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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송파구 가락동 국유지의 비밀 — 잡종지 48,948㎡, 백제 역사의 땅이 간직한 110년

  • 3일 전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데이터

"백제의 심장부 바로 옆에,


110년 전 6필지의 땅이 아무도 모르게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올림픽공원과 몽촌토성, 그리고 풍납토성이 있는 송파구.


그 한복판 가락동의 국유지 55,206㎡ 속에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는지 지금 파헤쳐 봅니다.

1912년 송파구 가락동 국유지의 비밀 — 잡종지 48,948㎡, 백제 역사의 땅이 간직한 110년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서울 송파구 가락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6필지총면적 55,206㎡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 가락동, 백제의 기억 위에 세워진 동네

02 1912년 가락동 국유지 전체 통계 — 6필지 55,206㎡의 구성

03 잡종지 3필지 48,948㎡ — 전체의 88.7%가 품은 비밀

04 임야 1필지 661㎡ — 작은 산림이 전하는 메시지

05 나머지 2필지 5,597㎡ — 기록의 공백이 주는 단서

06 백제 유적지 인근 가락동, 문화재 지표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

07 발굴 성공 사례 — 송파 일대 잡종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08 가락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01

가락동, 백제의 기억 위에 세워진 동네

송파구 가락동을 가본 적 있으신가요? 가락시장, 가락몰, 그리고 복잡한 도로와 아파트 단지가 가득한 그 동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동네가 품고 있는 역사적 무게는 서울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특별합니다.

가락동에서 불과 1~2킬로미터 반경 안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 시기 핵심 유적지입니다. 즉 가락동은 한국 고대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백제 한성 시대의 도읍 권역 안에 위치한 동네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땅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달라집니다.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던 시절. 가락동 일대는 지금처럼 도시화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한강 지류와 농경지, 야트막한 구릉과 산림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한강 남쪽 마을이었습니다. 그 속에 국유지 6필지 55,206㎡가 조용히 존재했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02

1912년 가락동 국유지 전체 통계 — 6필지 55,206㎡의 구성

기록을 직접 들여다봅시다. 1912년 송파구 가락동의 국유지는 총 6필지, 면적 55,206㎡였습니다. 55,206㎡는 축구장 약 7.7개를 이어붙인 넓이입니다. 서울 도심의 한 동네 안에 이 정도 규모의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것도 백제 유적지 인근에 있었다는 맥락이 더해지면 이 기록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현재 공개된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내역은 잡종지 3필지 48,948㎡와 임야 1필지 661㎡입니다. 이 두 지목의 합계가 49,609㎡이고, 전체 55,206㎡에서 이를 빼면 5,597㎡가 나머지 2필지의 면적이 됩니다. 이 나머지 2필지의 지목은 추가 기록 조사가 필요하지만, 전체 구성만으로도 가락동 국유지의 성격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7.7배

55,206㎡


축구장 7.7개 크기.


백제 유적 권역 안의 가락동 국유지, 1912년의 기록.

총 필지

6필지

가락동 전체 국유지

총 면적

55,206㎡

축구장 약 7.7배

잡종지 비율

88.7%

3필지 48,948㎡

임야

661㎡

1필지

잡종지

48,948㎡ (88.7%)

나머지 2필지

5,597㎡ (10.1%)

임야

661㎡ (1.2%)

지목

필지 수

면적 (㎡)

비율

잡종지

3필지

48,948㎡

88.7%

미확인 지목

2필지

5,597㎡

10.1%

임야

1필지

661㎡

1.2%

합계

6필지

55,206㎡

100%

갈월동 (용산구)

5,742㎡

6필지

당산동 (영등포구)

155,703㎡

36필지

목동 (양천구)

2,495,323㎡

18필지

가락동 (송파구)

55,206㎡

6필지 ← 지금 여기


03

잡종지 3필지 48,948㎡ — 전체의 88.7%가 품은 비밀

3필지에 48,948㎡. 가락동 국유지의 핵심은 단연 이 잡종지입니다. 전체의 88.7%를 차지하며, 1필지당 평균 면적이 16,316㎡에 달합니다. 축구장 2.3개 크기의 단일 필지가 3개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광대한 잡종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락동의 지리적 특성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락동은 한강 지류가 흐르는 저지대와 구릉지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지형입니다.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같은 백제 유적이 바로 이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이 땅이 고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좋은 땅에는 오랜 역사가 쌓입니다.

1912년의 잡종지는 특정 지목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토지였습니다. 가락동의 잡종지 3필지는 한강 지류 인근의 갈대밭이나 습지였을 수도 있고,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이나 마을 공동 목초지로 쓰이던 땅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혹은 백제 시대 이래로 마을 공동지로 전해 내려온 땅이 국유지로 편입된 경우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 잡종지 48,948㎡는 매우 높은 잠재적 가치를 가집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인근 지역에서 이미 수차례 예상치 못한 백제 유구가 발굴된 전례가 있습니다. 가락동의 잡종지가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지표조사를 통해 지표면의 유물 분포를 먼저 확인하고, 시굴조사로 지하 층위를 검토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바로 옆에 있다는 지리적 사실은, 가락동 잡종지 아래에 백제 시대 문화층이 존재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줍니다. 잡종지라는 이름이 붙은 땅이 오히려 가장 오래되고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04

임야 1필지 661㎡ — 작은 산림이 전하는 메시지

661㎡. 약 200평 정도의 작은 임야입니다. 전체 국유지 중 가장 작은 면적을 가진 이 필지가 왜 주목받아야 할까요? 답은 임야라는 지목의 특성에 있습니다.

임야는 나무가 자라는 산림 지대입니다. 조선시대와 그 이전부터 임야는 종종 묘지 부지, 사찰 경내지, 또는 마을의 신성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국유지로 분류된 임야라면 왕실 관련 묘역이거나, 국가가 관리하는 특정 시설의 부속 산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가락동의 지형적 맥락입니다. 이 일대는 백제 한성 시기 왕실 관련 유적이 집중된 권역입니다. 661㎡의 임야가 백제 또는 그 이후 시대의 묘역이나 제의 공간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작은 면적이지만 지표조사에서 기와편, 토기 파편, 또는 석재 유구가 확인된다면 시굴조사로 바로 이어질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임야 661㎡는 숫자로는 작지만, 역사적으로는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지입니다. 왕실 묘역, 사찰 경내지, 마을 신림 등 다양한 역사적 성격이 중첩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풍납토성·몽촌토성 인근이라는 지리적 맥락은 이 임야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줍니다.



05

나머지 2필지 5,597㎡ — 기록의 공백이 주는 단서

전체 6필지 중 잡종지 3필지와 임야 1필지를 제외한 나머지 2필지의 지목은 현재 공개된 기록에서 확인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2필지의 면적인 5,597㎡가 전혀 의미 없는 숫자는 아닙니다.

5,597㎡는 약 1,693평 정도입니다. 이 규모는 대지라면 상당한 건물군이 들어설 수 있는 면적이고, 논이나 밭이라면 여러 가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경지 규모입니다. 1912년 가락동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 2필지는 한강 지류 인근의 논이거나, 구릉지의 밭이거나, 또는 마을 공동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록의 공백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런 공백을 채우는 역할도 합니다. 실물 조사를 통해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현장에서 직접 검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시굴조사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기록 조사 필요 사항

가락동 국유지 6필지 중 2필지의 지목은 추가 문서 조사가 필요합니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 원본 대장, 구 경기도 시흥군 고지도, 일제강점기 지적도 원본 등의 교차 분석을 통해 이 2필지의 지목과 경계를 정밀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지표조사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06

백제 유적지 인근 가락동, 문화재 지표조사가 더욱 중요한 이유

가락동을 특별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바로 지리적 위치입니다. 풍납토성까지 직선 거리로 약 1킬로미터, 몽촌토성까지 약 1.5킬로미터. 이 두 유적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함락되기 전까지 백제의 수도 한성이 있던 공간입니다. 즉 가락동은 약 500년간 백제 왕도의 핵심 권역 안에 포함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백제 한성 시기(기원전 18년~서기 475년)의 유적은 현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이 조사를 거듭할수록 밝혀지고 있습니다. 가락동의 잡종지 48,948㎡와 임야 661㎡가 바로 그 확장된 범위 안에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모든 가능성을 검증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 분포와 지형의 특성을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1912년 토지대장이라는 기초 기록은 어느 구역을 우선 살펴야 하는지 판단하는 핵심 나침반이 됩니다. 잡종지 3필지의 경계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임야 661㎡가 현재 어느 위치에 해당하는지를 1912년 기록과 현재 지적도를 대조해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출발점입니다.

이어지는 시굴조사에서는 선택된 대표 구역을 실제로 파 내려가며 지하 층위를 확인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제 시대 유물이 나온다면, 가락동 국유지 일대는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 검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백제 이후 시대의 문화층만 확인되더라도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적 발견입니다.



백제 유적 권역 인근 토지에서 개발 사업이 진행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화되어 있습니다. 가락동 국유지 일대도 이 기준에 해당할 수 있으며,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로 단계가 상향될 수 있습니다.


07

발굴 성공 사례 — 송파 일대 잡종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이 지역에서 실제로 어떤 발굴 성과가 있었는지 살펴보면, 가락동 국유지의 잠재적 가치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풍납토성 인근 재개발 사업 부지에서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평범한 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표면에서 기와편 몇 점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백제 시기 특유의 승문(繩文) 기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단서 하나로 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결국 백제 한성기의 주거 유구와 저장 구덩이, 그리고 토기류 수십 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아무 가치 없어 보이던 빈 땅이 백제의 일상을 간직한 보물창고였던 것입니다.

몽촌토성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잡종지로 기록된 국유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제 시대 집수정(集水井) 유구와 목재 구조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저습지 환경 덕분에 목재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고, 이는 백제 시대 목공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역사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지표조사에서 작은 단서를 발견하고, 그 단서를 놓치지 않고 시굴조사로 이어간 결과입니다. 가락동 국유지 55,206㎡도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세상에 내놓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송파 일대 발굴 성공의 공통 공식

① 1912년 토지대장 등 역사 기록 사전 검토 → ②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물 분포 확인 → ③ 시굴조사로 지하 층위 검증 → ④ 표본·발굴조사로 유구 전면 확인. 이 순서를 지킬 때 가장 많은 것을 잃지 않고 역사를 꺼낼 수 있습니다. 가락동 6필지의 출발점은 지금 이 기록 검토에 있습니다.



08

가락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가락시장 근처 골목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 아래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일상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일상의 땅 아래, 1912년 기록이 증명하는 국유지 55,206㎡가 있고, 그 안에 잡종지 48,948㎡의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풍납토성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이 땅이 백제의 기억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이 땅은 특별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결국 우리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민족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가락동 땅속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그래서 고고학자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관심이, 그 조사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만드는 첫걸음입니다.



"6필지의 땅이 품은 2,000년의 시간.


우리는 아직 그 이야기의 첫 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잡종지 48,948㎡는 지목 이름이 말해주듯 아직 분류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임야 661㎡에는 누군가의 마지막 잠이 깃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나머지 2필지의 공백은 더 많은 기록 조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제의 심장부 바로 옆, 가락동의 땅은제대로 된 첫 질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질문의 시작이 바로 1912년 토지대장 기록입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관심을 가져주세요.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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