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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 땅 이야기 대방출!

  • 2025년 4월 1일
  • 9분 분량

문화재 발굴조사 · 동대문 역사

이 동네 이름엔 조선 세조의 방범 명령이 담겨 있다.

이문동(里門洞). 560년 전 세조가 한성에 설치한 마을 방범문, 이문(里門)에서 시작된 이름이야. 그 이름이 지금도 여기 살아 있어. 그리고 1912년 기록은 그 동네가 얼마나 다른 세상이었는지를 보여줘.

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 마을 방범초소 자리에 잠든 논밭의 기억 —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동대문 동쪽 마을의 뿌리

seoulheritage.org 기반 분석 | 문화재 발굴기관 ·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동대문구 문화유산


목차

1. 이문동이라는 이름의 560년 — 세조가 설치한 마을 방범문 이야기

2. 1912년 이문동 토지 통계 — 352필지, 전체의 64%가 논이었던 평야 마을

3. 논 195필지 620,825㎡ — 서울 동쪽 끝의 광활한 벼농사 지대

4. 밭 121필지와 연못 3필지 — 물이 풍부한 마을이 만들어낸 풍경

5. 집터 29필지의 의미 — 인구 밀도 낮고 농사 중심이었던 조용한 동네

6. 김씨 101필지의 압도적 지배 — 여섯 가문의 이문동 권력 지도

7. 중랑천과 이문동 — 물길이 만든 논농사 문화층의 발굴 가능성

8.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논 64% 평야 지대에서의 조사 전략

9. 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논·연못 기록이 발굴을 바꾼 이야기

10. 마무리 — 경희대 후문 골목 아래 황금빛 논이 잠들어 있다


1.이문동이라는 이름의 560년 — 세조가 설치한 마을 방범문 이야기

이문동(里門洞). 한자를 풀면 마을 이(里), 문 문(門), 마을 동(洞). '마을문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야. 근데 이 마을문이 단순한 문이 아니야.

1465년, 조선 세조 11년이야. 세조는 한성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적인 방범 시책을 시행했어. 그 핵심이 바로 이문(里門)이야. 이문은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어귀에 세운 마을 방범문이야. 지금으로 치면 경비실 겸 방범초소야. 이 이문을 중심으로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고, 주변에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장승과 솟대가 세워졌어.

이문(里門)이란 무엇인가

이문은 성문이나 가옥 대문과는 다른 개념이야. 큰 도로에서 마을 골목으로 진입하는 경계 지점에 세우는 공동체 문이야. 1465년 세조가 한성에 처음 설치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어. 이문동이라는 지명은 서울 동대문구뿐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어. 도봉구 쌍문동의 옛 이름 '쌍리문동'도 같은 계통이야. 이문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생활 영역을 정의하는 사회적 경계였어. 이 이문이 세워진 자리와 주변에는 장승, 입석, 솟대 같은 민속 신앙 구조물이 함께 있었어. 이런 구조물의 기초석이 땅속에 잠들어 있을 수 있어.

560년 전 세조의 방범 명령 하나가 동네 이름을 만들었어. 그리고 그 이름이 지금도 여기 있어. 이문동. 이 이름을 알고 나면 동네를 지나칠 때 골목 어귀를 보는 눈이 달라져. 저 골목길 어귀 어딘가에 이문이 서 있었을 거야. 그 기초석이 아직 땅속에 있을 수도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1912년 기록을 분석해서 동대문구 일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고 있어. 이문동의 역사 층위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숫자로 먼저 확인해볼게.



2.1912년 이문동 토지 통계 — 352필지, 전체의 64%가 논이었던 평야 마을

1912년 이문동의 기록을 숫자로 보면, 이 동네가 얼마나 전형적인 논농사 평야 마을이었는지가 한눈에 들어와.

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 토지 통계 요약 (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필지 수352필지

전체 면적957,653㎡

논 (수전)195필지 / 620,825㎡ (전체의 약 64%)

밭 (전)121필지 / 278,903㎡ (전체의 약 29%)

지소 (연못)3필지 / 8,991㎡

대지 (집터)29필지 / 43,315㎡

임야 (산)3필지 / 3,487㎡

묘지 (무덤)1필지 / 128㎡

논+밭 합계316필지 / 899,728㎡ (전체의 약 94%)

주요 소유 성씨 1위김씨 101필지

주요 소유 성씨 2위이씨 31필지

주요 소유 성씨 3위추씨 28필지

957,653㎡. 축구장 약 134개를 합쳐놓은 크기야. 그리고 이 넓은 땅의 64%가 논이었어. 논 64%, 밭 29%를 합치면 논밭이 94%야. 이문동 전체가 사실상 논밭이었다는 뜻이야.

지금 경희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있는 이문동이 100년 전에는 이렇게 광활한 논밭 마을이었다는 게 실감이 안 올 수 있어. 근데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352필지 중 집터는 고작 29필지야. 전체의 3%야. 이 동네는 집보다 논이 압도적으로 많은, 완전한 농경 마을이었어.

논 64%라는 수치는 서울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높아. 이문동이 평야 지형이라는 게 핵심이야.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이, 동쪽으로는 중랑천이 흐르는 이 지형에서 평평한 충적 평야가 펼쳐졌고, 그 위에 논이 조성됐어. 중랑천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어서 논농사에 최적의 조건이었어.



3.논 195필지 620,825㎡ — 서울 동쪽 끝의 광활한 벼농사 지대

195필지, 620,825㎡의 논. 이걸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지금 경희대 캠퍼스 전체 면적이 약 300,000㎡이야. 이문동의 논 면적은 그 두 배가 넘어. 경희대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가 전부 논이었던 거야.

1912년 이문동의 가을 풍경을 상상해봐. 황금빛 벼 이삭이 중랑천 서쪽 평야 전체를 덮고, 바람이 불면 벼 물결이 굽이치는 풍경. 지금 지하철 1호선 신이문역에서 경희대 방향으로 걷는 그 길이, 당시에는 논두렁 길이었을 거야. 대학가의 떡볶이 골목이 있는 자리가 한때 벼가 자라던 논이었어.

논이 이만큼 넓다는 건 이 동네에서 쌀이 핵심 산업이었다는 뜻이야. 195필지라는 숫자는 적어도 수십 개 이상의 가구가 각자 논을 관리하며 살았다는 걸 의미해. 봄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 내내 논에 물을 대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리듬이 이 동네 전체를 움직였어. 그 리듬 속에 이문이라는 마을문이 매일 밤 닫히고 아침이면 열렸을 거야.

"논 지역에서는 수로와 논둑 구조물의 잔재를, 1912년의 지목 정보는 어느 구역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가이드가 된다." — seoulheritage.org 구로동 조사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논 구역은 특별한 탐색 대상이야. 논을 유지하려면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수로 시스템이 필요해. 수로를 따라 돌이나 목재로 만든 구조물이 설치됐어. 이 구조물들의 잔재가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어. 195필지의 논이 펼쳐진 이문동에는 그 수로 흔적이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어.



4.밭 121필지와 연못 3필지 — 물이 풍부한 마을이 만들어낸 풍경

논이 64%를 차지하는 이문동에서 두 번째로 큰 비중을 가진 건 밭이야. 121필지 278,903㎡. 전체의 29%야. 논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밭도 상당해. 논에는 벼가, 밭에는 배추, 무, 콩, 참깨 같은 작물이 자랐을 거야. 두 가지 농경 형태가 공존하는 풍요로운 마을이었어.

그리고 이문동 기록에서 눈에 띄는 특별한 지목이 있어. 연못, 즉 지소(池沼)야. 3필지 8,991㎡. 논 옆에 연못이 세 개나 있었다는 거야. 이게 왜 특별하냐면, 이 연못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거든.

이문동 연못 3필지의 역할

논농사에서 물은 생명이야. 비가 오지 않는 기간에도 논에 물을 공급하려면 저수 시설이 필요해. 이문동의 연못 3필지는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논에 물이 필요할 때 연못에서 끌어다 쓰고, 비가 많이 올 때는 연못에 물을 저장하는 방식이야. 농업용 저수지 역할을 한 이 연못들 주변에는 수리 시설 구조물, 도자기 조각, 어업 도구 같은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어. 또한 여름에는 마을 아이들의 물놀이 공간이, 마을 여성들의 빨래터가 됐을 거야. 사람들의 생활 흔적이 가장 집중되는 공간 중 하나야.

연못 3필지 8,991㎡. 하나의 연못이 약 3,000㎡ 정도 규모야. 상당히 큰 연못이야. 이 연못들이 이문동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지금 지형과 대조하면, 발굴 우선 구역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돼. 연못은 메워지면 독특한 토층 구조를 만들어. 그 토층 안에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연못 추정 구역은 항상 집중 탐색 대상이야.



5.집터 29필지의 의미 — 인구 밀도 낮고 농사 중심이었던 조용한 동네

352필지 전체에서 집터는 29필지 43,315㎡에 불과해. 전체의 3%야. 이 숫자가 주는 인상이 강렬해. 이문동은 사람이 드물게 살고 대부분이 논밭인, 매우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던 거야.

29필지라는 집터 수는 최대 수십 가구 정도가 마을 전체에 흩어져 살았다는 뜻이야. 지금 경희대 주변 골목이 원룸과 카페로 빽빽한 걸 생각하면, 100년 전 이문동은 정말 다른 세상이었어. 사방이 논밭이고, 드문드문 초가집과 기와집이 서 있는. 이문 앞을 지나는 사람이 하루에 몇 명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을 거야.

집터 29필지가 어느 위치에 몰려 있었는지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해. 집터 구역은 여러 세대의 생활 흔적이 켜켜이 쌓인 문화층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도자기, 생활 도구, 건축 부재, 아궁이 흔적이 집터 아래에 농축되어 있을 수 있어. 논 64%가 있는 넓은 평야에서 29필지 집터는 전체 발굴 예측 지도에서 가장 먼저 집중 조사해야 할 구역이야.

임야 3필지 3,487㎡는 전체의 0.3%야. 이문동이 얼마나 평평한 평야 지대였는지를 보여줘. 산이 거의 없고, 논과 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진 풍경. 이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황금빛 논밭. 그게 1912년 이문동이었어.


6.김씨 101필지의 압도적 지배 — 여섯 가문의 이문동 권력 지도

1912년 이문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가진 성씨는 김씨야. 무려 101필지. 352필지 전체에서 28% 이상을 단일 성씨가 차지하고 있었어. 압도적이야. 다른 동네에서 1위 성씨가 30~50필지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동의 김씨는 101필지야. 이문동에서 김씨 가문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야.

김씨 — 101필지

전체의 28% 이상. 압도적 1위. 이문동 논의 상당 부분이 김씨 가문 소유였을 거야. 마을의 중심 집성촌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아. 발굴 예측 지도에서 최우선 집중 구역이야.

이씨 — 31필지

2위. 김씨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여전히 큰 비중. 논 중심 구역에서 이씨 가문이 별도 집성촌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어.

추씨 — 28필지

3위. 추씨는 비교적 드문 성씨야. 이문동에서 28필지를 차지했다는 건 이 지역에 추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야. 집성촌 구역에서 다층 생활 문화층 기대 가능.

전씨·박씨·민씨 — 22·22·13필지

4·5·6위. 전씨와 박씨가 각각 22필지로 공동 4위. 민씨 13필지. 여섯 가문이 이문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다양한 성씨 분포가 복합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어.

김씨 101필지가 뭘 의미하는지를 발굴 관점에서 생각해봐. 101필지 중 대다수가 논이었을 거야. 전체의 64%가 논이고, 김씨가 전체의 28%를 차지했으니 김씨 논이 꽤 많았겠지. 그 김씨 가문이 대를 이어 살았던 집터 구역이 어디냐에 따라 발굴 집중 구역이 결정돼.

추씨 28필지도 흥미로워. 추씨는 전국에서 인구 비중이 높지 않은 성씨야. 이문동에서 3위를 차지했다는 건 이 동네에 추씨 집성촌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이야. 집성촌은 수 대에 걸쳐 같은 구역에서 살기 때문에 생활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 있어. 발굴조사에서 집성촌 추정 구역은 항상 집중 탐색 대상이야.


7.중랑천과 이문동 — 물길이 만든 논농사 문화층의 발굴 가능성

이문동 동쪽 경계는 중랑천이야. 지금도 이문동 동쪽을 따라 중랑천이 흘러. 1912년에도 마찬가지였어. 중랑천은 이 동네 논농사의 핵심 물길이었어.

중랑천 인접 지역의 발굴은 다른 내륙 지역과 다른 특성이 있어. 하천 범람으로 퇴적된 충적층이 쌓여 있어. 이 충적층 안에 여러 시대의 유물이 함께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조선시대 도기 조각, 농기구의 잔해, 수리 시설 구조물이 중랑천 서안(西岸)의 충적층에 분포할 수 있어.

특히 이문동처럼 중랑천을 따라 대규모 논농사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논에 물을 끌어오던 수로 구조물이 중요한 발굴 대상이야. 이 수로는 중랑천 상류에서 시작해서 이문동 논 195필지 전체로 물을 배분하는 역할을 했을 거야. 그 수로의 분기점, 수문 구조물, 논두렁을 고정하는 석재가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연못 3필지가 논과 중랑천 사이 어딘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아. 논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 기능과 함께 중랑천 범람 시 완충 역할을 하는 위치에 연못이 만들어지는 게 일반적이거든. 이 연못의 위치를 1912년 기록과 현재 지형으로 역추적하면, 발굴 우선 구역을 매우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어.



8.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논 64% 평야 지대에서의 조사 전략

이문동처럼 논이 64%를 차지하는 광활한 평야 지대에서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방향이 산기슭이나 구릉 지역과 달라야 해. 논농사가 이루어진 충적 평야에서는 유물이 수직으로 깊이 묻혀 있는 게 아니라, 수평으로 넓게 분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1

지표조사 — 논 수로 흔적과 연못 위치 추적이 핵심

이문동 지표조사에서는 1912년 기록의 논 195필지와 연못 3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형과 대조하는 게 첫 단계야. 수로가 지나갔을 낮은 지형선과 연못이 있었을 얕은 지형 분지를 찾아내면, 유물 집중 구역을 사전에 특정할 수 있어.

2

표본조사 — 논·연못·집터 세 구역을 분리해서 설계

조사 면적 2% 이내에서 표본 굴착 시, 논 구역(수로·논둑 구조물), 연못 구역(수리 시설·생활 도구), 집터 구역(생활 유물)을 각각 별도 포인트로 설정해. 이 세 구역의 유물 종류가 완전히 달라서 분리 설계가 효율을 높여.

3

시굴조사 — 충적층 수평 탐색 병행

중랑천 인접 충적 평야에서는 수직 굴착만으로는 유물 전체 분포를 파악하기 어려워. 수평 탐색 트렌치를 논 수로 방향을 따라 설치하면 분포 패턴을 효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조사 면적의 10% 이내에서 이 방식을 적용하는 거야.

4

본발굴조사 — 이문터 흔적 발견 시 즉시 국가유산청 협의

만약 이문(里門) 관련 구조물이나 장승·솟대의 기초석이 발견된다면, 이건 560년 전 세조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 유적이야. 이런 경우 국가유산청과 즉시 협의하고, 보존 방안을 수립해야 해. 이문터는 전국적으로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드문 귀한 유적이야.

이문동에서 개발이나 공사를 계획한다면, 1912년 기록에서 논 195필지의 분포, 연못 3필지의 위치, 집터 29필지의 구역을 먼저 파악해야 해. seoulheritage.org에서 동대문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어. 이 데이터가 지표조사 방향 설정의 출발점이야.


9.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논·연못 기록이 발굴을 바꾼 이야기

이문동과 비슷한 조건의 지역에서 1912년 기록이 발굴에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지 살펴볼게.

사례 1 — 서울 구로동: 논 229필지 기록이 수로 구조물 발굴로 이어지다

구로동 1912년 기록에는 논 229필지와 연못 6필지가 포함돼 있었어. seoulheritage.org가 이 데이터를 분석해서 논 구역의 수로 방향과 연못 위치를 사전에 예측했어. 실제 시굴조사에서 예측한 구역에서 수리 시설 구조물과 도자기 조각이 연속으로 확인됐어. 이문동도 논 195필지와 연못 3필지가 있어. 구로동과 동일한 방식으로 분석하면 수로 구조물 출토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사전에 특정할 수 있어.

사례 2 — 서울 용산구 한남동: 충적 평야 논 구역에서 수로 잔재 확인

한남동은 한강 인접 충적 평야 지역으로 이문동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어. seoulheritage.org가 1912년 기록의 논 분포를 분석해서 수리 시설 잔재 예측 구역을 설정했어. 실제 조사에서 옛 수로 방향을 나타내는 지형 변화와 석재 구조물이 확인됐어. 중랑천 인접 충적 평야인 이문동도 동일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사례 3 — 동대문구 중곡동: 인접 광진구 1912년 논밭 기록 활용

seoulheritage.org가 광진구 중곡동의 1912년 기록을 분석했어. 518필지 2,211,193㎡ 규모의 중곡동 기록에서 논과 밭 분포를 바탕으로 조사 방향을 설정했어. 이문동과 인접한 중곡동 데이터와 이문동 데이터를 교차 분석하면, 동대문구 동쪽 지역 전체의 1912년 지형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이런 광역 분석이 발굴 정밀도를 높여.

세 사례 모두 공통점이 있어. 1912년 기록을 먼저 분석하고, 논·연못·집터 구역별로 조사 방향을 분리해서 설정했을 때 발굴 효율이 압도적으로 올라갔다는 거야. 이문동의 352필지도 이 경로를 따르면 그 안에 잠든 기억을 꺼낼 수 있어.



10.마무리 — 경희대 후문 골목 아래 황금빛 논이 잠들어 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이문동을 다른 눈으로 걸을 수 있을 거야. 경희대 후문을 나서서 이문역 방향으로 걸을 때, 한국외대 앞 골목을 지날 때, 이문2동 주민센터 앞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아래를 생각해줘.

김씨 101필지. 이씨 31필지. 추씨 28필지. 전씨 22필지. 박씨 22필지. 민씨 13필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1912년 이 땅의 논밭을 일구며 살았어. 봄에 모를 심고, 여름에 물을 대고, 가을에 황금빛 벼를 수확하고, 겨울이 오면 이문 앞 화롯불 옆에서 몸을 녹이던 사람들이야.

그리고 마을 어귀 어딘가에 이문이 서 있었어. 560년 전 세조가 명령해서 세운 그 마을 방범문. 밤이면 문을 닫고, 아침이면 문을 열어 하루를 시작했어. 그 문이 서 있던 자리가 지금 어디인지는 몰라. 근데 그 기초석이 아직 지표 아래 어딘가에 있을 수 있어.

이문동이라는 이름은 그 문 덕분에 살아남았어. 560년 동안. 일제강점기에도, 급격한 도시화에도, 대학가의 번화함에도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어. 이문동. 그 이름이 오늘도 여기 있어.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이름 뒤에 숨어 있는 기억을 꺼내는 일이야. 논 195필지의 수로 구조물, 연못 3필지의 생활 흔적, 집터 29필지 아래의 도기 조각. 그리고 혹시 운이 좋다면, 이문의 기초석. 그게 모여서 560년 전 이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 살았다는 걸 다시 증명해.

다음에 이문동 대학가 골목을 걸을 때, 발아래를 한 번만 생각해줘. 여기, 황금빛 논이 있었어. 그리고 논두렁 너머로 이문이 서 있었어.



560년 전 세조의 명령이


동네 이름을 만들었다.



그 이름 아래


논이 있었고, 연못이 있었고,


이문이 서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 문은 닫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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