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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서구 화곡동 지도 열어보니… 여긴 어디?

  • 2025년 4월 4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8일

강서구 화곡동 역사 탐구 | 문화재 발굴조사 기초자료

볏골짜기에서 빌라촌으로강서구 화곡동, 100년의 변신

1912년 화곡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땅과 사람의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시굴조사 안내 포함

지금 이 글을 읽기 전에, 딱 한 번만 창문을 내다봐.


빌라 옥상, 골목길, 낡은 담벼락, 그 아스팔트 아래.


그 땅이 100년 전에 황금빛 벼가 물결치던 들판이었다는 거, 믿겨져?


화곡동이라는 이름이 '벼가 익는 골짜기'에서 왔다는 사실.


그 이름의 진짜 의미가, 1912년 기록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지금부터 그 땅의 진짜 얼굴을 꺼낸다.


목차

  1. 화곡동, 이름 속에 숨어 있던 비밀

  2. 1912년 화곡동을 숫자로 읽다 — 300만㎡의 압도적 스케일

  3. 논 70%, 화곡동을 먹여 살린 벼의 이야기

  4. 322필지 밭의 풍경 — 사계절 내내 살아 숨 쉬던 작물들

  5. 수도용지와 연못이 있었던 마을 — 물의 공동체

  6. 49필지 대지, 정겨운 초가집 마을의 기억

  7. 김씨 1위, 원씨·최씨·한씨의 성씨 왕국 — 화곡동 땅 주인들

  8.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재개발 전 반드시 알아야 할 것

  9. 성공 사례 — 강서구 오곡동에서 확인된 역사 기록의 힘

  10. 이 땅이 전하는 말 — 화곡동 아스팔트 아래의 이야기



01화곡동, 이름 속에 숨어 있던 비밀

화곡동(禾谷洞)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풀면 '벼(禾) 골짜기(谷)'다. 벼가 잘 자라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 사람들이 이 땅을 바라보면서 지은 이름, 그 이름 안에 이미 화곡동의 정체가 다 담겨 있었다. 지금의 화곡동은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법정동이다. 빌라와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찬 이 동네가, 불과 100년 전에는 골짜기마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었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이 분석한 1912년 화곡동의 토지대장을 보면, 이름 그대로의 풍경이 숫자로 증명된다. 논과 밭이 전체 토지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다양한 성씨의 가문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생생한 기록을 지금부터 하나하나 풀어보겠다.

한 가지 더. 화곡동의 진흙땅은 1925년 이후 항아리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될 만큼 독특한 토질을 가지고 있었다. 인근 염창동의 도기 가마 11곳에 공급된 흙이 모두 화곡동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 땅은 벼를 키우고 항아리 흙을 제공하고 사람들의 삶을 받쳐온, 그야말로 살아 있는 생산의 터였다.

"땅은 이름을 먼저 받는다.


화곡(禾谷), 벼가 익는 골짜기라는 이름이


이 땅의 100년 전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021912년 화곡동을 숫자로 읽다 — 300만㎡의 압도적 스케일

1912년 기준 강서구 화곡동의 전체 면적은 2,995,805㎡, 필지 수는 725개였다. 약 300만 제곱미터, 이게 어느 정도 크기냐 하면 여의도 면적의 약 103%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화곡동 하나가 여의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크기였던 것이다. 지금의 화곡동이 여러 행정동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광활한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실감이 난다.

725필지1912년 화곡동 총 필지 수


전체 면적 약 300만㎡

2,054,743㎡논(답) 면적


전체의 약 69%

813,263㎡밭(전) 면적


335+322 필지 합산

279필지김씨 소유 필지


압도적 1위

725개 필지라는 숫자도 흥미롭다. 필지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땅이다. 김씨의 논, 이씨의 밭, 원씨의 대지. 그 하나하나에 한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었고, 한 가문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지금 화곡동 어딘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집이 서 있는 그 필지에 100년 전 어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지 한 번쯤 궁금해볼 만 하다.


03논 70%, 화곡동을 먹여 살린 벼의 이야기

1912년 화곡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땅은 논이었다. 335필지, 2,054,743㎡. 전체 면적의 무려 69%가 논이었다. 이 수치만으로도 화곡동이 얼마나 철저한 벼농사 중심 마을이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 화곡로를 따라 빼곡히 늘어선 빌라들 아래에, 100년 전에는 초록빛 모내기가 한창이었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풍경이 펼쳐졌다.

화곡동은 봉제산과 우장산 사이에 형성된 계곡 지형이다. 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논에 자연스럽게 공급되었고, 덕분에 천수답(하늘만 바라보는 논)이 아닌 비교적 안정적인 논농사가 가능했다. 옛 이름 '화곡리(禾谷里)'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 실제로 벼가 골짜기를 채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기록이 이름을 증명하고, 이름이 기록을 증명한다.

이 드넓은 논에서 봄이면 모를 심고 여름이면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낫으로 벼를 베어냈다. 그 수확의 계절에 화곡동에는 풍년가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기쁨의 소리가 지금은 빌라 골목의 소음으로 바뀌었지만, 땅의 기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논이었던 자리의 흙 속에는 당시의 농경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다.



04322필지 밭의 풍경 — 사계절 내내 살아 숨 쉬던 작물들

논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밭의 규모였다. 322필지, 813,263㎡. 논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땅이 모두 밭이었다. 이 밭에서는 배추와 무, 콩과 팥, 고추와 참깨, 마늘과 대파가 사계절을 나누어 자랐을 것이다. 화곡동 사람들은 논에서 쌀을 얻고 밭에서 반찬 거리를 얻었다. 완벽한 자급자족 생태계였다.

밭 농사는 논 농사보다 손이 더 많이 갔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내내 잡초와 씨름하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다음 해를 준비했다. 하루도 쉬지 않는 노동의 땅이었다. 그 땀과 수고가 화곡동 사람들의 삶을 유지시켰다. 지금 우리가 마트에서 1,500원에 사는 배추 한 포기가, 그 시절에는 온 가족이 한 계절을 투자한 결실이었다.

이 밭들이 있던 자리 중 일부는 지금 재개발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공사 중인 곳도 있다. 그런 곳에서 삽질이 시작되기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밭에서 사용하던 도구, 씨앗을 보관하던 항아리, 농가 생활의 흔적들이 땅속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화곡동의 흙은 유독 질이 좋았다는 역사 기록까지 있으니, 그 흙 속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곡동 토지 구성 한눈에 보기 (1912년 기준)



논(답) 335필지 / 2,054,743㎡ — 전체의 약 69%


밭(전) 322필지 / 813,263㎡ — 전체의 약 27%


대지 49필지 / 49,114㎡ — 주거 구역


잡종지 10필지 / 46,813㎡ — 다용도 부지


연못 2필지 / 677㎡ · 수도용지 1필지 / 895㎡



농경지(논+밭)가 전체의 96%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화곡동이 순수한 농업 생활권이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05수도용지와 연못이 있었던 마을 — 물의 공동체

1912년 화곡동 토지 기록에는 흥미로운 항목이 두 개 더 있다. 수도용지 1필지 895㎡와 연못 2필지 677㎡다. 수도용지는 당시 기준으로 공동 우물이나 수원 관리를 위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마을 전체가 하나의 우물을 공유하며 물을 길어 쓰던 시대, 그 우물 자리가 따로 필지로 등록될 만큼 중요하게 관리됐다는 뜻이다.

연못은 더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농업용 관개수를 저장하는 저수지였을 수도 있고, 물고기를 키우는 양식장이었을 수도 있다. 마을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고 여름을 보낸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겠지만, 연못이 있던 자리의 지하에는 오래된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퇴적층은 당시의 환경과 생태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물이 있던 자리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우물가에서 소문이 돌고,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놀았다. 화곡동의 수도용지와 연못은 단순한 물 공급 시설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살아 숨 쉬던 사교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의 기억이 땅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0649필지 대지, 정겨운 초가집 마을의 기억

주거 구역으로 등록된 대지는 49필지, 49,114㎡였다. 전체 토지에서 불과 1.6%를 차지하는 이 아담한 주거 공간에 화곡동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지금의 화곡동이 평방킬로미터당 4만 명이 넘는 인구밀도를 가진 서울 최고의 빽빽한 동네라는 것과 비교하면, 100년 전의 화곡동은 얼마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간이었을지가 그려진다.

이 49필지의 대지 위에는 어떤 집들이 있었을까. 가을이면 처마 아래 고추가 줄줄이 매달리고,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가 늘어서 있고, 부뚜막에서는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집들. 그 집들이 서 있던 자리의 흙 속에는 깨진 사발 한 조각, 녹슨 가위 하나, 동전 한 닢이 아직도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문화재가 되고, 역사가 된다.

잡종지로 분류된 10필지 46,813㎡도 놓칠 수 없다. 잡종지는 논도 밭도 집도 아닌 다용도 공간이었다. 마을 공동 마당, 가축 우리, 농기구 창고, 공동 방아가 있던 자리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하고 쉬고 이야기 나누던 그 공간의 흔적 역시 발굴조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07김씨 1위, 원씨·최씨·한씨의 성씨 왕국 — 화곡동 땅 주인들

1912년 화곡동의 토지 소유 성씨 분포를 보면 이 마을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압도적 1위는 김씨였다. 무려 279필지를 소유하며 화곡동 전체 토지의 38%를 한 성씨가 쥐고 있었다. 전국 최다 성씨의 위엄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순위

성씨

소유 필지

비고

1위

김씨(金氏)

279필지

전체 38% 차지 — 화곡동 최대 가문

2위

이씨(李氏)

87필지

전국 2위 성씨, 화곡동에서도 강세

3위

원씨(元氏)

42필지

희귀 성씨 — 화곡동 특유의 지역성

4위

최씨(崔氏)

40필지

박씨와 함께 공동 4위

4위

박씨(朴氏)

40필지

최씨와 함께 공동 4위

기타

조·정·한·장·민 등

다수

13개 성씨 이상 거주

눈길을 끄는 건 3위의 원씨(元氏)다. 원씨는 전국적으로도 그리 흔한 성씨가 아닌데, 화곡동에서 42필지로 3위를 차지했다는 건 이 지역에 원씨 가문의 집성촌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원씨 가문의 선산과 재실이 화곡동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고, 그 터에 가문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한씨(韓氏) 25필지도 흥미롭다. 화곡동 인근의 강서구 오곡동에서도 한씨가 103필지로 3위를 차지했다는 seoulheritage.org의 기록이 있다. 강서구 일대에 한씨 가문의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성씨 분포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조선 말기 강서 지역의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귀한 역사 자료다.



08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재개발 전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어보자. 화곡동은 지금 서울에서 손꼽히는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화곡1동 모아타운, 화곡본동 도심공공주택복합사업, 국회대로 인근 공공재개발 등 크고 작은 개발 계획이 이미 진행 중이거나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절차가 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예정 지역에 역사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전문 기관이 미리 확인하는 사전 조사다. 화곡동처럼 논과 밭이 전체 토지의 96%를 차지하고 수백 년간 사람들이 거주해온 지역은, 문화재 유존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지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화곡동의 독특한 진흙 토질은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목재 유물이나 종자 같은 유기질 문화재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사 단계

내용

특징

문화재 지표조사

문헌 검토, 현장 답사로 유적 가능성 파악

모든 개발사업 전 법적 의무

시굴조사

트렌치 굴착으로 유적 존재 여부 확인

지표조사 결과에 따라 진행

표본조사

일정 구역 발굴로 유적 성격·범위 파악

시굴 이후 필요 시 진행

정밀발굴조사

유적 전체를 체계적으로 발굴·기록

최종 단계, 가장 높은 비용

이 절차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가 공사 도중 유물이 발견되면 공사가 전면 중단될 수 있다. 그것이 개발업자에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반대로 사전에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제대로 마치면, 공사 진행 중에 이런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문화재 조사는 역사 보존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안정적인 개발을 위한 현실적 선택이기도 하다.

주의!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위반 시, 공사 강행 후 유물 발견 → 공사 전면 중단 + 형사처벌 가능. 반드시 국가유산청 등록 기관에 사전 지표조사를 의뢰해야 한다. 건물 신축, 리모델링, 토목 공사 전 모두 해당될 수 있다.


09성공 사례 — 강서구 오곡동에서 확인된 역사 기록의 힘

성공 사례 — 강서구 오곡동 1912년 역사 기록 분석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화곡동과 인접한 강서구 오곡동은 1912년 기준 697필지, 2,952,763㎡ 규모의 마을이었다. 이 중 논이 327필지, 1,844,467㎡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성씨별로는 김씨 116필지, 이씨 112필지, 한씨 103필지 순이었고, 일본인 소유지 15필지가 이미 1912년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은 오곡동 일대의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로 활용되어, 개발 전 유적 보존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화곡동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곡동 사례가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토지 기록은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발굴의 지도다. 김씨 가문이 집중적으로 소유하던 구역, 한씨 가문의 선산이 있었을 만한 곳, 일본인 소유지와 국유지가 겹치는 지점 같은 곳들이 발굴 우선 구역으로 선정될 수 있다. 화곡동의 279필지 김씨 소유지, 42필지 원씨 소유지도 마찬가지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과거를 파내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 과거를 지역의 이야기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는 동네의 뿌리를 알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화곡동이 '벼골짜기'였다는 사실이 단순한 어원 이야기를 넘어, 실제로 그 논과 밭의 흔적이 땅속에서 확인되는 날이 온다면 화곡동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어디에 문의할까?

국가유산청 공식 홈페이지 → www.khs.go.kr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www.nrich.go.kr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정보 → www.seoulheritage.org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정밀발굴조사 의뢰 가능개발 전 사전 상담 적극 권장


10이 땅이 전하는 말 — 화곡동 아스팔트 아래의 이야기

이 글을 쓰면서 자꾸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화곡동 골목 어딘가에서 오래된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할머니의 뒤로 낡은 빌라가 있고, 빌라 뒤로 재개발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발아래 아스팔트 너머에는, 수백 년 전 이 땅을 갈아엎던 조상의 손길이 잠들어 있다.

화곡동의 1912년 기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땅은 원래 벼의 땅이었다. 논 70%, 밭 27%, 집은 고작 2%. 사람보다 곡식이 더 많고, 콘크리트보다 흙이 더 깊었던 시절. 김씨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논두렁을 걷고, 원씨 아낙이 밭에서 배추를 뽑고,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쳤던 그 시절이, 지금 우리가 사는 화곡동의 진짜 첫 번째 챕터였다.

재개발은 계속될 것이다. 낡은 빌라가 허물어지고 새 아파트가 올라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땅이 열린다. 그 순간이 화곡동의 과거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다. 한 번 사라진 유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 파내어 기록한 역사는 영원히 남는다.

벼골짜기, 화곡동. 그 이름의 무게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난다면, 이 글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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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화곡동 골목을 걷는 당신에게.까치산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당신에게.빌라 창문으로 좁은 골목을 내다보는 당신에게.

그 골목 아래에, 수백 년 전 벼가 물결쳤다.김씨 할아버지가 논을 갈았고,원씨 가문 아이들이 연못에서 놀았고,마을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웃음을 나눴다.

우리는 지금 그 위에 살고 있다.그 사실이, 오늘 이 동네를조금 더 소중하게 느끼게 해주지 않나.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기억해줘야 한다.

참고 자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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