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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서구 전체 6,533필지 · 28,878,761㎡의 숨겨진 기록

  • 5월 31일
  • 5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지표조사

당신이 밟고 있는 이 땅,110년 전엔 누구의 것이었을까?

1912년 강서구 전체 6,533필지 · 28,878,761㎡의 숨겨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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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강서구에 살고 있다면, 이 글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당신이 매일 걷는 그 골목, 그 논두렁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110년 전 — 그곳엔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 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고, 얼마나 넓었으며,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지는 1912년 강서구의 실체, 지금부터 함께 파헤쳐 보자.


목차

1110년 전 강서구, 그 땅의 크기와 구성

2논과 밭 — 강서구를 먹여 살린 농경지의 비밀

3무덤, 사사지, 임야 — 죽은 자들의 땅

4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누가 강서구를 쥐고 있었나

5국유지·법인·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의 흔적

6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01 · 기초 통계

110년 전 강서구, 그 땅의 크기와 구성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1912년, 강서구는 총 6,533필지, 면적으로는 28,878,761㎡에 달하는 거대한 땅이었다. 이 숫자를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서울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에 해당한다. 지금의 번화한 아파트 단지와 상업지구가 자리 잡기 훨씬 전, 이 넓은 땅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이나 공사 이전에 해당 지역의 역사적 흔적과 문화재 분포 현황을 파악하는 기초적인 조사 과정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인 seoulheritage.org는 이처럼 1912년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함으로써, 단순한 숫자 너머에 있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총 필지 수

6,533

필지

총 면적

28,878,761

논 (전체 1위)

2,996

필지

밭 (전체 2위)

2,683

필지

전체 6,533필지 중 논이 2,996필지, 밭이 2,683필지로 두 지목을 합산하면 무려 5,679필지에 달한다. 전체 필지의 약 87%가 순수한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심 속 강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그야말로 광활한 농촌 지대였던 것이다.


02 · 농경지 분석

논과 밭 — 강서구를 먹여 살린 농경지의 비밀



논은 2,996필지, 16,010,491㎡였다. 총 면적 기준으로 보면 강서구 전체 땅의 무려 55.4%가 물을 댄 논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울 전체를 놓고 봐도 이만한 논 비율을 가진 구는 드물었다. 강서구는 한강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수리(水利) 조건이 뛰어났고, 그 덕에 서울 근교 최대의 쌀 생산지 중 하나로 기능했다.

밭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2,683필지 9,532,670㎡의 밭이 강서구 전역에 펼쳐져 있었으니, 논과 밭을 합산한 농경지 총면적은 25,543,161㎡에 이른다. 이는 전체 면적의 88.4%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강서구는 서울의 식량 창고였다.

논과 밭의 비율을 비교하면 면적 기준으로 논이 밭보다 약 1.68배 더 넓었다. 당시 조선의 주식이 쌀이었음을 감안하면, 논의 비중이 더 높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강서구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 아래에는 그 오래된 논두렁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이런 역사의 층위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03 · 묘지와 특수 지목

무덤, 사사지, 임야 — 죽은 자들의 땅

살아있는 자들의 논과 밭 사이사이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공간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12년 강서구의 묘지는 76필지, 174,146㎡였다. 이는 대략 축구 경기장 24개 규모에 해당한다. 지금은 아파트나 도로가 들어선 자리이지만, 한때 그곳은 조상 대대로 묘를 써온 마을 공동묘지였다.

사사지(寺社地), 즉 사찰이나 신사 관련 부지는 3필지 2,757㎡로 규모가 매우 작았다. 이는 강서구가 종교적 중심지보다는 순수 농경 지대로서의 성격이 강했음을 말해준다. 임야는 79필지 359,323㎡로 묘지보다 많았다. 개봉동이나 화곡동 주변의 낮은 야산들이 대부분 이 임야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

76

필지 / 174,146㎡

사사지

3

필지 / 2,757㎡

임야

79

필지 / 359,323㎡

연못(지소)

3

개소 / 1,242㎡

잡종지는 189필지 2,074,429㎡였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토지를 일컫는 지목으로, 창고, 작은 공터, 경계 지대 등이 포함된다. 전체 면적 대비로는 약 7.2%에 해당한다. 대지, 즉 집이 들어선 땅은 503필지 722,803㎡로 전체 면적의 약 2.5%에 불과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드문드문 집들이 자리했다는 뜻이다.



04 · 성씨별 토지 분포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누가 강서구를 쥐고 있었나

이제 가장 흥미로운 대목으로 들어가 보자. 1912년 강서구의 토지는 과연 누가 얼마나 갖고 있었을까. 당시 토지 조사 사업의 기록을 보면 성씨별 소유 현황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난다.

김씨

1,612필지

이씨

1,092필지

최씨

457필지

장씨

360필지

유씨

312필지

권씨

261필지

조씨

204필지

박씨

197필지

한씨

160필지

정씨

159필지

심씨

154필지

황씨

125필지

윤씨

106필지

압도적인 1위는 김씨로 1,612필지를 소유했다. 2위 이씨(1,092필지)와 합산하면 두 성씨만으로 전체 필지의 약 41.4%를 차지했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지주 계층의 분포가 일제 초기 토지 조사 시점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성공 사례 — 토지 기록을 통한 역사 복원

실제로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1912년 토지 조사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대규모 김씨 문중 소유지가 집중되어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를 토대로 해당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 중기의 기와 파편과 생활 유물이 대거 출토되어 지역 문화재청에 보고된 사례가 있다. 단순한 숫자 기록이 살아있는 문화재 발굴로 이어진 좋은 예다.


05 · 식민지의 흔적

국유지·법인·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의 흔적

1912년이라는 시점은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1910년)된 지 불과 2년이 지난 때였다. 이 시기의 토지 기록에는 식민지 시대의 구조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유지는 294필지였다. 이 땅들은 조선 왕실이나 관청의 소유였다가 식민지 정부로 귀속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공동 소유 토지는 겨우 2필지, 법인 소유는 50필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수치가 있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15필지에 그쳤다는 것이다.

일본인 소유 비율이 15필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강서구가 서울의 다른 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 자본의 침투가 더뎠음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의 중구나 종로구는 일본인 소유 필지가 수백 필지를 넘었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강서구의 농촌적 성격이 오히려 외래 자본으로부터 토지를 지켜내는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대적 낮은 수치가 역사의 비극을 가리지는 않는다. 토지 조사 사업 자체가 조선인의 관습적 토지 소유권을 부정하고, 일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유 관계를 재편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복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06 · 왜 중요한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110년 전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순한 역사 공부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이 데이터는 현재 진행 중인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핵심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 예정 부지에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과정이다. 1912년 토지 기록에서 묘지가 집중된 필지가 확인되면, 해당 구역의 시굴조사 우선순위가 높아진다. 무덤 주변에는 부장품과 생활 유물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발굴조사로 이어지면,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의 조선 시대 무덤이나 고려 시대 유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성씨별 집중 소유 지역은 특정 문중의 재실(齋室)이나 사당(祠堂)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씨 일가가 1,612필지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구역을 중심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 고문서나 건축 유적이 발견될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들이 역사적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하는 이유다.

성공 사례 — 발굴조사를 통한 문화재 보호

2020년대 초 강서구 내 재개발 사업 예정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시행되었다. 1912년 지목 기록에서 해당 구역이 묘지와 임야가 중첩된 지점임을 확인한 조사팀은 시굴조사를 병행 실시했고, 그 결과 조선 후기 분묘 2기와 도기류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덕분에 해당 유물들은 현장 이전 보존 처리를 거쳐 지역 박물관에 영구 소장될 수 있었다. 발굴 전에 사라질 뻔했던 역사가 지표조사 한 번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지나간 것'으로 여기지만, 땅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강서구의 논밭 아래, 옛 무덤 자리 아래, 김씨 문중의 땅 아래 — 그 모든 곳에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다.

당신이 강서구에서 아파트를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땅을 파는 일과 관련이 있다면 — 문화재 지표조사는 법적 의무이자 역사와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조사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1912년처럼 누군가 꼼꼼히 기록해 둔 데이터들이다.

110년이 흘러도땅은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당신이 밟고 있는 이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다. 누군가의 논이었고, 조상의 무덤이었으며, 한 가문의 삶 전부였다. 우리가 문화재를 지키는 이유는 과거를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땅 위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도, 그 기억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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