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북구 성북동 땅 이야기 속으로 GO!
- 2025년 4월 1일
- 5분 분량
지금 네가 걷는 성북동 골목 아래,
100년 전엔 창덕궁의 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탈의 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1912년 성북구가 품은 이야기를 지금 꺼낸다.
목차
1.시간을 거슬러 — 1912년 성북동의 문을 열다
2.숫자가 말해주는 성북동의 실체 — 350필지의 기록
3.밭이 땅의 절반을 덮었다 — 자급자족 농경 마을의 실상
4.166필지의 집, 사람들이 모여 살던 풍경
5.땅 주인은 누구였나 — 성씨 지도로 읽는 성북동
6.창덕궁의 숨겨진 땅 — 왕실이 이곳에 있었다
7.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 수탈의 흔적
8.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 — 발굴 성공 사례
9.마무리 — 이 땅이 기억하는 것들

1. 시간을 거슬러 — 1912년 성북동의 문을 열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지금은 조용한 주택가와 대사관저, 그리고 성북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로 유명한 동네다. 주말이면 카페를 찾아드는 사람들과 아리랑고개를 오르는 등산객들로 붐비는 이 골목에, 10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분석한 1912년 지적 자료에 따르면, 당시 성북동은 350필지, 395,191㎡의 땅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경 마을이었다. 축구장 56개를 합쳐놓은 면적이다. 그런데 이 숫자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그 안의 구성이다. 논과 밭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집들이 모여 있었으며, 임야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창덕궁 왕실의 땅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조선의 토지를 수탈해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북동 곳곳에서 개발과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그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왜 반드시 필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1912년 성북동의 이야기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2. 숫자가 말해주는 성북동의 실체 — 350필지의 기록

1912년 성북동의 토지 기록은 놀라울 만큼 상세하다. 총 350필지, 395,191㎡. 이 숫자들이 단순히 땅의 크기를 알려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생활 기록이기도 하다.
350
총 필지 수
395,191㎡
총 면적
172필지
밭 (295,369㎡)
166필지
대지 (집터)
3필지
논 (1,196㎡)
6필지
임야 (12,971㎡)
전체 350필지 중 밭이 172필지, 295,369㎡로 단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전체 토지의 74%가 넘는 땅이 밭이었다는 뜻이다. 집터인 대지는 166필지, 73,970㎡였고, 논은 3필지에 불과한 1,196㎡였다. 논이 극히 적다는 사실은 성북동이 물을 얻기 어려운 구릉지 마을이었음을 암시한다. 물 대신 빗물에 의존하는 밭농사가 이 마을의 주된 생업이었다.
밭
172필지 · 295,369㎡
대지
166필지 · 73,970㎡
임야
6필지 · 12,971㎡
잡종지
3필지 · 11,682㎡
논
3필지
3. 밭이 땅의 절반을 덮었다 — 자급자족 농경 마을의 실상

172필지, 295,369㎡의 밭. 이 숫자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실감하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지금 성북동에서 볼 수 있는 아파트 단지 몇 개를 합쳐놓은 것이 전부 밭이었다는 것이다. 배추, 무, 콩, 고추, 감자. 계절마다 달라지는 작물들이 성북동 구릉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12년 성북동 주민들은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 경제 구조 안에서 살았다. 직접 밭에서 키운 채소로 한 해의 밥상을 차렸고, 넘치는 것은 이웃과 나눴다. 시장을 오가는 일이 지금처럼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 밭 하나가 한 가족의 생존을 결정했다. 172필지의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그 시대 성북동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터전이었다.
임야는 6필지, 12,971㎡였다. 지금의 개운산, 북악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마을을 품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뒷산, 어른들이 땔나무를 하던 숲, 그리고 겨울에는 눈 쌓인 능선을 따라 마을 전체가 하얗게 덮이던 그 풍경이 성북동의 원래 모습이었다.
172필지의 밭에서 올라오던 흙냄새, 그것이 성북동의 본래 향기였다.
4. 166필지의 집, 사람들이 모여 살던 풍경
166필지, 73,970㎡의 대지. 성북동 전체에서 집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9%에 불과했다. 이것은 성북동이 얼마나 전형적인 농업 마을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집보다 밭이 훨씬 많은 동네, 사람보다 작물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66필지의 집들 안에는 수백 명의 삶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입, 변화의 물결이 서울 도심부터 밀려오고 있었지만 성북동은 여전히 조용한 마을의 리듬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벽 닭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하루. 그 반복이 성북동 사람들의 1912년이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대지 필지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래된 집터 아래에는 기와 파편, 생활 도구, 도자기 조각 같은 유물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성북동에서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리는 공사가 시작될 때, 그 땅 아래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5. 땅 주인은 누구였나 — 성씨 지도로 읽는 성북동

1912년 성북동의 토지 소유 현황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성씨 분포가 나타난다. 개인 소유자 중 최다 필지를 보유한 성씨는 김씨로 75필지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씨가 67필지로 바짝 쫓았다. 3위는 안씨로 26필지, 최씨 21필지, 정씨 15필지, 박씨와 서씨가 각각 10필지를 보유했다.
김씨75필지 (1위)
이씨67필지 (2위)
안씨26필지 (3위)
최씨21필지
정씨15필지
박씨10필지
이 성씨 분포는 1912년 성북동이 얼마나 다양한 가문들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씨와 이씨가 최상위를 차지한 건 전국적인 인구 분포와도 일치하지만, 안씨가 3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성북동만의 특색이다. 특정 지역에 특정 성씨가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집성촌 문화가 이 동네에도 분명히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75필지의 땅을 가진 김씨 가문이 있었다면, 그 집안에는 분명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작물을 심었는지,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그 땅을 갈았는지.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이야기들이,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의 형태로 다시 깨어날 수 있다.
6. 창덕궁의 숨겨진 땅 — 왕실이 이곳에 있었다

1912년 성북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항목 중 하나는 창덕궁의 등장이다. 인접한 성북구 지역 기록들을 보면 창덕궁이 상당수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왕실의 땅이 서울 외곽 농촌 마을까지 뻗어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왕조가 얼마나 광범위한 토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창덕궁의 소유지는 단순한 왕실 재산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과 임대 수익은 왕실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했다. 조선 시대 왕실은 전국 곳곳에 소유지를 분산 배치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는데, 성북동 일대가 그 하나였다는 것이다. 지금 성북동 어느 골목에 창덕궁의 숨결이 남아있는지, 그 흔적을 찾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7.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 수탈의 흔적
1912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전역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그 선봉에 선 기관이었다. 성북구 인근 지역 기록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수십 필지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땅들은 원래 조선 사람들의 것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 동네에서 수십 필지를 소유했다는 것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었다. 이것은 식민지 수탈 구조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오랫동안 대를 이어 경작해온 땅을 문서 하나로 빼앗기는 일이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다. 성북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은 현재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척이 소유한 토지에는 특수한 목적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기존 조선식 건물이 철거되는 일이 많았다. 그 철거 과정에서 땅속에 묻힌 유물들이 오히려 더 잘 보존되는 역설적인 경우도 있다. 문화재 발굴은 역사의 아픔마저 기억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8.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 — 발굴 성공 사례
성북동과 인접한 성북구 지역에서는 이미 의미 있는 문화재 발굴 사례들이 있었다. 성북구 돈암동 일대 재개발 구역에서 조선 시대 기와편과 생활 도자기가 다수 출토된 바 있다. 발굴조사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그 유물들은 포클레인 날에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발굴 성공 사례 — 서울 성북 지역: 성북구 인근 재개발 부지에서 진행된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중기 기와 건물지와 생활 유구가 확인됐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토층 분석을 통해 유적 존재 가능성이 제기됐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 발굴조사가 이어진 사례다. 한 번의 지표조사가 한 시대의 역사를 살려냈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 사업 착공 전에 해당 부지의 문화재 잠재력을 사전에 평가하는 절차다. 지표면을 육안으로 관찰하고, 문헌 기록을 분석하고, 주변 발굴 이력을 참고해 문화재 존재 여부와 보존 필요성을 판단한다. 이후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1912년 지적 자료처럼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남아있는 지역일수록 지표조사의 정확도는 높아진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서울 25개 자치구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각 동네의 문화재 잠재 가치를 데이터화하고 있다. 성북구 성북동을 포함해 하월곡동, 종암동 등 성북구 전역에 걸친 1912년 기록 분석 결과가 이미 공개되어 있다. 이 데이터들은 미래의 문화재 발굴조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전 정보가 된다.
9. 마무리 — 이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성북동 350필지의 기록을 천천히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묵직해진다. 김씨, 이씨, 안씨, 최씨. 그 이름들 뒤에는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으며 밭에 나가던 사람, 닭을 키우고 텃밭에서 채소를 뽑던 사람, 명절이면 창덕궁 방향으로 절을 올리던 사람. 그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 성북동 땅 아래 잠들어 있다.
역사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성북동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 자리가, 100년 전에는 누군가의 밭이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걷는 그 골목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소중한 삶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 그것이 문화재 발굴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지표조사가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빼앗아간 땅의 기억도, 창덕궁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도, 172필지의 밭에서 땀 흘리던 농부의 이야기도 — 모두 이 땅이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꺼내는 일에 우리가 조금씩 관심을 갖는다면, 성북동은 더 깊고 풍성한 동네가 될 것이다.
성북동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1912년 모습이 궁금하다면?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에서 서울 25개 구의 역사 기록을 확인해보세요.당신의 동네 아래에도 놀라운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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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100년 전 성북동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던 사람들은오늘 당신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이 남긴 땅 위에서, 당신이 그 흔적을 기억해주었다.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역사를 살아있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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