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대문구 답십리동 국유지의 발견 — 임야 51,729㎡와 밭 27,322㎡, 한양 동쪽 관문 마을이 간직한 110년의 기억
- 5월 30일
- 7분 분량
"임야 3필지 51,729㎡.
답십리 야트막한 구릉 위에
110년 전 서울의 숲이 잠들어 있었다."
한양 동쪽 관문, 동대문 밖 첫 번째 마을 답십리.
7필지 79,051㎡의 국유지 안에서
임야와 밭이 함께 품은 역사를 지금 꺼냅니다.
1912년 동대문구 답십리동 국유지의 발견 — 임야 51,729㎡와 밭 27,322㎡, 한양 동쪽 관문 마을이 간직한 110년의 기억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7필지총면적 79,051㎡임야 65.4%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 답십리, 한양 동쪽 관문 밖 첫 번째 마을
02 1912년 답십리동 국유지 전체 통계 — 7필지 79,051㎡의 구성
03 임야 3필지 51,729㎡ — 답십리 구릉을 덮은 국유 산림의 정체
04 밭 4필지 27,322㎡ — 동쪽 관문 마을의 농경지가 남긴 층위
05 임야와 밭의 황금 비율 — 65 대 35가 말하는 것
06 동대문 역사 문화권, 문화재 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07 발굴 성공 사례 — 구릉 임야와 관문 마을 밭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08 답십리의 숲과 밭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01
답십리, 한양 동쪽 관문 밖 첫 번째 마을
5호선 답십리역에서 내리면, 오래된 주택가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가 뒤섞인 전형적인 서울 동부 주거 지역이 펼쳐집니다. 답십리(踏十里). '열 리(里)를 밟아간다'는 뜻, 즉 한양 도성에서 열 리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지명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쪽으로 열 리, 약 4킬로미터쯤 걸어가면 닿는 이 마을은 동대문(흥인지문) 밖을 나선 여행자들이 처음 만나는 큰 마을 중 하나였습니다. 한양과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주요 도로상에 위치했고,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습니다. 답십리는 한양 동쪽 관문의 첫 번째 쉼터이자 길목이었습니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이 마을을 기록했을 때 담긴 국유지는 7필지 79,051㎡였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노량진(3필지 84,043㎡)과 비슷한 면적이지만, 구성은 완전히 다릅니다. 수도 인프라가 아닌, 임야와 밭이 이루는 전통적인 농경·산림 국유지의 조합입니다. 그리고 그 조합 속에 한양 동쪽 관문 마을의 110년 전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답십리는 1960~70년대 서울 팽창 과정에서 도시 외곽 주거지로 급격히 개발된 지역입니다. 그 개발 이전, 1912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국유지 기록이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야트막한 구릉 위의 임야와 그 사이사이 펼쳐진 밭, 이것이 110년 전 답십리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02
1912년 답십리동 국유지 전체 통계 — 7필지 79,051㎡의 구성
7필지 79,051㎡. 이 숫자의 조합이 답십리 국유지의 첫 번째 특징을 드러냅니다. 7필지는 이 시리즈에서 갈월동(6필지), 가락동(6필지), 남가좌동(3필지), 노량진(3필지) 다음으로 적은 필지 수입니다. 그런데 총 면적 79,051㎡는 돈암동(84,211㎡), 노량진(84,043㎡)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즉 7개의 필지가 평균 11,293㎡, 약 3,416평씩의 큰 단위로 구성된 국유지입니다.
이 7필지는 단 두 가지 지목으로 나뉩니다. 임야 3필지 51,729㎡와 밭 4필지 27,322㎡. 잡종지도, 수도용지도, 논도, 대지도 없습니다. 오직 임야와 밭 두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이 단순하고 명확한 구성이 오히려 답십리 국유지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숲과 농경지, 그것이 1912년 답십리의 국유지 전부였습니다.
임야 + 밭 — 가장 순수한 전통 농림 국유지 구성
65 : 35
임야 65.4% : 밭 34.6%
이 시리즈에서 임야와 밭만으로 이루어진 국유지는 답십리가 유일합니다.
숲과 농경지가 만들어내는 가장 전통적인 한국 마을 국유지의 얼굴입니다.
총 필지
7필지
임야+밭 단 두 지목
총 면적
79,051㎡
축구장 약 11.1배
임야 비율
65.4%
3필지 51,729㎡
밭 비율
34.6%
4필지 27,322㎡
임야
51,729㎡ (65.4%)
밭
27,322㎡ (34.6%)
1912년 답십리동 국유지 지목별 상세
동대문구 답십리동 | 조사 기준 1912년 | 한양 동쪽 관문 마을
임야3필지 / 51,729㎡65.4%
밭4필지 / 27,322㎡34.6%
합계7필지 / 79,051㎡100%
금호동 (성동구)
임야 1필지
15,325㎡
돈암동 (성북구)
임야 3필지
8,846㎡
답십리 임야 ← 지금
임야 3필지
51,729㎡ 시리즈 최대
가락동 (송파구)
임야 1필지
661㎡
03
임야 3필지 51,729㎡ — 답십리 구릉을 덮은 국유 산림의 정체
3필지 51,729㎡. 이 시리즈 전체에서 임야 지목으로는 가장 넓은 면적입니다. 돈암동 임야(3필지 8,846㎡)의 5.8배, 금호동 임야(1필지 15,325㎡)의 3.4배입니다. 1필지당 평균 17,243㎡, 약 5,216평의 산림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답십리 일대는 낮은 구릉지가 완만하게 이어지는 지형입니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들어내는 평야와 그 주변의 야트막한 언덕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지형에서, 국유 임야 3필지는 그 구릉 사면과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51,729㎡는 이 구릉 위의 산림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국가의 관리를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양 동쪽 관문 인근의 국유 산림이 왜 이렇게 넓었을까요? 조선시대 한양 도성 주변의 산림은 여러 이유로 국가가 직접 관리했습니다. 첫째는 풍수지리적 목적입니다. 동쪽 방향의 산림은 한양 도성의 '청룡(靑龍)' 방위를 보호하는 비보 기능을 했고, 이를 위해 무분별한 벌채를 막는 국유 산림 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군사적 목적입니다. 한양 동쪽 접근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 위의 산림은 군사적 감시와 방어에 활용될 수 있었고, 그래서 국가가 직접 관리했습니다. 셋째는 한양 도성 건축과 유지를 위한 목재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51,729㎡의 임야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넓은 단일 임야 조사 구역입니다. 구릉 임야에는 봉수대 관련 유구, 군사 관측 시설의 흔적, 사찰 또는 암자 터의 석재 유구, 그리고 조선시대 산림 관리 관련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3필지 각각의 위치와 지형 특성에 맞는 차별화된 지표조사 전략이 필요합니다.

답십리 국유 임야 51,729㎡ — 세 가지 역사적 성격 가능성
① 한양 도성 풍수 비보 국유 산림 — 동쪽 청룡 방위 보호 목적의 벌채 금지 구역. ② 한양 동쪽 군사 감시 구릉 — 동대문 접근로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위치. ③ 도성 건축 목재 공급 국유림 — 한양 성곽 및 관청 건물 유지를 위한 목재 조달지. 세 가능성 모두 임야 표면 아래에 역사적 유구를 남겼을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 전체 임야 면적 합산 1위. 51,729㎡의 답십리 임야는 한양 동쪽 관문을 지키던 숲입니다. 그 숲이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면, 그 아래 문화층은 가장 깊고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04
밭 4필지 27,322㎡ — 동쪽 관문 마을의 농경지가 남긴 층위
4필지 27,322㎡의 밭. 1필지당 평균 6,831㎡, 약 2,066평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밭 중 1필지 평균 면적으로는 내곡동(1필지 평균 1,601㎡) 다음으로 큰 규모입니다. 4개의 필지가 각각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면서 임야와 함께 답십리 구릉지의 지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임야가 구릉 상부와 사면 위쪽을 차지하고, 밭이 구릉 하부와 평탄지를 차지하는 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한국 전통 마을의 전형적인 토지 이용 패턴입니다. 위쪽은 숲, 아래쪽은 밭, 그리고 더 낮은 평지에는 논. 답십리의 국유지가 임야와 밭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이 지역에 논을 만들기에 적합한 충분히 넓은 저습지가 없었거나, 저습지의 논은 이미 민간 소유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한양 동쪽 관문 마을의 국유 밭은 어떤 용도였을까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인 동쪽 관로(官路)상에 위치한 답십리에는 역원(驛院) 관련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동대문(흥인지문) 일대를 관할하는 관아의 부속 농지, 또는 군영(軍營) 관련 국유 밭으로 설정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4필지 27,322㎡는 하나의 단일 용도보다 복합적인 역사적 맥락을 가진 농경지였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 밭들은 임야와의 경계 지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임야와 밭의 경계인 구릉 사면 중간 지점에서는 두 토지 이용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쌓인 문화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표조사에서 이 경계 구역을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임야-밭 경계 구역의 고고학적 중요성
임야와 밭이 만나는 구릉 사면 중간 구역은 두 토지 이용의 역사가 겹치는 복합 문화층 형성 가능 지점입니다. 산림 활동 관련 유구와 농경 활동 관련 유구가 함께 발견될 수 있으며, 두 지목의 역사적 전환 시점을 파악하는 데도 핵심 구역이 됩니다. 지표조사의 우선 구역으로 설정할 것을 권장합니다.
05
임야와 밭의 황금 비율 — 65 대 35가 말하는 것
임야 65.4%, 밭 34.6%. 이 비율이 흥미롭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어떤 지역도 임야와 밭만의 조합으로 국유지가 구성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가락동에는 임야가 있었지만 잡종지가 주를 이루었고, 돈암동에도 임야가 있었지만 잡종지의 비중이 훨씬 컸습니다. 순수하게 임야와 밭만으로 이루어진 국유지, 그것이 답십리의 유일한 특징입니다.
이 구성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1912년 답십리동의 국유지는 어떤 근대적 인프라(수도용지)나 특수 행정 목적(잡종지)과 무관한,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농림(農林) 국유지였다는 것입니다. 숲과 밭,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 국유지는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와 국가가 자연 환경을 관리하던 가장 원형에 가까운 방식을 보여줍니다.
65 대 35라는 비율도 흥미롭습니다. 임야가 밭보다 약 두 배 가까이 많습니다. 이는 답십리 구릉지의 상당 부분이 경작보다 산림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경사가 급하거나 토질이 좋지 않아 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운 구역이 임야로 남겨진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산림을 보호하는 정책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지형 분석과 역사 기록 비교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임야 (숲)
65.4%
3필지 51,729㎡. 구릉 상부·사면. 풍수 비보, 군사 감시, 목재 공급 복합 목적 가능.
밭 (농경)
34.6%
4필지 27,322㎡. 구릉 하부·완만 경사지. 역원 부속지, 군영 농지, 관아 밭 복합 가능.
06
동대문 역사 문화권, 문화재 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답십리동은 동대문구에 속합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한양도성의 핵심 구성 요소입니다. 답십리는 이 동대문 밖 동쪽으로 펼쳐진 역사 문화권의 일부입니다.
동대문에서 답십리까지 이어지는 동쪽 관로는 조선 500년 동안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통로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 방향이 이 동쪽이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 길을 걸었습니다. 답십리의 국유 임야와 밭은 이 역사적인 길 옆에서 묵묵히 그 모든 시대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역사적 맥락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작업입니다. 동쪽 관로와 임야·밭 국유지의 관계, 동대문 밖 역원 시설과 국유 밭의 연관성, 구릉 임야 안의 군사·풍수 시설 흔적을 파악하는 것이 답십리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입니다. 1912년 토지대장 기록이 그 조사의 지형도가 됩니다.
또한 답십리 일대는 1960~70년대 도시화 과정에서 구릉 일부가 절개되거나 매립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형 변형이 덜한 구역에서는 원래 임야와 밭의 형태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지형 분석과 1912년 지적도의 비교가 보존 상태 파악의 첫걸음입니다.

답십리 임야 51,729㎡는 1960~70년대 도시화 이전 자연 지형이 유지된 구역과 절개·성토된 구역이 혼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표조사 전 항공사진, 지형도, 1912년 지적도를 통한 사전 분석을 통해 원지형 보존 구역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조사 효율을 결정합니다.
07
발굴 성공 사례 — 구릉 임야와 관문 마을 밭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한양 도성 외곽 구릉 임야와 관문 마을 인근 밭에서의 발굴 조사가 어떤 성과를 만들어냈는지, 유사한 환경의 사례들이 답십리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서울 동부 지역 구릉 임야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 사례가 있습니다. 야트막한 구릉 위 임야의 표면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던 중,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화강암 주춧돌이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석으로 오해했지만 정밀 분석 결과 조선 후기 관사 건물의 기초석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시굴조사에서는 관사 건물 기초 구조와 함께 당시 관리들이 사용했던 백자와 청화백자 파편이 출토되었습니다. 구릉 임야가 단순한 산림이 아니라 국가 행정 시설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양 도성 관문 인근 밭에서의 사례도 있습니다. 동대문 외곽의 한 밭 구역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밭 경작층 아래에서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역원 건물 관련 유구와 분청사기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역원에서 쉬어가던 여행자들의 그릇과 생활 흔적이 그 자리를 400년 동안 지키고 있었습니다. 답십리의 밭 27,322㎡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야와 밭이 함께 있는 구릉지에서 통합 조사를 진행한 사례도 있습니다. 임야에서 발견된 봉수대 관련 석재 유구를 단서로 시굴조사를 확장했더니, 봉수대 봉군(烽軍)들의 거처 유구가 인근 밭 구역에서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임야의 봉수대와 밭의 봉군 거처가 기능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역사 단위였던 것입니다. 답십리 임야 3필지와 밭 4필지도 이런 통합적 시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답십리 문화재 조사의 핵심 전략 — 임야와 밭을 하나의 단위로
임야 3필지와 밭 4필지를 별개로 조사하지 말고, 구릉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입체적 공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임야 표면 조사 → 구릉 사면 경계 구역 시굴 → 밭 지표조사의 순서로 진행하면, 산림과 농경지가 어떻게 기능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역사 공간을 이루었는지 가장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08
답십리의 숲과 밭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답십리역 5번 출구를 나와 주변을 둘러보세요. 아파트와 빌라, 상가가 빼곡히 들어선 지금의 풍경 어디에도 1912년의 임야와 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빌딩들 아래, 도로 아래, 주차장 아래에 51,729㎡의 숲이 있었습니다. 27,322㎡의 밭이 있었습니다.
그 숲 안에서 수백 년 동안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었습니다. 봄이면 이름 모를 꽃이 피었고, 가을이면 낙엽이 쌓였습니다. 그 낙엽층 아래에 어쩌면 조선 병사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양을 지키던 망루의 기초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밭에서는 사람들이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긴 길의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 손길의 흔적이 밭두렁 아래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갈월동 6필지에서 시작해 답십리 7필지까지 왔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지목의,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의 국유지들을 살펴봤습니다. 그 모든 국유지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 발굴되기를, 기억되기를, 이야기되기를 기다리며 그 작고 큰 국유지들이 땅 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다림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1912년 토지대장이라는 기록이 그 응답의 출발점을 알려줍니다. 숲과 밭이 품은 이야기를 꺼내는 첫걸음,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임야 51,729㎡의 숲이 기억하고
밭 27,322㎡의 흙이 간직한
한양 동쪽 관문 마을의 이야기."

숲은 수백 년 동안 한양을 지키는 파수꾼이었습니다.
밭은 그 파수꾼들의 허기를 달래는 손길이었습니다.
7필지 79,051㎡가 함께 이루는 이 단순하고 진실된 조합이
1912년 답십리의 가장 솔직한 역사적 고백입니다.
지표조사의 첫발이 답십리 구릉을 오르는 그 순간,수백 년의 숲과 밭이 동시에 입을 엽니다.
이 긴 시리즈를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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