미리 확인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개발 사업자·지자체·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해 보존에 성공했습니다. 100년 전 연못의 흔적이 지금 공원 예술 작품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3 — 행촌동 주거 재개발
종로구 행촌동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별로 밟은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 확인되었습니다. 우물 하나, 담장 기초 돌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한 시대를 복원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단계적 조사의 모범 사례로 지금도 현장에서 인용됩니다.
이씨 집안이 54%를 점유한 수서동, 집터와 창고 위치 파악이 핵심
이씨 한 가문이 절반이 넘는 토지를 소유했던 수서동에서는, 이씨 집안의 주거지와 부속 시설이 집중된 구역이 어디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핵심 전략입니다. 그 구역 아래에 가장 풍부한 생활유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10. 수서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912년 수서동의 이씨, 김씨, 박씨는 자신들의 이름이 113년 뒤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새벽이면 논으로 나가고, 밭을 매고, 저녁이면 가족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닫았습니다. 이씨 집안이 380필지를 소유했다고 해서 그들의 하루가 특별히 가볍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더 많은 땅은 더 많은 책임이었고, 더 많은 이웃을 먹여야 하는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수서역을 지나거나 수서동 골목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보세요. 이 역사 광장 아래 어딘가에 이씨 집안의 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 빌딩 지하에 김씨 아주머니가 배추를 다듬던 밭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저 언덕 어딘가에 수서동 어느 가문의 무덤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시간을 안전하게 깨우는 일입니다. 강남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그 땅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멈출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한, 수서동의 이씨도, 김씨도, 박씨도 아직 이 땅 위에 있습니다.

강남의 화려한 빌딩 아래,
이씨가 벼를 심던 논이 있었다.
김씨가 배추를 다듬던 밭이 있었다.
박씨가 하루를 마감하던 집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땅속에 잠들어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발굴하는 한,
그들은 아직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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