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근대가 맞물리던 1912년의 송파구 송파동, 이 땅은 어떤 삶을 담고 있었을지 상상하는 여정을 함께 떠나보자.
- 2025년 6월 1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롯데타워 아래 그 땅, 100년 전엔 밭이 펼쳐지고 동척이 30필지를 집어삼켰다
1912년 송파구 송파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밭과 마을공동체와 수탈의 이야기
롯데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그 순간,
발 밑 저 땅을 한 번만 봐.
저 아파트 단지, 저 잠실 거리.
100년 전 그 자리엔 145필지의 밭이 있었고,
동척이 30필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18필지를 공동으로 지켜내고 있었다.

목차
숨겨진 역사의 땅, 송파동을 걷다
논과 밭이 말해주는 당시 풍경
송파동의 집, 사람들의 삶이 깃든 곳
산 하나, 잡종지 하나 — 작지만 소중한 공간들
성씨로 보는 송파동의 옛 주민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마을 공동체의 공존
역사를 품은 송파동, 발굴의 문을 열다
송파동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롯데월드타워, 잠실운동장, 석촌호수.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스카이라인 중 하나를 자랑하는 이 동네가 110년 전에는 논과 밭이 펼쳐진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고 하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거다. 그런데 1912년 기록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송파동은 242필지, 722,608㎡의 땅으로 이루어진 농경 중심 마을이었다. 그 안에는 조선인 가문들의 삶도, 마을 공동체의 자치도,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도 함께 담겨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보자.
1. 숨겨진 역사의 땅, 송파동을 걷다
지금의 송파동을 걷다 보면, 이 동네가 역사적으로 꽤 흥미로운 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석촌호수는 원래 한강의 옛 물길, 즉 구 송파강이 흘렀던 자리다. 그 물길이 막히면서 생겨난 호수가 지금의 석촌호수다. 이 한강 물길이 송파동에 미친 영향은 토지 이용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1912년 송파동은 한강과 가까운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논이 11필지, 23,910㎡로 비교적 적었다. 반면 밭은 145필지, 622,339㎡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건 당시 송파동이 치수가 완전하지 않아 논농사보다 밭농사에 더 적합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강 범람의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 논을 짓는 건 위험했을 테니까. 그 대신 조금 높은 지대에 밭을 일궈 배추·콩·고추·마늘 같은 작물을 기르는 방식을 선택했을 거다.
2. 논과 밭이 말해주는 당시 풍경

145필지, 622,339㎡의 밭. 이 숫자가 1912년 송파동의 핵심이다. 전체 722,608㎡ 중 86%가 넘는 면적이 밭이었다는 건 송파동이 사실상 밭농사 특화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242필지
송파동 전체 필지
145필지
밭 (622,339㎡)
11필지
논 (23,910㎡)
79필지
대지 (60,975㎡)
30필지
동척 소유지
18필지
마을 공동 소유
622,339㎡의 밭. 축구장 약 87개를 채울 수 있는 넓이다. 지금 롯데타워가 서 있는 그 자리, 잠실운동장이 있는 그 자리, 석촌호수 주변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그 자리가 100년 전엔 온통 밭이었다. 봄에 씨앗을 심고, 여름에 잡초를 뽑고, 가을에 수확하는 그 리듬이 송파동 145필지 위에서 해마다 반복됐다.
그런데 논이 11필지뿐이라는 게 흥미롭다. 한강 가까이 있으면서도 논이 적었다는 건, 석촌호수의 전신인 구 송파강 물길이 범람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보면, 홍수의 흔적은 토양 층위에 뚜렷하게 남는다. 모래와 진흙이 교대로 쌓인 층위, 수중 식물의 씨앗, 범람으로 인한 유물 이동 흔적 같은 것들이다. 송파동 지하에서 그런 층위가 나온다면, 당시 한강과 이 동네의 관계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다.
"롯데타워가 솟기 전, 그 자리에 배추 밭이 있었다. 그 배추가 송파동 사람들의 김장을 책임졌다."
3. 송파동의 집, 사람들의 삶이 깃든 곳
145필지의 밭과 함께 송파동을 이룬 건 79필지, 60,975㎡의 대지였다. 전체 242필지 중 79필지가 집터라는 건 꽤 많은 비율이다. 밭 두 필지마다 집 한 채가 있었던 셈이다.
79필지의 집들. 초가지붕 아래 마당이 있고, 우물이 있고,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었을 그 집들.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을 거다. 낮에 밭에서 함께 일한 이웃이 밤엔 담장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 공동체가 이 79필지 위에 있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생활 유구의 보고다.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 재층, 생활 도기, 우물 구조물 같은 것들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해준다. 송파동의 개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사 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79필지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

4. 산 하나, 잡종지 하나 — 작지만 소중한 공간들
1912년 송파동에는 임야가 1필지, 4,512㎡뿐이었다. 송파동 전체 면적에서 보면 아주 작은 비중이지만, 이 하나뿐인 숲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상상 이상이다. 땔감을 구하러 가는 아이들의 발소리, 여름 땡볕에 그늘을 찾아 나무 아래 앉은 농부들. 단 1필지지만 마을의 허파 같은 역할을 했을 거다.
잡종지도 있었다. 6필지, 10,869㎡.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이 땅이 마을에서 어떤 공간으로 활용됐는지는 추론이 가능하다. 마을 잔치가 열리는 광장이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수도 있고, 장날마다 소를 묶어두던 공터였을 수도 있다. 6필지 10,869㎡의 잡종지가 마을 공동체의 일상을 담은 살아있는 공간이었을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잡종지는 뜻밖의 유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된 땅이기 때문이다. 동전, 도기 파편, 동물 뼈, 놀이 도구 같은 생활 유물부터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기물까지. 용도가 불분명한 땅일수록 오히려 더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수 있다.
5. 성씨로 보는 송파동의 옛 주민들
1912년 송파동 토지 기록에는 이씨 36필지, 김씨 30필지, 정씨 17필지, 강씨 10필지 순으로 성씨들이 등장한다.
36필지
이씨
30필지
김씨
17필지
정씨
10필지
강씨
이씨 36필지가 가장 많다. 전주 이씨·여주 이씨·경주 이씨 등 어느 계열인지에 따라 이 가문의 역사가 달라지지만, 어느 쪽이든 이 가문이 송파동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건 분명하다. 36필지의 이씨와 30필지의 김씨가 마을의 양대 축이었을 거다.
정씨 17필지도 눈에 띈다. 정씨는 송파 일대에서 오랫동안 세를 형성했던 가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씨 10필지도 마찬가지다. 이 네 성씨가 합치면 93필지로, 전체 242필지의 38%에 달한다. 이들이 송파동 마을의 중심 세력이었을 거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성씨 분포는 출토 유물의 귀속을 추적하는 데 실용적인 역할을 한다. 36필지 이씨 가문이 살았던 구역에서 나온 비석이나 도기라면, 그게 어느 이씨 가문의 것인지 기록과 연결해볼 수 있다. 파편 하나가 성씨 기록과 만나면 이름 없는 조각이 갑자기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
6.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마을 공동체의 공존

1912년 송파동 기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두 개의 숫자가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30필지, 그리고 마을 공동 소유지 18필지.
동척 30필지 vs 마을 공동체 18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 장악을 위해 세운 국책 수탈 기관이다. 1917년 말 기준 조선 총독부 다음의 최대 지주로, 전국 논밭의 12.3%를 소유했다. 송파동 30필지는 그 거대한 수탈 시스템의 일부였다. 반면 마을 공동 소유 18필지는 그 압박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켜낸 땅이다. 수탈과 저항이 같은 마을 안에 공존했던 거다.
동척 30필지.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오늘날 롯데타워가 서 있는 지역 어딘가에 100년 전 동척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는 뜻이다. 그 땅에서 일했던 조선인 소작농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내야 했다. 자신이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둔 작물의 절반이 동척으로 넘어가던 그 구조 속에서, 송파동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해봐.
그런데 그 옆에 마을 공동 소유지 18필지가 있었다는 게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동척이 30필지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18필지를 공동으로 지켜내고 있었다. 그 18필지가 어떻게 운영됐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마을 공동체가 그 땅을 함께 관리하며 서로를 지탱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수탈의 시대에 공동체로 버텨낸 송파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18필지 안에 있다.
7. 역사를 품은 송파동, 발굴의 문을 열다

송파동의 1912년 기록을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롯데타워가 서 있는 이 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지 느껴진다. 145필지의 밭, 79필지의 집, 11필지의 논, 1필지의 산, 6필지의 잡종지, 30필지의 동척 소유지, 18필지의 마을 공동체 땅. 이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1912년 송파동의 진짜 얼굴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이런 땅의 역사를 개발 전에 미리 확인하는 작업이다.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설 공사는 법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표본조사·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송파동처럼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동척의 역사까지 얽힌 지역은 지하에 다양한 역사 층위가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송파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개발이 계속되는 송파 일대에서, 공사 시작 전 지표조사를 통해 이씨·김씨·정씨·강씨 가문이 일군 그 땅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내는 것. 그게 롯데타워 아래 잠든 역사를 지키는 방법이다.

석촌호수 옆을 걸을 때, 한 번만 멈춰봐.
이 호수의 전신은 한강 물길이었고,
그 물길 옆 145필지의 밭에서
이씨와 김씨와 정씨와 강씨가 배추를 길렀고,
동척이 그 땅 30필지를 빼앗아갔고,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18필지를 함께 지켜냈다.
롯데타워는 높지만,
그 아래 땅이 살아온 시간은 더 깊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게 이 땅에 사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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