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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타고 구로구 오류동의 1912년으로!

  • 2025년 6월 6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오류동역 그 땅, 100년 전엔 기차 소리와 벼 이삭이 공존했다

1912년 구로구 오류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캐낸 철도·논밭·사람의 이야기

오류동역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그 순간,


딱 한 가지만 떠올려봐.


이 역 주변 땅 전체가


100년 전엔 벼가 익어가는 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논 한쪽에 일본인의 땅이 27필지나 있었다.



목차

  1. 타임머신 타고 1912년 오류동으로

  2. 논과 밭으로 가득했던 오류동의 풍경

  3. 집과 마을, 삶의 중심지였던 공간

  4. 산, 작지만 소중한 자연의 흔적

  5. 오류동과 철도의 운명적 만남

  6. 1912년 오류동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7. 일본인의 흔적, 역사 속에서 마주하다

  8. 단 한 필지 국유지, 그 숨겨진 이야기

  9. 오류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발굴의 의미

오류동. 구로구에 있는 이 동네를 떠올리면 대부분은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 그 주변의 빌라와 상가들, 그리고 평범한 서울 서쪽 주거지역을 연상할 거다. 특별히 역사적인 동네라는 인상은 없다. 그런데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에 따르면, 오류동은 당시 논과 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농촌 마을이면서 동시에 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거기에 일본인 소유 토지 27필지라는 식민지 역사의 흔적까지 담겨 있다. 지금부터 그 시간여행을 시작하자.


1. 타임머신 타고 1912년 오류동으로

1912년으로 돌아간 오류동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총 면적 약 88만 제곱미터가 넘는 땅 위에 논과 밭이 넘실거리고, 초가지붕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시 오류동은 서울 외곽의 전형적인 농촌이었지만, 철도가 지나는 교통 요충지이기도 했다.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인 소유 토지가 27필지나 들어와 있었다는 것도 이 동네가 단순한 농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복잡한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2. 논과 밭으로 가득했던 오류동의 풍경


1912년 오류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논이었다. 117필지, 497,129㎡. 그다음으로 밭이 146필지, 335,723㎡였다. 논과 밭을 합치면 263필지, 832,852㎡. 오류동 전체 면적의 거의 대부분이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117필지

논 (497,129㎡)

146필지

밭 (335,723㎡)

31필지

대지 (30,386㎡)

2필지

임야 (6,889㎡)

1필지

철도 용지 (15,497㎡)

1필지

국유지

117필지의 논. 지금 오류동역 주변을 걸어봐. 편의점, 카페, 빌라, 도로. 그게 전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이 100년 전엔 물 위에 하늘이 비치는 논이었다. 봄이면 모내기로 온 마을이 분주했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가 오류동 전체를 뒤덮었을 거다.

밭도 146필지나 됐다. 필지 수로는 오히려 논보다 많다. 배추·무·콩·보리가 계절마다 교대로 자라던 그 밭들이 지금은 아스팔트 아래에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그 흔적을 토양 층위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랫동안 경작된 땅은 독특한 색깔과 질감의 경작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논은 사라졌지만 땅은 기억한다.

"논밭이 사라지고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그 아래 흙은 지금도 농경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3. 집과 마을, 삶의 중심지였던 공간

논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오류동이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도 있었다. 31필지, 30,386㎡의 대지가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31필지 위에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초가지붕 아래 마당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을 거다. 지금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아파트가 아니라, 담장 너머로 이웃의 목소리가 들리고 고추장을 나눠 쓰던 그 가까운 삶의 방식이 이 31필지 위에 있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중요한 유구다.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 재층, 생활 도기 조각들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해준다. 31필지 중 어느 하나라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쳤다면, 오류동 조선인 마을의 생생한 생활상이 드러났을 거다.


4. 산, 작지만 소중한 자연의 흔적

오류동의 임야는 2필지, 6,889㎡에 불과했다. 오류동 전체 면적에서 보면 아주 작은 비율이지만, 이 두 필지의 작은 숲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졌던 의미는 그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

겨울을 나려면 아궁이에 넣을 땔감이 필요했다. 가스도 전기도 없던 시절, 나무는 생존의 연료였다. 그 나무를 구하러 이 작은 숲에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거다. 아이들은 그 숲에서 뛰어놀았고, 더운 여름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겠지. 크기는 작아도 그 숲이 마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5. 오류동과 철도의 운명적 만남

1912년 오류동 토지 기록에서 논밭과 다른 성격의 땅이 하나 등장한다. 철도 용지 1필지, 15,497㎡다. 오류동 전체에서 단 하나뿐인 이 철도 용지가 이 동네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1912년이면 경인선이 개통된 지 이미 12년이 지난 시점이다. 1900년에 개통된 경인선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조선 최초의 철도였는데, 오류동은 그 경인선이 지나는 길목에 있었다. 기차가 논밭 사이를 가르며 지나가던 풍경. 소를 몰고 밭을 갈던 농부 옆으로 증기기관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그 장면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충격이었을까.

그 철도 덕분에 오류동은 서울 외곽의 작은 농촌에서 교통 거점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오류동역이 그 시작점이었고, 그 역이 오류동의 풍경을 바꾸는 씨앗이 됐다. 단 1필지 15,497㎡의 철도 용지가 오류동의 미래를 결정지은 셈이다.


6. 1912년 오류동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1912년 오류동의 토지 기록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배씨로 46필지였다. 그다음은 최씨 36필지, 김씨 34필지, 조씨 25필지, 강씨 23필지, 유씨 22필지, 나씨 20필지, 이씨와 주씨가 각각 12필지씩이었다.

46필지

배씨

36필지

최씨

34필지

김씨

25필지

조씨

23필지

강씨

22필지

유씨

배씨가 가장 많다는 게 흥미롭다. 오류동처럼 한강 유역의 서울 서쪽 지역에서 배씨는 흔치 않은 성씨다. 경주 배씨, 성주 배씨 등 어느 계열인지에 따라 이 가문이 어디서 왔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가 달라진다. 46필지를 소유했다는 건 오류동에서 배씨 일가가 오랫동안 이 땅을 터전으로 삼아왔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배씨·최씨·김씨·조씨·강씨·유씨·나씨·이씨·주씨. 이 다양한 성씨들이 한 마을에서 논을 나눠 갈고, 밭두렁을 공유하며 살았다. 서로 혼맥으로 얽혀 있었을 수도 있고, 각자의 영역을 나눠 평화롭게 공존했을 수도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성씨 분포는 유물의 귀속과 마을 공동체 구조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7. 일본인의 흔적, 역사 속에서 마주하다

1912년 오류동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항목이 있다. 일본인 소유 토지 27필지다. 오류동 전체 필지에서 적지 않은 비중이다.

일본인 소유지 27필지가 말하는 것

1912년은 한일 강제병합 2년째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시기, 오류동에 일본인 27필지가 존재했다는 건 이 동네도 식민지 수탈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의미다. 철도가 지나는 교통 요지에 일본인들이 일찍 땅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철도는 개발 호재이고, 개발 호재에 자본이 먼저 달려드는 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27필지의 일본인 소유지. 이 땅들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기록마다 다를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토지를 확보하는 방식은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수탈, 토지조사사업을 빌미로 한 강제 취득, 헐값 매입 같은 방법들. 오류동의 조선인 농부들이 그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역사는 불편해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 불편한 기억이 현재를 이해하는 기반이 되고, 미래를 설계하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단순히 유물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이런 역사의 층위까지 기록하는 작업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8. 단 한 필지 국유지, 그 숨겨진 이야기

오류동의 토지 기록에서 눈에 띄는 숫자가 또 하나 있다. 국유지 단 1필지. 327필지가 넘는 전체 토지 중 고작 하나만 국유지였다는 게 오히려 독특하다.

이 단 1필지의 국유지는 무엇이었을까. 오류동에 철도가 지나간다는 맥락에서 보면, 역사(驛舍)나 철도 관련 공공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마을 공동 우물이나 공공 도로 부지였을 수도 있다. 단 1필지지만 그 하나가 마을 사람들 모두와 연결되는 공공의 공간이었을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공공 시설 부지는 독특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역사 관련 시설이었다면 열차 운영과 관련된 기물, 관청 부지였다면 공문서 보관 용기나 도장 같은 것들. 단 1필지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9. 오류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발굴의 의미



1912년의 오류동을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지금 이 동네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지 느껴진다. 117필지의 논, 146필지의 밭, 31필지의 집터, 2필지의 숲, 1필지의 철도, 1필지의 국유지, 27필지의 일본인 소유지. 이 숫자들 하나하나가 당시 오류동을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지금의 오류동은 계속 변하고 있다. 낡은 빌라가 헐리고, 새 아파트가 올라가고, 도로가 넓어지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것, 필요하다면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것. 그게 배씨와 최씨와 김씨의 논을 갈던 오류동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오류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하며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논 한 필지, 밭 한 뙈기에 담긴 이야기가 모이면, 이 도시 전체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오류동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릴 때,


딱 한 번만 발 아래를 생각해줘.



배씨 가문의 논이 있었고,


최씨 집안의 밭이 있었고,


낯선 일본인의 땅이 27필지나 비집고 들어와 있었고,


그 사이로 증기기관차가 처음으로 지나갔다.



복잡하고 아팠고, 그러나 꿋꿋했던


오류동 사람들의 시간이 아직 이 땅에 있다.



역사는 기차처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건, 지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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